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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양성희의 퍼스펙티브

역사·문화의 청와대, 서울의 새 랜드마크 가능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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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양성희 기자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더욱 뜨거워진 청와대 활용 방안

양성희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양성희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권력의 공간인 청와대가 시민의 품으로 돌아온 지 4개월이 넘었다. 조선시대 경복궁 후원, 일제강점기 조선 총독관저를 거쳐 역대 대통령들이 기거하며 역사의 영욕이 깃든 곳이다. 이달 15일까지 청와대를 찾은 사람은 182만 명. 하루 평균 1만명, 주말엔 하루 평균 2만명이 관람했다. 폭발적인 관심이다. 개방 초 인파가 몰리면서 편의시설 미비나 경내 훼손 우려가 나왔으나 이제는 안정적 단계로 접어들었다.

청와대 임시관리를 맡은 문화재청은 지난 15일 “지속적인 시설 확충과 정비로 일차적인 관람환경은 조성된 상태”라며 “관람 구역과 동선을 조정하고, 인제책(가이드라인) 설치 등을 통해 문화유산과 청와대 시설의 훼손 없이 개방, 관리하고 있다”고 밝혔다.

지난 4개월 동안 180만 명 방문
문화적 명소돼야 개방 취지 살아

보존과 활용은 적대 관계 아니야
본관·영빈관 등 공간차별화 필요

인근 경복궁·서촌 등과 연계해야
소모적인 정치쟁점화 도움 안돼

문화재 전문가 vs 미술계 대립

윤석열 대통령 취임과 함께 개방된 청와대. 하루 평균 1만명, 주말에는 하루 평균 2만명이 청와대를 찾고 있다. 베일에 가려졌던 공간에 대한 뜨거운 관심을 반영한다. [뉴스1]

윤석열 대통령 취임과 함께 개방된 청와대. 하루 평균 1만명, 주말에는 하루 평균 2만명이 청와대를 찾고 있다. 베일에 가려졌던 공간에 대한 뜨거운 관심을 반영한다. [뉴스1]

반면 개방된 청와대를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의 문제는 여전히 뜨거운 화두다. 문화재청, 대통령실 관리비서관실과 협의하며 ‘청와대 복합문화예술공간화’를 추진 중인 문체부는 최근 1호 전시를 선보였다. 한껏 눈높이를 낮춘 시민 참여적 전시였다. 반면 ‘원형보존, 문화재 지정, 유물조사’ 등을 요구하며 문화공간화에 반대하는 목소리도 여전하다.

미술계와 문화재 전문가들이 대립하는 양상도 벌어졌다. 정치적 입장에 따라 찬반이 나뉘거나 ‘보존 대 활용’ 혹은 ‘역사 대 문화’를 적대적 관계로만 보면서 생산적 논의의 발목을 잡기도 했다. 과연 국민에게 돌아온 청와대는 어떻게 재탄생해야 할까.

첫 단추 ‘장애 예술인 특별전’

이달 초 처음 가본 청와대는 아름다운 조경과 역사적 건축물이 함께 있어서 숨겨진 공원 하나를 선물 받은 느낌이었다. 한 시민은 “장소의 역사성도 살리고 그 안에서 즐길 문화 콘텐트도 있어서 누구나 즐겨 찾는 명소가 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작지만 알차고 의미 있는 전시였다. 스타 작가보다 사회적 약자, 시민 참여에 도장을 찍었다. 청와대 춘추관에서 ‘청와대 1호 전시’로 열려 지난 19일 폐막한 ‘장애 예술인 특별전’ 얘기다. 한국장애인문화예술단체 총연합회(장예총)가 공모한 60여 점이 출품됐다. 20일간 7만 명의 관객이 찾았고, 25점이 팔렸다. 장애인 관객도 10% 가까웠다. 정원일 장예총 사무총장은 “이렇게 관객이 많고 작품이 많이 팔린 장애 예술인 전시가 없었다”며 “청와대의 첫 전시라는 상징성에 많은 관객이 공감했다”고 말했다.

가벽을 친 전시장,  휠체어 장애인 관객을 고려해 작품은 평소 높이보다 낮게 걸렸다. 그림의 선을 따라 요철을 줘 촉각으로 감상할 수 있는 점자 도록도 제작했다. 무엇보다 장애인 작품이라면 내면의 고통이나 불굴의 의지가 강조되는 등 남다를 것이라는 고정관념을 깼다. “굳이 장애인 전시라는 타이틀을 달아야 하나 할 만큼 수준이 높아서 놀랐다”(최정아), “장애인이라고 다르게 볼 이유가 없다는 걸 다시 느꼈다”(박선옥)란 관객 반응이 나왔다. “장애인 미술가들에게는 이렇게 전시할 기회를 주는 게 최고 복지입니다.” 청각장애인 방두영 원로 작가가 개막식에서 박보균 문체부 장관에게 한 말이다.

박 장관은 지난달 청와대 문화공간화에 대해 “청와대에는 역사적 건물 외에도 예술품 600여 점, 5만 그루의 아름다운 나무와 꽃 정원, 통일신라 시대 불상 등 전통 유적이 있다. 그간 소수의 권력자만 은밀히 즐겼던 청와대의 최고 수준 예술품을 국민에게 돌려드리겠다. 문화예술, 역사, 자연을 품은 청와대가 대한민국 최고의 랜드마크가 될 것”이라고 밝힌 바 있다. 권위주의, 제왕적 정치와 결별하겠다는 청와대 개방의 취지를, 역사 유물로 박제된 공간이 아니라 시민이 참여하고 누리는 문화공간으로 완성하겠다는 의미다. 청와대 후속 전시는 미정이다.

