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요커’ 임충섭, 차이나타운에 모르는 중식당 없어

중앙선데이

입력 2022.09.24 00:20

업데이트 2022.09.24 1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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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6호 27면

예술가의 한끼

1982년 그리니치 스트리트 스튜디오에서 촬영한 임충섭. [사진 임영균]

1982년 그리니치 스트리트 스튜디오에서 촬영한 임충섭. [사진 임영균]

임충섭은 충북 진천에서 태어나 자랐다. 생거진천(生居鎭川)의 그 진천이다. 그의 생거는 진천, 서울, 뉴욕 등으로 바뀌었다. 진천은 큰 강이 멀어서 수해가 거의 없다. 농사를 짓기에도 살기에도 그만이다. 백곡저수지에서 나와 진천 읍내를 가로지르며 흐르는 백사천이 소년 임충섭의 놀이터였다. 백사천의 맑은 물에서 건져올린 올갱이(다슬기)로 죽을 끓이거나 미꾸라지로 탕을 끓였다. 옥수수에 보리밥이 주식이었다.

9살 때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10살 때는 한국전쟁이 터졌다. 진천의 잣고개전투는 치열했다. 덕분에 북한군의 남진이 지연되었다. 전쟁이 끝났을 때, 백사천에는 인민군의 탱크가 버려져 있었다. 전쟁을 모르는 송사리 떼들은 무심하게 백사천을 헤엄치고 있었다. 치약과 칫솔이 없을 때다. 양치질하지 않은 시골 아이들의 이는 다 누렜다. 서울에서 진천으로 피난을 온 선생님이 아이들을 백사천으로 데려가 곱고 하얀 모래로 이를 닦게 했다. 녹슨 탱크, 맑은 시냇물, 송사리 떼, 모래로 이 닦기, 이들은 나중에 임충섭 작품의 주제가 되어주었다.

백사천이 남쪽으로 내려가 미호천이 되었다가 합강에서 금강을 만나 서해로 흘러가듯 그의 삶도 본향을 떠나 멀리멀리 흘러갔다. 임충섭은 진천중학교를 마치고 정동길의 이화여고 안에 있던 서울예고에 입학했다. 서울예고에는 김병기(1916-2022) 선생이 있었다. 화가이자 비평가였던 그는 어린 고교생들에게는 그 난해한 다다이즘을 가르쳤다. 막상 연건동에 있던 서울대 미대를 입학하니 다다이즘을 가르쳐 주지 않았다. 연건동 판자촌, 천장에서 빗물이 떨어지는 할머니 집에서 소주를 마시며 친구들과 하이데거, 칸트, 쇼펜하우어로 논쟁을 벌였다.

진천 출신, 옥수수·올갱이 죽 주식

1986년 존배 교수의 집에서 열린 신년회 모습. 왼쪽 끝에는 시게코 구보다, 소파에는 왼쪽부터 백남준, 임충섭, 김구림. 백남준의 뒤에는 김차섭이 서 있다. [사진 임영균]

1986년 존배 교수의 집에서 열린 신년회 모습. 왼쪽 끝에는 시게코 구보다, 소파에는 왼쪽부터 백남준, 임충섭, 김구림. 백남준의 뒤에는 김차섭이 서 있다. [사진 임영균]

배재중고등학교에서 미술교사를 하던 임충섭이 뉴욕으로 간 건 1973년이다. 파리를 다녀온 선배로부터 이제 미술의 중심은 파리가 아니고 뉴욕이다라는 조언을 듣고 방향을 정했다. 뉴욕에는 서울예고 시절의 스승인 김병기가 먼저 와 계셨다. 부두 노동, 화장실 청소, 접시닦이 등 단순 노동을 하면서 생계를 유지했다.

