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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00원 치킨·4000원 햄버거, 불황이 부른 ‘반값’ 열풍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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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6호 02면

유통시장 값싼 먹거리 바람

최근 고물가 상황이 이어지면서 소비자들이 시중가의 절반도 안 되는 한 마리 5000원짜리 치킨을 사기 위해 줄을 서 있다. [뉴스1]

최근 고물가 상황이 이어지면서 소비자들이 시중가의 절반도 안 되는 한 마리 5000원짜리 치킨을 사기 위해 줄을 서 있다. [뉴스1]

“판매 끝났습니다.”

수도권의 한 홈플러스 직원 김희진(가명·53)씨는 20일 오후 ‘품절’이 적힌 안내판을 갖고 나오며 “오늘은 당당치킨을 30개 정도 만들어 놨는데 10분만에 다 팔렸다”며 “보통 평일보다는 주말에 판매 속도가 더 빠른 편인데, 오늘은 주말과 비슷하게 나갔다”고 말했다. 인근의 또 다른 대형마트인 이마트 델리(즉석조리식품)코너의 한 직원은 “확실히 (반값) 치킨이 인기가 많았다”며 “번호표를 나눠줬는데도 10분 전부터 줄을 서서 받아갈 정도”라고 말했다.

런치플레이션에 고객들 북적

유통시장에 ‘반값’ 열풍이 거세게 불고 있다. 가파른 인플레이션(물가 상승) 속에 소비자들이 조금이라도 비용을 아끼기 위해 가격 대비 품질이 괜찮은 이른바 ‘가성비’ 좋은 제품을 찾아 나서면서 대형마트를 중심으로 한 ‘반값’ 시리즈가 인기를 끌고 있다. 한 대형마트의 ‘반값 치킨’을 구매한 최석호(28)씨는 “근처에 왔다가 가성비가 좋다길래 한 번 사볼까 해서 구매했다”고 말했다. 또 다른 구매자 박상용(가명·34)씨는 “몇 번을 사서 먹어봤는데 맛도 나쁘지 않고 이 정도면 괜찮은 것 같다”며 “장 보러 마트에 들른 김에 사갖고 가니 번거롭지 않다”고 말했다.

소비자들이 가성비 상품을 찾는 건 무섭게 오르는 물가 영향이다. 지난달 소비자물가상승률은 5.7%(이하 지난해 동월 대비)로 전달(6.3%)보다 상승폭이 둔화했지만, 먹거리 물가상승률은 여전히 가파르다. 식료품·음료·음식서비스 물가인 ‘먹거리 물가상승률’은 지난달 8.4%로 전달보다 오히려 상승폭이 0.2%포인트 커졌다. 먹거리 물가 품목 중 외식 물가가 많이 올랐다. 지난달 기준 김치찌개는 8.3% 오른 7500원에 팔렸고, 김밥 한 줄은 11.5% 오른 3046원이다. 자장면 한 그릇도 지난해보다 15.3% 오른 6300원이다.

그래픽=김이랑 kim.yirang@joins.com

그래픽=김이랑 kim.yirang@joins.com

이렇다 보니 대형마트를 중심으로 한 반값 상품에 소비자가 몰린다. 6월 말부터 판매를 시작한 홈플러스 ‘당당치킨’은 두 달간 32만 마리가 넘게 팔렸다. 1분마다 5마리씩 팔린 셈이다. 이 치킨은 일반 치킨 프랜차이즈의 대표 상품인 후라이드 치킨 대비 절반도 안 되는 7000원이었다. 5980원인 이마트의 ‘5분치킨’은 6만 마리를 준비했는데, 일주일 만에 다 팔렸다. 롯데마트의 ‘7분 한마리 치킨’도 일주일간 3만5000마리가 팔렸다. 지난달 롯데마트의 치킨류 매출은 전달보다 13배 증가했다. 이은희 인하대 소비자학과 교수는 “맛으로만 보면 프랜차이즈가 더 나을 수 있지만, 고물가 상황에서는 품질 차이보다 가격 차이가 더 크다고 판단하는 게 일반적이기 때문에 반값 치킨에 대한 수요가 많은 것”이라고 말했다.

