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초연 때랑 가장 큰 차이요? 열광적으로 바뀐 한국 관객들 반응이죠.”
지난 7월 5번째 시즌을 개막한 뮤지컬 ‘킹키부츠’ 한국판 공연을 보기 위해 내한한 원작 프로듀서 할 러프틱(65)은 한층 뜨거워진 뮤지컬 문화에 놀란 눈치였다. 2014년 막을 올린 한국 초연을 이듬해 1월에 본 후 7년 만의 내한이다.
23일 서울 용산구 한 스튜디오에서 만난 그는 “초연 땐 커튼콜 전까지 관객들이 너무 얌전해서 공연이 망한 줄 착각했는데 어제 공연은 시작부터 열광적이더라. 관객들이 ‘킹키부츠’에 더 익숙해졌다고 느꼈다”면서 “한국 배우‧스태프들도 뛰어났다. 공연을 수없이 봤는데도 여러 번 눈물이 날 만큼 감동적이었다”고 했다.
그는 미국 브로드웨이 안팎에서 35년 간 뮤지컬 ‘금발이 너무해’, 연극 ‘앤젤스 인 아메리카’ 등 히트작을 내온 베테랑 제작자다.
‘킹키부츠’는 2013년 브로드웨이 초연 후 영국‧일본‧캐나다 등 세계 18개국에서 흥행한 대표작이다. 영국 노샘프턴의 망해가던 신사화 공장이 드랙퀸(여장 남자)을 위한 하이힐 부츠를 개발하며 기사회생한다는 내용. 1979년 실화를 토대로 한 동명 영국 영화(2005)가 스테디셀러 뮤지컬로 새로운 생명력을 얻었다. 이 뮤지컬 음악을 맡은 팝스타 신디 로퍼가 수상한 토니상 최우수 음악상, 그래미상을 비롯해 토니상 6관왕, 올리비에상 3관왕 등을 차지했다.
시즌5 맞은 뮤지컬 '킹키부츠' 한국판 #브로드웨이 프로듀서 할 러프틱 내한 #"2014년 초연 때보다 관객 더 열광적 #K콘텐트 브로드웨이 뮤지컬 가능성 있죠"
80㎝ 힐로 세상 편견 찍어누른 드랙퀸 뮤지컬
한국에선 CJ ENM이 첫 글로벌 뮤지컬 공동 제작에 참여하며 2014년 전세계 최초 라이선스 공연을 선보였다. 코로나 시기 진행한 시즌4(2020)까지 지금껏 관람한 누적 관객 수가 35만명. 다음 달 23일까지 충무아트센터에서 공연하는 시즌5도 연일 만석이다.
가업인 구두 공장을 되살리기 위해 전통을 뒤집는 초보 사장 ‘찰리’와 80㎝ 굽으로 세상의 편견을 찍어 누르는 드랙퀸 ‘롤라’. 두 주인공이 보수적인 공장 직원들과 빚어내는 변화의 춤 사위에 반한 회전문 관객이 늘고 있기 때문이다.
“날 받아줘요. 이 모습 그대로”라고 노래하는 롤라의 넘버 ‘홀드 미 인 유어 하트(Hold Me in Your Heart)’, “힘들 때 곁에 있을게”란 가사의 앙상블 엔딩곡 ‘레이즈 유 업(Raise You Up)’ 등 지칠 때 위로받았다는 관람평이 많다.
할 러프틱 프로듀서는 “우리 사회가 갈수록 증오‧갈등이 늘어나고 관용‧인내심이 줄어드는데, 한국판 ‘킹키부츠’가 재미와 진지한 주제의 균형을 잘 잡은 것 같다”면서 “‘킹키부츠’는 결국 아버지의 기대를 저버리는 아들들의 이야기다. ‘나 자신과 모든 사람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인정하자. 내 생각을 바꾸면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포용이 주요 메시지”라고 강조했다.
- -2012년 시카고 시범공연 땐 모든 게 낯선 도전이었다. ‘킹키부츠’란 제목부터 난관이 많았다고.
“원작이 영국 영화인데 영국에서 ‘킹키(Kinky)’는 ‘이상한(Odd)’ 정도의 의미지만 미국에선 좀 더 변태스러운 뉘앙스가 많다. ‘킹키부츠’란 제목으론 다들 티켓도 못 팔 거라고 했다.(웃음) 힐을 신고 공장 컨베이어벨트 위에서 춤출 남자 배우를 찾는 것도 힘들었다. 1차 오디션 통과자들에게 테스트용 힐을 신겨 3주간 워크숍 후 캐스팅을 확정했다. 한국에서도 지금은 한국 디자이너들이 의상 부츠를 직접 만들지만, 초연 때만 해도 남자가 신고 뛸만한 하이힐을 만들 구두 디자이너가 없어서, 미국에서 본을 떠와서 제작한 게 떠오른다.”
- -‘킹키부츠’를 하며 가장 보람 있던 순간은.
“CJ ENM이 2012년 글로벌 공동 제작을 제안했을 때다. 미국 관객을 염두에 두고 만들었는데 한국에서도 잘될 것 같다고 해서 기뻤다. 그만큼 보편적 시각에서 소구력이 있다는 의미였다. 뉴욕에서도 공연을 올릴수록 롤라처럼 다양한 복장을 하고 온 관객들이 늘었다. 과거엔 그렇게 입고 오면 이상한 사람처럼 쳐다봤는데 이제 관객들이 서로 칭찬도 한다. 입고 싶은 옷을 입고 서로 편안하게 느낄 수 있도록 포용하는 문화에 기여했다는 게 뿌듯하다.”
그는 지난 10년간 인터넷의 발달로 각국의 뮤지컬 문화가 국경을 넘어 서로 영향을 주고받게 된 것을 가장 큰 변화로 꼽았다.
영화 ‘기생충’, 드라마 ‘오징어 게임’의 성공을 “축하한다”면서, 자막의 장벽을 넘어 급부상한 K콘텐트가 뮤지컬로 제작될 가능성도 높게 봤다. “‘기생충’을 보러 영화관에 갔을 때 처음엔 이국적이어서 적응하는 데 시간이 걸렸지만 한 가족이 같이 먹고 살기 위해 한 행동이 점점 수렁에 빠져드는 걸 보며 특이하면서도 공감할 만한 보편적 주제라 느꼈다. 만든 사람이 천재적이었다”는 그는 “K콘텐트도 잘 만든 이야기 기반이 있다면 얼마든지 브로드웨이 뮤지컬로 만들어질 수 있다”고 했다. 뮤지컬화 가능성을 가늠하는 잣대로도 그는 공감대를 첫손에 꼽았다.
“결국 얼마나 공감할 만한가가 관건이죠. 또 하나, 주인공이 뭔가 배우든, 주변이 깨닫게 만들든 캐릭터 변화 과정이 명확한 것도 중요해요. 제작을 결정하기 전에 늘 ‘이 작품을 내가 보고 싶은가. 가족을 데려가서 보고 싶은가’라고 자문해요. 이 부분에 자신 없으면 과감하게 내려놓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