액자를 만드는 일은 생활에 큰 도움이 되었다. 나중에 맨해튼 그리니치 스트리트에 프레임 숍을 열었다. 미국에서 팔려나가는 그림의 70~80%가 종이 위의 페인팅 혹은 종이 위의 드로잉 작품들이다. 종이 위에 그린 그림은 반드시 액자(프레임)에 넣어서 벽에 걸어야 한다. 그만큼 미국에서는 액자의 수요가 많다. 프레임 숍은 잘 되었다. 뉴욕에서 활동하는 세계적인 작가들이 임충섭의 실력에 대해 소문을 듣고 프레임 숍을 찾았다. 전문적인 작가가 만드는 프레임은 그 어떤 장인이 만든 것보다 고급스러웠고 마감이 확실했다.

임충섭은 프레임 숍 근처에 자신의 작업실을 마련했다. 임충섭이 주로 하는 평면적인 오브제, 아상블라주 작업에는 접착제 처리를 많이 해야만 한다. 동갑내기이나 서울대 미대 회화과 1년 선배인 곽훈(1941~ )이 와서 보고는 걱정이 되었다. 작업에 들어가는 접착제(바인더)는 건강에 치명적이다. 환기가 잘 안 되는 작업실에서 하는 작업은 더욱 그렇다. 작업실을 옮길 것을 제안했다.

1975년에 미국으로 건너가자마자 클리블랜드의 광고회사에서 일하던 곽훈은 일 년에 두 번 봄, 가을로 뉴욕으로 휴가를 와서 서울미대 동기인 김차섭(1940~2022)과 임충섭을 만났다. 곽훈은 나중에 뉴욕으로 옮겨 4~5년을 살았다. 이때는 임충섭도 생활이 안정되어 있었다. 맨해튼에 작업실을 가진 한국인은 많지가 않았다. 백남준, 김웅, 곽훈, 임충섭 정도였다. 곽훈과 임충섭은 소호 남쪽의 차이나타운을 자주 찾았다. 게 볶음으로 유명한 홉키(合記) 등 한국인들도 좋아할 중국집이 많았다. 임충섭은 차이나타운의 전문가였다. 모르는 식당이 없을 정도였다. 뭘 시켜야 할지 메뉴를 잘 골랐다. 침묵의 임충섭은 술을 마시고 술과 인연이 먼 곽훈은 다변으로 술을 대신했다.

임충섭은 겸허했다. 주변에서 화랑을 추천하여 작품을 내놓으라고 하면 작품이 없다고 사양했다. 작품이 없다기보다는 자신의 성에 차는 작품이 없었다. 작품 제작에 대한 윤리의식이 여느 화가들보다 강했다. 그래서 임충섭에게는 똑같은 작품이 2개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하나하나의 작품마다 일기일회(一期一會)의 인연이 있다고 믿기에 최선을 다한다.

Untitled - 角(각), 캔버스에 아크릴, 플라스틱 그리드, 멀버리종이 39x32.5x4.5(d)cm, 2018년 [사진 갤러리 현대]

Untitled - 角(각), 캔버스에 아크릴, 플라스틱 그리드, 멀버리종이 39x32.5x4.5(d)cm, 2018년 [사진 갤러리 현대]

“본인이 직접 캔버스 틀을 만들고 천을 씌우고 액자를 만들어 액자까지가 작업의 완성이라고 한다. 임충섭 작가의 주된 작업인 변형캔버스도 손수 만들어 작업한다. 작은 작업부터 2m가 넘는 큰 작업까지 나무를 자르고 이어가며 다양한 재료들, 거리를 다니며 발견한 물건들을 모아 발견된 사물(Found Object) 작업을 하기도 한다. 매일 허드슨 강변을 걸으며 생각도 하고 눈에 보이는 물건들을 수집한다. 어느 날은 강변에서 주운 돌에 드릴로 구멍을 뚫어 벽에 걸어놓기도 한다. 그렇게 만든 작품 중에 ‘떠버리 와와’(Talkative Wa-wa)라고 있는데, 와와는 미국 인디언 말로 기러기라고 한다.”(서울미대 후배 조정란의 글, 2022년)

비록 자그마한 돌이기는 하나, 그 안에 지구의 역사를 수천 년 이상 담은 침묵의 돌을 드릴 구멍 하나로 깨워내어 ‘떠버리’라고 이름 붙여 말문이 터지게 하는 예술가 임충섭이다. 임충섭의 작업은 물성이 강하다. 그 물성은 조형적 효과로서의 물성이라기보다는 존재의 본질과 깊이로 이끄는 물성이다.