사실 이 같은 반값 상품은 ‘고객 끌어오기’ 차원에서 내놓은 일시적인 기획 상품이다. 그러나 최근 기대 이상의 성과에 유통업계의 ‘주요 상품’으로 자리를 잡아가는 모양새다. 롯데마트는 최근의 반값 열풍을 이어가기 위해 중식 요리인 탕수육을 시중 판매가의 반값(한통가득 탕수육)에 선보였다. 이 상품은 지난주 출시 일주일 만에 3만6000팩이 팔렸다. 업계 관계자는 “런치플레이션(점심값 인상)으로 고객들이 매장에 많이 찾아오면서 (반값 열풍이) 더 거세지고 있다”고 전했다. 이 때문에 편의점도 반값 열풍에 뛰어들고 있다. CU는 4월 2900원짜리 도시락을 판매한 데 이어 최근에는 시중가보다 저렴한 햄버거를 출시했다. 앞서 GS25는 가공된 패티가 아닌 직접 구워 만든 패티를 사용한 햄버거를 4000원에 출시했다. 이 상품은 15일 출시 후 4일 만에 GS리테일 햄버거 상품 중 매출 1위를 기록했다.

대형마트·편의점이 일시적 판매가 아닌 주요 상품으로 반값 상품을 판매할 수 있는 건  유통 단가를 확 낮출 수 있기 때문이다. 반값 치킨은 원재료를 대량 구매해 상품 원가를 낮췄기에 가능했다. 홈플러스 관계자는 “8호닭(800g)을 사용하는데 한 번에 수십만 마리를 계약하니 당연히 단가가 낮아지는 부분이 있다”고 말했다. 여기에 식용유·치킨파우더 등 부재료도 대량 구매해 단가를 낮췄다. 이마트 관계자는 “상품 판매 전부터 철저히 준비해 원가를 낮추고 있다”며 “예컨대 9월 30일에 반값 치킨 10만 마리 판매를 계획하면 닭을 키우는 시점(약 한 달 전)에 미리 계약을 하는 식”이라고 말했다.

마트 한편에서 직접 조리를 하기 때문에 매장 임대·광고료 등도 따로 들지 않는다. 홈플러스는 원재료를 각 점포로 가져와 정한 시간대에 맞춰 한정 수량만 조리한다. GS리테일 관계자는 “반값 버거는 원료육을 들여와 직접 패티를 구워 단가를 줄였다”라고 말했다. 대형마트나 편의점은 이 외에 특정 시간대에 한정 수량만큼만 선착순으로 판매해 폐기비용을 줄이거나, 그동안 발굴해 온 직소싱(중간 도매업체를 거치지 않고 제조사와 유통업체가 바로 거래하는 방법) 채널을 이용해 효율성을 높여 생산원가를 절감하고 있다.

인플레이션이 이어지고 있어 당분간 ‘반값’ 열풍은 계속될 전망이다. 김민정 숙명여대 소비자경제학과 교수는 “물가가 상승하면서 제품 자체 가격도 올랐지만 배달료 등도 많이 올랐기 때문에 맛이 다소 떨어진다고 해도 가격이 저렴하면 당분간 수요가 몰릴 수 있다”고 내다봤다. 이에 맞춰 업체들도 상품 다양화에 주력하고 있다. 홈플러스는 점심을 사러 오는 직장인 대상으로 3000원대 샐러드와 ‘당당 달콤양념치킨’, ‘당당 콘소메치킨’, ‘당당 매콤새우치킨’ 등의 다양한 품목을 선보이고 있다. 이마트는 지난달 소시지피자를 5980원에 선보였고, 롯데마트는 시중 비빔밥 평균가의 반값 수준인 3000원대 ‘도시락 3종’을 최근 출시했다. 이 상품은 출시 5일 만에 1만5000개 이상 팔리는 등 벌써부터 인기다.