‘위락시설화’ ‘친일’ 논란의 함정

지난달 세계적 패션잡지 보그코리아의 ‘청와대 한복 패션 사진 촬영’은 뜨거운 논란에 휘말렸다. ‘한복 세계화’에 더해 개방된 청와대를 세계에 알린다는 취지로 문화재청이 허가했다. 당연히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한복들이 등장했고, 모델들은 청와대 곳곳을 누볐다. 정통 한복이 아니고, 그중 일본 아방가르드 디자이너의 작품이 하나 있으며, 톱 모델 한혜진이 영빈관 내부에서 의자 위에 옆으로 누운 자세로 촬영한 게 문제가 됐다. 청와대 품격 훼손, 역사의식 부재, ‘친일’이란 비판이 나왔다. 탁현민 전 청와대 의전비서관은 “일제가 창경궁을 창경원으로 격하시킨 의도와 유사하다”고 했고, 일각에선 ‘기생’ 운운 발언까지 나왔다.

그러나 대중의 수용도를 넘는 일부 파격이 있다 해서, 그를 조선 왕조의 위엄을 짓밟으려 왕궁을 동물원과 유원지로 만든 일제의 만행과 민족적 수모에 빗대 싸잡아 비판하는 것은 과도하다. 청와대의 ‘위락시설화’ ‘미술테마파크화’가 우려된다며 ‘문화공간=놀이시설’ 딱지를 붙이기도 하는데, 권력이 내어준 공간을 엄숙주의란 잣대로 성역화하는 게 과연 개방의 취지에 맞는지도 의문이다.

세계적 미술관인 프랑스 베르사유 궁은 유명 브랜드 패션쇼의 명소다. ‘헐벗은’ 모델들이 런웨이를 누빈다. 서구에서는 근대 국가 탄생과정에서 제왕이 살던 궁전이나 성을 미술관, 박물관으로 조성해 국민에게 개방하는 것으로 민주정을 선언적으로 공표했다. 베르사유 미술관, 러시아 에르미타주 미술관 등이 그렇게 탄생했다. 지금 각 나라와 도시의 대표적 관광자원들이다. 미술관·박물관은 기존 벽과 구조를 그대로 두고 활용할 수 있어 역사적 건축물 보존·활용에 최적의 방법으로 꼽히기도 한다.

문화도시 서울의 교두보로

지난 14일 한성대에서 열린 ‘대한민국 문화자산 국제화 방안’ 세미나에서 정준모 한국미술품감정연구센터장(전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실장)은 “청와대의 역사성을 보존하면서 새로운 문화예술 공간으로 전환해 역사문화예술 클러스터(집적단지)를 조성”하는 방안을 제시했다. 청와대와 경복궁, 서촌과 북촌, 국립현대미술관과 서울공예박물관, 삼청동, 사간동, 송현동의 가칭 이건희미술관과 인사동으로 이어지는 ‘시각문화 중심 클러스터’다.

정씨는 “해외여행을 가면 대개 방문하는 장소가 박물관·미술관 중심으로 짜인다. 많은 도시가 이런 문화 클러스터로 관광객을 모으고, 도시의 문화적 위상을 띄운다. 미술관·박물관은 문화적 상징일 뿐 아니라 경제적 가치도 커지고 있다”고 설명했다.

정씨는 단 청와대 건물 전부를 미술관으로 활용하기보다는 “본관, 관저, 영빈관은 대한민국 근현대사를 보존한다는 의미에서 최대한 현상을 유지하는 방향에서 존치”하고, 부속건물인 “여민관 등 비서동과 경호동을 활용해 국립근대미술관 등 미술 공간으로 활용할 것”을 제안했다.

홍재승 플랫/폼 아키텍츠 소장은 “청와대가 ‘문화도시 서울’ 재구조화의 교두보가 되어야 한다”면서 “짧은 시간에 용도 결정이나 건축적 행위를 하기보다 향후 서울에 미치는 파급효과 등을 고려하자”며 긴 호흡을 주문했다. 미술관이야 많을수록 좋다고 하지만 주변 미술관들의 관계 설정, 차별화 같은 마스터플랜은 필수다. 국민여론수렴, 공감대 형성, 부처 간 협의, 속도 조절도 중요하다.

자문단도 '활용 로드맵' 오는 11월 제시 

한편 지난 7월 각계 전문가로 발족한 대통령실 ‘청와대 관리·활용자문단(단장 이배용 전 이화여대 총장)은 오는 11월 청와대 활용방안 로드맵을 내놓을 예정이다. 근대역사문화공간이나 사적 등 청와대 권역의 문화재 등록·지정에 대해 문화재청은 15일 “경복궁 후원 기초조사 연구용역을 추진 중이며 그 조사 결과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검토하겠다”는 기본 입장을 확인했다. 근대역사문화공간 내 개별등록문화재는 외관을 유지하되 내부는 용도에 맞게 리모델링이 가능하다.

최응천 문화재청장은 지난 7월 “조선 총독관저를 지을 때 층위가 교란되고 파헤쳐져 사적급 정도의 큰 유적이나 유물이 나올 가능성은 작다고 본다”며 “근대문화유산이나 천연기념물 정도로 지정하는 것은 가능하다고 보지만 활용에 큰 제약을 주지는 않을 것이다. 문체부가 주도하는 활용과 문화재청의 보존·관리가 함께 갈 수 있다고 생각한다”는 의견을 낸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