꼬리에 꼬리 문다...황소 3마리만큼 일한뒤 먹던 '사상 최고맛' [e슐랭 토크]

중앙일보

입력 2022.09.24 05:00

업데이트 2022.09.24 09: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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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산업발전과 함께한 돼지꼬리 구이 
지난 15일 오후 5시 부산 사상구 모라초등학교 인근 한 돼지꼬리 구이집. 아직 퇴근 시간 전인데도 식당은 시끌벅적했다. 식당 밖 탁자에도 손님 10여명이 고기를 구우며 술잔을 주고받았다. 한 시간도 되지 않아 20여명이 앉을 수 있는 식당 안 탁자도 모두 꽉 들어찼고, 고기를 굽는 냄새와 흰 연기가 주변 거리로 퍼져나갔다.

손님 김모(68)씨는 젓가락으로 굽던 꼬리 고기 한 점을 들어 올리며 “이기(이 고기가) 우리 사상에서만 묵을(먹을) 수 있는 꼬리 고기아니가”라며 “70~80년대 돈 없고 배고프던 시절에 그래도 이거 한 점에 소주 한잔 묵으면 하루 동안 쌓였던 고단함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아니가”라고 말했다.

지난 15일 부산 사상구 모라동의 한 돼지꼬리 구이집 모습. 위성욱 기자

지난 15일 부산 사상구 모라동의 한 돼지꼬리 구이집 모습. 위성욱 기자

부산 사상구는 1960년대 말까지만 해도 낙동강을 끼고 있는 부산 변두리 갯마을이었다. 밀물과 썰물이 교차하는 기수역(汽水域)에 있어 엄궁·감전·삼락 재첩이 유명했다. 60~70년대 새벽이면 밤새 끓인 재첩을 양철 양동이에 이고 버스를 타고 부산 전역을 돌아다니며 “재첩국 사이소~”를 외쳤던 ‘부산의 3대 아지매(자갈치·재첩국·깡깡이)’ 중 재첩국 아지매(아줌마)가 있던 곳이기도 하다.

사상구 위치도. 위성욱 기자

사상구 위치도. 위성욱 기자

그러나 70년대 중반까지 사상공업지역이 형성되면서 사상구는 부산은 물론 한국경제 활성화의 한 축이 되는 대표 공업지역으로 도약했다. 특히 부산 최대 수출 산업 가운데 하나인 신발과 모직 산업 중심지가 됐다. 지금 50대 전후 세대에 명품으로 통하던  ‘프로스펙스’ 운동화를 생산하던 국제상사, ‘르까프와 프로월드컵’을 만든 화승, ‘골덴바지(corded velveteen)’를 생산하던 모라직물 등도 이곳에 있었다. 1981년 기준 사상 공업지역에는 1532개의 공장, 11만2900여명의 근로자가 일했다.

이처럼 사상에 큰 공장이 잇따라 들어서자 영·호남을 비롯해 전국에서 일거리를 찾아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그렇게 도시는 발달했으나 돈도 먹거리도 풍족하지 않던 시절이었다. 그렇게 국제상사와 모라직물 등 큰 공장이 있던 주변에는 ‘가성비’가 뛰어난 ‘돼지꼬리’ 구이집이 하나둘 생겨났다. 황경희 사상생활사박물관 학예사는 “사상공업지역이 발달하면서 당시 국제상사에 종업원만 1만명이 넘을 정도로 많은 사람이 사상으로 몰려왔다”며 “자연히 국제상사 등 큰 공장 주변에 음식점들도 생겨났는데 그중 인기를 끌었던 곳 중의 하나가 바로 꼬리 구이집이었다”고 말했다.

돼지꼬리 부분 연탄불에 구워 먹어 

사상공업지역 모습. 위성욱 기자

사상공업지역 모습. 위성욱 기자

국제상사에서 일하던 근로자들 모습. 위성욱 기자

국제상사에서 일하던 근로자들 모습. 위성욱 기자

돼지꼬리 구이는 말 그대로 돼지의 꼬리 부분을 삼겹살처럼 연탄불에 구워 먹는 음식이다. 세척한 꼬리 등을 각종 한약재와 함께 물에 넣고 삶은 뒤 적당한 크기로 썰어 연탄불에 다시 구워 먹는 방식이다. 직접 먹어보니 꼬리 부분이 콜라겐으로 둘러싸여 있어 식감이 쫄깃쫄깃했다. 특히 수육처럼 한 차례 삶은 뒤 다시 연탄불에 구워 입 안에 넣으면 ‘겉바속촉(겉은 바싹하고 속은 촉촉한 느낌)’이라는 말이 떠올랐다.

