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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터 프리즘] 성희롱보다 녹음·공개가 문제?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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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6호 30면

김창우 사회·디지털 에디터

김창우 사회·디지털 에디터

우리나라의 집권세력은 젊은이들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전혀 모르는 것 같다. 아니 알려고 하는 최소한의 노력도 포기한 것 같다.

윤상현 국민의힘 의원은 지난달 18일 대화 참여자 전원의 동의 없이 녹음하는 것을 금지하는 내용의 통신비밀보호법 개정안을 대표발의했다. 위반할 경우 최대 징역 10년형에 처할 수 있다. 윤 의원을 비롯해 공동발의한 여당 의원 11명은 “현행법은 음성권 침해 소지가 있다”고 설명했다. 생각해 볼 만한 대목이 없지 않다. 독일은 사전에 녹음하는 이유까지 명확히 설명하지 않으면 형사 처벌을 받는다. 프랑스는 녹음 파일을 소지하고만 있어도 처벌할 수 있다. 반면 이탈리아는 동의 없이 녹음이 가능하고, 영국·덴마크·핀란드 등은 동의 없이도 녹음이 가능하지만 다른 사람에게 공개하면 법적 책임을 질 수 있다. 미국은 주마다 규정이 다르다. 캘리포니아 등 10여개 주에서는 동의 없이 녹음하면 처벌한다.

상대방의 마음 헤아리지 못하는 여당
젊은이 입 막는 ‘막말 비호법’ 추진 논란

문제는 인권 보호 차원에서 개정안을 내놨다고 믿기 어렵다는 점이다. 지난해 8월 원희룡 전 제주지사가 이준석 전 대표와 녹취록을 공개했고, 지난 대선 과정에서는 김건희 여사가 기자와 3시간 동안 통화한 내용이 드러나면서 파문이 일었다. 최근에는 권성동 전 원내대표가 윤석열 대통령의 ‘내부 총질이나 하던 당 대표’ 문자메시지를 노출해 갈등이 깊어졌다. 이참에 아예 동의 없는 녹음을 불법으로 규정하자는 생각이 들 만도 하다.

하지만 젊은이들은 자신의 입을 틀어 막으려는 기성세대의 또다른 시도로 받아들인다. 한국갤럽에 따르면 지난 6월 말 기준 18~29세 응답자의 52%가 애플 아이폰을 사용한다. 30대 이후부터 삼성 갤럭시의 비중이 높아진다. 반면 최근 중앙일보가 창간 57년을 맞아 한국갤럽에 의뢰해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18~29세 응답자의 80% 이상이 “범죄 증명, 내부 고발 등에 필요하므로 개정안에 반대한다”고 답했다. 통화 녹음이 안 되는 아이폰을 쓰는 젊은이들의 상당수도 녹음을 금지하는 것에는 찬성하지 않는 셈이다.

국회 홈페이지에는 “스토킹이나 언어폭력을 당했을 때 녹음이 있어야 그것을 증거로 고소할 수 있는데, 개정안은 범죄를 저지르는 파렴치한을 보호하는 악법”이라는 글이 올라왔다. 시민운동 단체 오픈넷은 “사회 고발을 크게 위축시키고 진실 증명을 어렵게 만들어 부조리와 거짓된 항변을 조장하는 ‘권력자 막말 비호법’, ‘진실 증명 금지법’으로 기능할 것”이라고 우려했다.

이와 관련 윤 의원은 최근 “개정안 중 부정부패·갑질·성희롱 등 예외 상황에선 녹음 및 공개를 허용하는 등 대안을 마련하겠다”고 밝혔다. 어쨌든 ‘동의없이 녹음하면서 의도된 질문을 통해 원하는 답변을 얻어내 녹취록을 공개하는 건 범죄’라는 신념에는 변화가 없는 듯하다.

통화 녹음을 둘러싼 논란의 뿌리에는 막말과 갑질이 있다. 윤 의원 또래의 기성세대는 사회적으로 강자다. 막말과 갑질을 하지 않는다면 통화 녹음에 알러지 반응을 보일 이유가 없다. 폭언에, 성희롱에, 비아냥까지 해 놓고는(윤 의원이 그랬다는 얘기는 아니다) ‘이걸 공개하는 것은 인권 유린’이라고 소리쳐봐야 반향이 있을 리 없다. 통화 내용을 공개해 부당한 비난을 할 경우 현행 법으로도 충분히 대처할 수 있다. 명예훼손으로 형사 고소할 수 있고, 민사상 손배배상 청구도 가능하다.

통화 녹음이 바람직하냐는 부분에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그래도 굳이 불법으로 규정해 아예 막겠다는 발상에는 찬성하기 어렵다. 특히 상대적으로 약자인 젊은이들의 입을 막는 데 악용될 가능성이 크다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한 30대 직장인은 “상사가 ‘하라는 대로 해’라고 강압적으로 지시할 때 ‘지금부터 녹음할 테니 다시 한 번 말씀해 주시겠습니까’라고 동의를 구하라는 말이냐”고 반문했다. 뭐라고 대답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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