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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턴 기업 대표는 일용직 됐다…"한국 오지말라" 그의 눈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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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1990년대 말부터 중국 칭다오에서 공기압축기(에어컴프레서)를 제작해온 거성콤프레샤는 2015년 한국행을 결정했다. 중국 정부가 자국 업체를 우대하고, 중국 내 환경 규제가 엄격해지면서다. 회사는 고용인원 한명당 1050만원의 고용보조금과 입지 보조금 40%, 설비투자 보조금 24% 등을 지원받기로 하고 충남의 한 지자체와 ‘유턴기업 지원 양해각서(MOU)’를 체결했다. 하지만 일부 사업 차질로 신규 채용일정이 늦어졌다는 이유로 당초 받기로 했던 보조금 총 16억원 중 14억원을 받지 못했다.

지난 19일 경기도 시흥시의 한 산업단지에서 민덕현 전 거성콤프레샤 사장이 중앙일보 인터뷰에 응하고 있다. 세종시에 사는 그는 왕복 2~3시간이 걸리더라도 일감이 있는 곳을 매일 찾아 다닌다. 그는 “대전지법에 신청한 파산면책만 마무리되면 다시 해외에 나가서 재기하고 싶다”고 말했다. 김민상 기자

지난 19일 경기도 시흥시의 한 산업단지에서 민덕현 전 거성콤프레샤 사장이 중앙일보 인터뷰에 응하고 있다. 세종시에 사는 그는 왕복 2~3시간이 걸리더라도 일감이 있는 곳을 매일 찾아 다닌다. 그는 “대전지법에 신청한 파산면책만 마무리되면 다시 해외에 나가서 재기하고 싶다”고 말했다. 김민상 기자

민덕현(60) 거성콤프레샤 전 대표는 “석 달 안에 40명을 새로 고용해야 보조금을 다 준다는데, 공장을 착공하기도 전에 그 많은 수를 어떻게 채용하겠느냐”라 “보조금이 막히니 자금 압박이 심해졌고, 결국 70억원을 들여 지었던 공장을 경매로 넘겨야 했다”고 씁쓸해했다. 회사를 접은 그는 현재 일용직 노동자로 생계를 유지하고 있다. 그는 “인도네시아나 태국에서 옛 거래처와 함께 재기하는 꿈을 꾸고 있다”며 “해외에서 사업이 힘들다고 한국으로 돌아오려는 기업은 쫓아가서 말리고 싶다”고 말했다.

세계 각국이 리쇼어링(해외 진출 기업의 국내 복귀)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당장 일자리를 늘리는 효과가 있는데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 등으로 글로벌 공급망이 무너지고, 경제안보의 중요성도 커지면서다. 한국도 뒤늦게 적극적인 리쇼어링 정책을 펼치고 있지만 성과는 미미하다.

21일 산업통상자원부 등에 따르면 정부의 리쇼어링 정책이 본격화된 2017년 이후 올해 8월까지 사업장을 국내로 옮긴 ‘유턴기업’은 94곳으로 집계됐다. 이 가운데 고용창출 효과가 큰 대기업은 현대모비스와 LG화학 두 곳뿐이다. LG화학은 올해 유턴기업으로 선정됐는데, 규제를 완화한 해외진출기업복귀법이 적용된 덕분이다.

그래픽=김주원 기자 zoo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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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들어 유턴기업 수가 늘곤 있지만, 해외로 나가는 ‘오프쇼어링’과 비교하면 '새발의 피'다. 2017년 이후 올해 상반기까지 해외에 설립한 한국기업 신규 법인 수는 1만7044개에 달한다. 유턴기업 수의 181배다. 코로나19 여파로 2020년부터는 주춤한 모습을 보이고 있으나, 그래도 매년 2000곳이 넘는 기업이 해외로 나간다.

높은 생산비용과 세금, 과도한 규제, 경직된 노동 환경과 강성 노조 등이 국내 유턴을 가로막는 주요인으로 꼽힌다. '노란봉투법' 등 정치권의 빗발치는 규제 입법 움직임도 국내 투자를 망설이게 만든다는 게 기업들의 목소리다. 까다로운 지원 조건 역시 걸림돌로 꼽힌다. 앞서 언급한 거성콤프레샤처럼 리쇼어링을 하더라도 유턴기업으로 인정받지 못해 보조금을 못 받기도 하고, 수도권 공장 총량제 같은 규제 때문에 원하는 입지를 고르기도 쉽지 않다.

반면 주요 선진국은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부터 파격적인 지원을 통해 성과를 내고 있다. 미국은 버락 오바마 정부 때부터 최고 법인세율을 38%에서 28%로 낮추고 유턴 기업의 공장 이전 비용을 20% 대줬다. 다음 트럼프 정부 때에는 법인세율을 21%대로 더 낮췄고, 주문자상표부착생산(OEM) 물량을 본국으로 돌린 부분도 리쇼어링으로 인정해줬다. 바이든 정부에서도 미국 현지 투자와 생산에 대해 세액공제 혜택을 주는 인플레이션감축법(IRA)ㆍ반도체산업육성법 등을 제정해 노골적인 자국산 우선 정책을 펼치고 있다.