25년간 모라초등학교에서 돼지꼬리 구이집을 하고 있는 강정호(79) 씨는 “여기서는 모라직물 땅을 안 밟으면 돌아다닐 수 없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공장이 컸고, 협력업체도 많아 퇴근하고 나면 동료들과 함께 간단하게 소주 한 잔에 고기를 먹을 수 있다 보니 우리 집에 많은 사람이 찾아왔다”며 “나도 이곳에서 장사를 해 자식들 장가보내고 돈도 많이 벌었다”고 말했다.

돼지꼬리 구이는 현재 3~4명이 먹을 수 있는 한 접시에 1만4000원이다. 옆 자리에서돼지꼬리 구이를 먹던 최모(62)씨는 “(70~80년대에는)돼지꼬리 구이 한 접시에 500원 했다”며 “이 집도 초창기에는 한 접시에 6000원 했는데 지금은 2배 이상 올랐다”고 말했다.

월급 고향에 보내야 했던 여성 근로자, 돈 없어 자주 못 먹어 
요즘 물가를 고려하면 싼 가격이다. 하지만 당시 농·어촌에서 올라와 주·야간 맞교대를 하며 번 돈으로 생활하고 남은 돈을 고향 집에 보냈던 여성근로자에게는 돼지꼬리 구이도 자주 먹을 수 없는 음식이었다. 때문에 돼지꼬리 구이집은 주로 남성 근로자가 이용했다고 한다.

모라동 한 돼지구이집 모습. 위성욱 기자

모라동 한 돼지구이집 모습. 위성욱 기자

조흥래(69) 사상구의회 전 의장은“그 당시만 해도 농어촌에서 일하는 것보다 도시 큰 공장에서 일하면 월급이 더 많으니 남·여 할 것 없이 10~20대 젊은이가 이곳에 몰렸다”며 “보통 주·야간 맞교대로 하루 12시간 이상 일하다 보니 ‘황소 3마리 만큼 일한다’고 했는데 그렇게 힘을 쓰다 보니 남자는 퇴근 후에 돼지꼬리 구이집을 찾고 여성은 통닭집 등에서 치킨을 사서 영양 보충을 하곤 했다”고 전했다.

조 전 의장은 꼬리 구이집 한쪽에 가득 쌓여 있는 연탄을 가리키며 슬픈 이야기도 들려줬다. 당시 많은 사람이 사상으로 한꺼번에 몰려오다 보니 주거지가 부족했다. 그러다 보니 정식 온돌방이 아니라 양계장 등을 개조해 슬레이트로 바닥을 깔아 생활하는 근로자들도 적지 않았다. 당시 연탄이 주요 난방용 에너지원이었는데 겨울에 슬레이트가 깨진 틈 사이로 연탄가스가 새어 나와 밤새 사고를 당하는 사람이 적지 않았다는 것이다.

신발산업 쇠퇴뒤 돼지꼬리 음식점도 줄어 

사상구 시대별 생산제품. 신라고무(1947~60년대 말)가 생산한 왕표 고무신에 이어 국제상사와 화승이 생산한 프로스펙스와 르까프 등이 당시 인기를 끌었다. 위성욱 기자

사상구 시대별 생산제품. 신라고무(1947~60년대 말)가 생산한 왕표 고무신에 이어 국제상사와 화승이 생산한 프로스펙스와 르까프 등이 당시 인기를 끌었다. 위성욱 기자

국제상사가 생산한 프로스펙스 운동화. 위성욱 기자

국제상사가 생산한 프로스펙스 운동화. 위성욱 기자

사상 공업지역은 1990년대 이후 신발산업 등이 쇠퇴하면서 점차 활기를 잃어갔다. 자연스럽게 공업지구 주변에서 성업을 이뤘던 돼지꼬리 구이집도 하나둘 문을 닫았다. 당시만 해도 국제상사 인근 골목길 등을 중심으로 돼지꼬리 구이집이 곳곳에 있어 삼삼오오 모여 소주 한잔에 고기 한 점을 먹으며 잠시나마 노동의 고단함을 잊는 근로자들이 많았다.

하지만 지금은 손가락으로 헤아릴 정도의 돼지꼬리 구이집만 남아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최차영 사상구의회 사무국장은 “9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국제상사 인근 골목길 꼬리구이집 앞에서는 오후 3~4시만 돼도 고기구이용 연탄불을 피우느라 연기가 자욱했다”며 “그때만 해도 이 골목에만 5~6개의 꼬리구이집이 있었는데 지금은 거의 없어지고 모라동 등 사상구 몇몇 지역에 한두 개씩 남아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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