자영업자·프랜차이즈 가맹점은 한숨

서울의 한 대형마트는 최근 시중가의 절반 수준인 7000원대 탕수육을 선보여 인기를 끌고 있다. [사진 롯데마트]

서울의 한 대형마트는 최근 시중가의 절반 수준인 7000원대 탕수육을 선보여 인기를 끌고 있다. [사진 롯데마트]

GS리테일 관계자는 “지난달 기준 도시락, 김밥, 햄버거 같은 신선식품 중심으로 매출이 30% 이상 증가해 다양한 신선식품을 선보일 계획”이라고 말했다. 이은희 교수는 “조리식품이나 반찬류 등 직접 조리해서 판매가 가능한 대형마트의 강점이 더해지면서 반값 상품이 주요 상품으로 자리를 잡고 있다”며 “서민에게는 좀 더 싸면서도 일정 수준 이상의 품질을 갖춘 제품 공급이 가능하다는 점에서 긍정적”이라고 말했다.

다만, 반짝 인기에 그쳤던 반값 상품이 인플레이션을 등에 업고 장기화할 추세를 보이자 자영업자들은 한숨이 깊어지고 있다. 가뜩이나 물가 상승으로 매출 올리기가 이전보다 어려워졌기 때문이다. 소비자의 폭리 인식도 부담이다. 프랜차이즈 업계의 한 관계자는 “가게 임대료, 배달 수수료, 전기료까지 지불하는 프랜차이즈 가맹점과는 달리 대형마트나 편의점 단가는 다를 수밖에 없다”고 토로했다. 또 다른 외식업체 관계자는 “고물가 속에 소비자가 가장 큰 고통을 받고 있기 때문에 문제 제기는 안 하고 있다”면서도 “대형마트나 편의점은 관련법상 외식업이 아닌 유통업인 만큼 반값 상품을 이어가는 건 문제”라고 지적했다.

12년 전 ‘통큰치킨’ 반짝 인기, 골목상권 침해 논란도

‘반값 치킨’이 등장한 건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지금처럼 물가가 오를 때마다 대형마트를 중심으로 유통업체들은 치킨과 같은 먹거리는 물론 공산품 등을 ‘반값’에 팔아 인기를 끌었다. 2010년께 구제역 파동과 리비아 내전으로 물가가 치솟자 롯데마트는 5000원짜리 ‘통큰치킨’을 선보이기도 했다. 치킨마루·부어치킨과 같이 저가 프랜차이즈 치킨업체는 당시 치킨값의 반값 수준인 8000원짜리 상품을 판매해 시장에서 반짝 인기를 끌기도 했다. 중식 프랜차이즈인 사천신짬뽕은 재료·국물 등을 본사 공장에서 직접 만드는 시스템으로 가격을 3800~4500원 수준으로 내렸다.

대형마트들은 30만원대 ‘반값 골프채’를 판매하거나 브라질 등지에서 커피 생두를 들여와 반값에 팔기도 했다. 2011년 동일본 대지진 때는 방사능 누출 사고 여파로 일본산 수산물 수입이 중단되면서 가격이 급등하자 ‘반값 수산물’이 등장하기도 했다. 김민정 교수는 “물가가 급등할 때는 특히 서민의 부담이 매우 커지기 때문에 반값 상품이 인기를 끌 수밖에 없다”이라고 진단한다. 치킨·탕수육 등의 체감 물가가 급등하면서 소비자 입장에서 ‘반값’ 상품이 효자라는 얘기다.

물가 상승 여파 속에 등장한 반값 상품은 대체로 인기가 많았지만 ‘장수’ 하지는 못했다. 태생 자체가 ‘손님 끌기용’으로 마진을 확 줄여 내놓은 상품이었고, 일부 저가 프랜차이즈는 기존 판매 상품과 확연한 품질 차이를 보이면서 시장에서 사라지기도 했다. 대형마트의 반값 치킨은 대기업이 골목상권을 침해한다는 비판 여론에 부딪히기도 했다. 유통업계의 한 관계자는 “싸고 품질 좋은 상품을 계속 공급할 수 있으면 좋겠지만 일시적인 기획 상품인 경우가 많다”며 “소비자의 체감 물가를 낮추기 위한 노력을 계속 해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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