그래픽=김주원 기자 zoom@joongang.co.kr

그래픽=김주원 기자 zoom@joongang.co.kr

일본도 아베노믹스를 추진하면서 30% 수준이던 법인세율을 23%로 낮췄고, 특정 국가에 의존이 심한 제품ㆍ소재의 생산거점을 리쇼어링하면 이전 비용의 최대 3분의 2까지 지원한다. 한국과 달리 대도시로 돌아오는 기업에도 세제혜택과 연구개발비를 지원한다.

덕분에 미국은 지난해 1300개 유턴 기업이 13만8000개의 일자리를 만들었다. 일본도 매년 500여개 기업이 일본으로 돌아오고 있다. 여기에는 애플ㆍGEㆍ캐터필러ㆍ도요타ㆍ혼다ㆍ캐논 등 글로벌 대기업이 대거 동참했다.

정인교 인하대 국제통상학과 교수는 “각국이 리쇼어링에 적극적인 이유는 일자리가 생기고, 내수가 살아나며, 대외 의존도를 줄이고, 상품수지가 개선되는 등의 복합적인 경제효과가 기대되기 때문”이라며 “특히 국제분업 구조에 균열이 생기고, 자국 우선주의가 부각되면서 리쇼어링 경쟁은 더욱 확산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정 교수는 이어 “세계화가 대세였던 몇 년 전만해도 생산비용을 낮추는 게 중요했지만, 지금은 ‘어디서 생산하는 게 경제안보와 국익에 도움이 되느냐’가 더 중요한 판단 기준이 됐다”라고 짚었다.

미국을 비롯한 주요국의 노골적인 자국산 우대조치에 한국은 핵심 기업들의 탈(脫)한국을 걱정해야 할 판이다. 최근 급격하게 성장 중인 배터리 산업만해도 LG에너지솔루션ㆍSK온ㆍ삼성SDI는 미국ㆍ폴란드ㆍ헝가리 등에 제조 공장을 증설하고 있다. 지난해 ‘중계무역 순수출’은 전년 대비 25억7460만 달러 늘어난 221억3470만 달러를 기록하며 3년 연속 사상 최대 기록을 경신했다. 중계무역은 해외 현지법인이 현지에서 원자재를 조달해 만든 상품을 국내로 반입하지 않고 현지나 제3국에 파는 무역형태다. 그만큼 한국 기업의 해외 생산 및 수출이 늘었다는 의미다.

그래픽=김주원 기자 zoo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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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탈한국이 장기화할 경우 국내 제조업 위축으로 이어져 일자리 축소를 부르고, 가계소득 정체 및 소비감소로 파급될 수도 있다는 점이다. 실제 전국경제인연합회 분석에 따르면 2015~2019년 한국 제조업의 국내 고용은 18만명 감소한 반면, 해외 고용은 42만6000명 증가했다.

기업이 한국 대신 해외를 택하는 이유는 크게 두 가지다. 물건을 팔 시장이 크거나, 생산비가 싸기 때문이다. 냉정히 말해 한국은 주요국보다 두 가지 모두 열악하다. 국내 유턴으로 얻는 혜택보다 해외 시장을 포기하는 비용이 더 크다면 굳이 기업이 돌아올 이유가 없다.

그래픽=김영옥 기자 yesok@joongang.co.kr

그래픽=김영옥 기자 yesok@joongang.co.kr

하지만 최근 공급망 안정성의 중요성이 부각되며 리쇼어링에 관심을 갖는 기업들도 늘고 있다. 이를 실질적인 성과로 연결시키기 위해 전문가들은 더 파격적인 인센티브를 제시해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협력사들과 함께 움직이는 대기업은 국내 유턴의 파급효과가 큰 만큼 이들을 유인할 ‘당근책’도 필요하다.

윤동열 건국대 경영학과 교수는 “세금을 줄여주고, 일부 규제를 유예시키는 수준가지고 대기업과 글로벌 기업이 한국으로 돌아올지 의문”이라며 “기업이 깜짝 놀랄 수준의 혜택을 제공하고, 수많은 규제를 과감하게 없애야 한다”라고 조언했다. 윤 교수는 이어 “모든 산업을 대상으로 하기보다는, 한국의 경쟁우위 산업과 미래 먹거리에 리쇼어링 지원을 집중하는 것이 현실적이고 효과적인 방안”이라며 “경제자유구역처럼 ‘리쇼어링 특별구역’을 만드는 것도 고려할 만하다”라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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