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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에서] 플랫폼 자율 규제, 尹정부 ‘책임회피’ 안 되려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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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 경제를 민간이 끌고 가도록, 정부는 뒤에서 ‘밀어주겠다’ 한다. 그런데 그 수레 뒤에 7개 부처가 붙었다. ‘일을 잘하겠다’며 중요한 문제를 수레에 쓸어 담았다. 또 ‘자율이니까’ 온갖 이해관계자들을 수레 주변에 다 불러 세웠다.

윤석열 정부의 경제 정책 ‘플랫폼 민간 자율기구’의 진행 상황이다. 네이버·카카오·쿠팡·배달의민족 같은 대형 플랫폼에 대해 전 정부는 법을 만들어 규제하려 했는데, 현 정부는 민간 자율 규제로 방향을 잡았다. 플랫폼과 이해관계자들이 직접 자율규제 방안을 만들고 운영하도록 정부가 지원한다는 것.

그런데 시작부터 우려가 나온다. “은근슬쩍 과거의 문제 됐던 법안을 자율기구를 통해 이루고자 한다”(계인국 고려대 행정대학원 교수), “그 안에 너무나 많은 이해관계자가 있어서 자칫 성토장 정도로 되지 않을까 하는 우려가 있다”(이현재 우아한형제들 이사). 지난 21일과 22일 각각 열린 인터넷기업협회 ‘플랫폼 자율규제 세미나’와 기획재정부·코리아스타트업포럼 ‘디지털경제포럼’에서 나온 현장의 목소리다. 이들이 이야기하는 ‘자율 규제를 위한 조건’은 다음과 같았다.

한기정 공정거래위원장(왼쪽 두번째)이 22일 배달앱 3사 (배달의민족,요기요,쿠팡이츠) 대표와 자영업자들과 함께 간담회를 하고 있다. 사진 연합뉴스

한기정 공정거래위원장(왼쪽 두번째)이 22일 배달앱 3사 (배달의민족,요기요,쿠팡이츠) 대표와 자영업자들과 함께 간담회를 하고 있다. 사진 연합뉴스

①“자율규제가 만능열쇠?”

기획재정부·과학기술정보통신부·고용노동부·중소벤처기업부·공정거래위원회·방송통신위원회·개인정보보호위원회. 현재 플랫폼 민간 자율기구에 참여한 정부 부처들이다. 다루는 분야도 넓다. 자율기구는 ^갑을 ^소비자·이용자 ^데이터·인공지능 ^ESG(환경∙사회∙지배구조) 4개 분과로 운영된다. 여기서 배달앱과 오픈마켓의 수수료 및 중소상인·배달종사자 상생, 배달료, 골목상권 침해, 개인정보 보호, 데이터 투명성 및 AI 신뢰도, 디지털 포용, 기업지배구조 등을 다룰 계획이다.

이렇다보니 “기구에서 플랫폼 관련 모든 문제를 다 해결할 것처럼 논의가 진행되고 있다”(조용기 인기협 정책국장)는 지적이 나온다. 사회 갈등이 첨예한 사안을 ‘자율 기구’만으로 풀 수 없다는 것. 특히 배달앱과 오픈마켓, 입점 상인과 관련 종사자까지 참여하는 1분과(갑을)에서는 첫 회의부터 긴장감이 팽팽했다고 한다. 플랫폼 자율 규제 법제화 TF의 일원인 선지원 광운대 법학부 교수는 “법으로 규제할 영역과 자율 규제 영역, 규제가 필요 없는 영역을 분명히 나누고 시작해야 한다”고 말했다.

②“무늬만 자율?”

과기부 담당자는 “우리는 판만 깔고 논의는 민간이 한다”고 했다. 하지만 4개 분과 구도부터가 현 정부 인수위 때 정한 틀이다. 선지원 교수는 “자율규제 모델을 정해놓고 그 안에 모든 문제를 집어넣겠다는 식은 톱다운(top-down) 규제의 경직성과 문제점을 그대로 가지고 오는 것”이라고 했다.
게다가 공정위와 방통위는 지난 정부에서 각각 플랫폼 규제 법안을 준비하던 차였다. 정부는 바뀌었지만 국·과장 같은 담당 공무원 손에는 세부 규제책이 고스란히 들려 있다는 의미다. 자율기구 1분과(갑을) 참여 위원인 김현경 서울과기대 융합미디어콘텐츠정책전공 교수는 “기존 법으로 하려던 규제를 자율규약에 구겨 넣을 수는 없는데, 그것을 기대하는 분들도 있는 것 같다”고 지적했다.

③“정부의 ‘면피’ 수단 아니길”

법에는 이름이 있다. ‘타다금지법’(여객자동차운수사업법 개정안)은 김현미(당시 국토교통부 장관)법, 박홍근(대표발의자)법이며 문재인 정부의 법이다. 규제를 만든 이에게는 결과가 책임으로 따라온다는 얘기다.
현 정부는 ‘규제의 효과’를 ‘자율의 방식’으로 얻으려 한다. 지난 22일 한기정 공정위원장은 취임 후 첫 행보로 배달의민족·쿠팡이츠·요기요 대표들과 자영업자를 만나 “자율 규제는 플랫폼의 혁신을 유지하면서도 상충하는 이해관계를 조정할 수 있는 효과적 방안”이라며 “민간 자율기구에 적극 참여해 달라”고 말했다.
그러나 이는 자칫 정부의 책임회피가 될 수도 있다. 계인국 교수는 토론회에서 “특정의 공익 목표를 위해 국가가 기업에게 자율 규제를 요청하는 상황”이라며 “자율 규제가 잘못될 경우 국가가 책임을 지지 않는 것은 모순”이라고 말했다.

22일 코엑스에서 열린 디지털경제포럼에서 최성진 코리아스타트업포럼 대표, 김범석 기획재정부 정책조정국장, 이현재 우아한형제들 CR실 이사가 토론하고 있다.

22일 코엑스에서 열린 디지털경제포럼에서 최성진 코리아스타트업포럼 대표, 김범석 기획재정부 정책조정국장, 이현재 우아한형제들 CR실 이사가 토론하고 있다.

한국 사회에서 “사회적 합의로 자율 규제하는 모델이 성공해야 한다”(22일 포럼, 김범석 기재부 정책조정국장)는 주장에 반대할 사람은 많지 않다. ‘규제 공백’과 ‘과잉 규제’ 사이에서 헤매는 데 기업도 소비자도 지쳤다. 이제 정부는 자율 규제에 대한 열의를 강조하는 것 보다도, 차분하게 일이 되게 하는 데 집중할 필요가 있다. 자율로 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부터 구분하는 게 그 시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