1980년 퀸즈 미술관의 연례공모전에 발탁된 임충섭은 포스트 미니멀리즘의 주창자인 로버트 핀커스-위튼(Robert Pincus-Witten)의 주목을 받는다. 1981년에는 유명화랑인 OK 해리스에서 개인전을 가졌다. 막 유학을 간 사진가 임영균이 그 전시를 보고 감동하였다. 이듬해 작업실로 찾아가 임충섭의 인물사진을 찍었다. 촬영을 마치고 나니 이미 해가 졌다. 둘은 그리니치 스트리트의 술집으로 가서 닭 다리 튀김에 생맥주를 마셨다. 아르바이트하느라 작품사진은 못 찍고 생각뿐이라고 고민하는 후배에게 생각 자체도 작품이니 너무 괘념치 말라고 용기를 주었다. 이후 임충섭은 국제갤러리, 갤러리현대, 페이스갤러리에서 전시를 가졌다.

허드슨 강 산책하며 재료 수집

임충섭은 진천과 뉴욕을 대비시킨다. 진천이 자연이라면 뉴욕은 인공이자 문명이다. 자신은 자연과 문명, 그사이에 놓인 존재다. 작품의 주제도 ‘사잇’(Between)이라 했다. 자연은 균질하지 않고 울퉁불퉁하다. 서양의 거친 자연은 평평함을 찾으려는 서양인의 세계와 대치한다. 한반도의 부드러운 자연은 정신의 균질공간 대신 몸 마음의 수신을 택한 한국인과 잘 화합한다. 그 자연은 진천의 백사천처럼 넉넉하고 푸근하다. 진천사람 임충섭은 자연과 문명, 이 둘을 이어주는 몸과 정신의 역할을 자임했다.

임충섭의 삶은 단순하다. 오직 그림과 사색과 산책이 그를 위로해준다. 매일 그리니치 스트리트를 품은 트라이베카의 허드슨 강변을 산책하며 눈에 띄는 오브제를 수집한다. 가끔 한국식당에 가서 삼겹살에 소주를 마신다. 집에서는 손수 요리한다. 라면에 된장, 파, 호박, 무, 올리브 등을 넣으면 멋진 창작 국수가 완성된다.

“이 지구 위엔 수많은 미술학교가 있습니다. 요(要)는 미술은 자기 자신이 미술작품의 선생님입니다. 온 세계의 현대미술은 불교와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그리고 조형성으로 볼 때 현대미술은 동양의 서예 정신과 밀접합니다. 미술 작업을 한다는 그 자체가 요가와 비슷해서 생각과 움직임의 순환으로 보입니다. 나는 ‘코로나 19’ 동안 노인이라 작업실에 있게 되면서 현대미술과 동양의 ‘서예 정신’을 본받아 드로잉 200여 점을 완성하였습니다. 다시 반복합니다. 미술은 자신이 미술학교의 선생님입니다.”(임충섭의 글, 2022년)

황인 미술평론가. 미술평론가로 활동하고 있으며 전시기획과 공학과 미술을 융합하는 학제 간 연구를 병행하고 있다. 1980년대 후반 현대화랑에서 일하면서 지금은 거의 작고한 대표적 화가들을 많이 만났다. 문학·무용·음악 등 다른 장르의 문화인들과도 교유를 확장해 나갔다. 골목기행과 홍대 앞 게릴라 문화를 즐기며 가성비가 높은 중저가 음식을 좋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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