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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서소문 포럼

손흥민과 조성진, 그리고 BTS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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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정제원 기자 중앙일보 문화스포츠디렉터
정제원 스포츠디렉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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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 때리는 그녀들’을 보았는가. 여자 연예인들이 축구 경기를 하는 프로그램이다. 참가자들의 승부에 대한 열정이 대단하다. 무엇보다도 ‘축구는 남자들이나 하는 것’이라는 통념을 깨뜨렸다. 축구가 더는 남성의 전유물이 아니란 사실을 여실히 보여줬다.

‘씨름의 여왕’은 또 어떤가. 이 프로그램 역시 여자 연예인·스포츠 스타들이 거침없이 샅바를 부여잡는 모습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방송사는 ‘승부를 위해 모든 것을 건 강한 여자들의 한판 대결을 담은 예능 프로그램’이라고 소개한다. 여성들이 샅바를 잡는 모습을 상상하기 어려웠는데 씨름을 모티브로 한 걸크러시 격투 예능이라니 낯설기도 하고, 반갑기도 하다.

획일적 성 역할 구분 점차 무너져
보스턴 마라톤에 ‘제3의 성’ 출전
BTS 문제로 징병제 논란 뜨거워
‘이대남’의 불만·울분도 헤아려야

지난 5월 미국 워싱턴DC의 백악관에서 열린 행사에 참가한 BTS 멤버들. [AFP=연합뉴스]

지난 5월 미국 워싱턴DC의 백악관에서 열린 행사에 참가한 BTS 멤버들. [AFP=연합뉴스]

사회 곳곳에서 성 역할에 대한 획일적인 구분이 무너지는 추세다. ‘남자는 이래야 한다’라거나 ‘여자는 이래선 안 된다’는 말은 이제 통용되지 않는다. 스포츠계에서도 ‘남자’와 ‘여자’ 만으로 구분하는 건 난센스요, 시대착오적이다. 미국의 보스턴육상연맹은 최근 내년 보스턴 마라톤부터 ‘제3의 성’을 가진 마라토너에게도 출전을 허용한다고 발표했다. 논바이너리(Non-binary·남녀라는 이분법적 성별 구분에서 벗어난 성 정체성을 지닌 사람) 선수의 경우 남자나 여자 부문에 등록하지 않고 ‘제3의 성’으로 경기에 참가할 수 있다고 밝혔다. 남성 또는 여성 등 하나의 성별로 묶어내기엔 모든 사람의 개성이 각기 다른 현실을 인정한 것이다.

세계적인 아이돌 그룹 방탄소년단(BTS)의 병역 문제를 놓고 논쟁이 뜨겁다. BTS 멤버 7명은 물론 전 세계 수백만 명의 아미(army)에게도 이들의 군대 문제는 초미의 관심사다. 그러나 아미의 염원과는 달리 BTS 멤버들은 언젠가는 ‘아미’가 돼야 한다. 현행법을 지키려면 BTS는 오는 12월부터 순차적으로 입대해야 한다.

최근 정치권에서 대중문화 예술인의 대체 복무를 허용하는 병역법 개정안을 발의하면서 BTS의 병역 문제가 다시 한번 ‘뜨거운 감자’로 떠올랐다. 문제의 핵심은 ‘축구 스타 손흥민과 피아니스트 조성진은 되는데 왜 BTS는 안 되냐’는 것이다. 병역법에 따르면 올림픽에서 메달을 따거나 국제음악콩쿠르에서 우승하면 병역 특례를 받을 수 있다.

그러나 BTS 같은 대중문화 스타는 특기자로 인정하지 않는다. 대중 예술인들은 병역 특례를 받을 수 있는 길이 원천적으로 막혀있다. 그래서 BTS처럼 국가의 명예를 드높인 아티스트에게도 병역 특례를 주자는 의견이 설득력을 얻는다. BTS가 입대해서 얻는 이익보다 민간인으로 활동하면서 얻을 수 있는 가치의 크기가 훨씬 더 크다는 주장은 이제 식상할 정도다. 손흥민·조성진과의 형평성만 고려한다면 BTS에도 병역 면제 혜택을 주는 게 마땅하다.

그러나 다른 목소리도 만만찮다. 특히 20대 남성을 일컫는 ‘이대남’들은 연예인에게 병역 면제 혜택을 주는 것에 대해 부정적이다. 손흥민과 조성진에 이어 BTS의 멤버들도 병역 면제를 해주면 ‘도대체 나라는 누가 지키냐’는 볼멘소리다. 체육·예술인의 18개월이 소중한 만큼, 보통 남자의 18개월도 똑같이 중요하다는 울분의 함성이 터져 나온다.

BTS의 입대를 둘러싼 논쟁은 대한민국 남자라면 누구나 수행해야 하는 병역 의무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를 제기한다. 여기에 남녀 갈등의 불씨를 안고 있는 ‘젠더’ 문제가 맞물리면서 휘발력과 폭발성이 점점 커진다. “남녀평등과 성차별 금지를 부르짖으면서 왜 (여자는 안 가는데) 남자만 군대에 가야 하느냐”는 문제 제기다. 이대남의 볼멘 목소리를 옹졸하고, 쪼잔하다고 치부하기엔 그들이 마주해야 하는 현실이 냉혹하고, 엄중하다.

BTS 입대 논쟁을 계기로 대한민국 국방 체계와 징병제에 대한 근본적인 검토가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커진다. 징병제 폐지나 국방 인력 감축은 그동안 입에 담아선 안 될 화두였다. 북한은 여전히 핵 무장 운운하고 있고, 러시아가 일으킨 전쟁은 현재진행형이다. 대만을 무력으로 위협하는 중국의 존재도 심상찮다.

그러나 세상은 빠르게 변하고 있다. 사람들의 생각도, 관습도 바뀐다. 무엇보다도 군대에 가야 할 ‘젊은 남자’들이 급속도로 줄어들었다. 인구 감소 추세가 가파른 데 따른 당연한 결과다. 한국의 전통과 관습에 익숙하지 않은 다문화 가정 출신 장병들은 점점 많아지고 있다. BTS의 병역 특례 문제는 풀기 힘든 또 하나의 고차 방정식을 우리에게 던져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