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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초 영상에 발칵..."돈 받는만큼 일한다" 조용한 사직 열풍 [팩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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업데이트

몰입노동을 통한 성장 신화는 수명이 다한 걸까. 미국에서 ‘조용한 사직(quiet quitting)’ 열풍을 둘러싼 논란이 뜨겁다. 조용한 사직이란 실제 퇴사를 하진 않지만 마음은 일터에서 떠나 최소한의 업무만 처리하는 태도를 의미한다. 일과 삶의 균형을 의미하는 한국의 워라벨과 유사하지만 그보다 더 소극적이고 방어적인 방식.

허핑턴포스트 창업자인 아리아나 허핑턴 스라이브글로벌 CEO는 “단지 일을 그만두는 게 아니라 삶을 그만두는 것”이라며 이런 흐름을 비판했다. 반면, 미국 노동계에선 지난 2년여 코로나19 확산기에 벌어진 대규모 정리 해고와 초과 근무에 지친 노동자들의 합리적 선택이라는 반박도 나온다. ‘조용한 사직’은 엔데믹 시대의 뉴노멀(new normal)이 될 것인가.

'조용한 사직'을 처음 소개한 미국의 20대 엔지니어 자이들 플린의 틱톡 영상. 사진 틱톡 캡처

'조용한 사직'을 처음 소개한 미국의 20대 엔지니어 자이들 플린의 틱톡 영상. 사진 틱톡 캡처

무슨 일이야

진원지는 뉴욕에 사는 IT 엔지니어 자이드 펠린(Zaidle Ppelin)의 17초짜리 틱톡 영상이다. 지난 7월 공개된 이 영상엔 “일이 곧 삶은 아니고, 당신의 가치가 업무 성과로 결정되는 것은 아니다”는 메시지가 담겼다. 20일 기준 350만 조회수를 기록한 영상엔 댓글 4500여 개, 좋아요 약 49만개가 달렸다. 그의 주장에 동의한 2030 세대 직장인들이 해시태그 #조용한사직을 단 영상을 틱톡에 잇따라 올리며 이슈를 확산했다. 이들 주장의 핵심은 일을 삶의 최우선 순위에 두지 않겠다는 것. 회사에서 성과를 잘 내기 위해 초과 근무를 하는 태도에 반대하며 월급 받는 데 문제 없을 만큼만 일하는 가치관을 강조한다.

이게 왜 중요해

 흔들리는 기업 : 조용한 사직을 택하는 직원이 늘면 기업의 조직 문화나 성과 창출에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 최소한의 일만 하겠다는 방어적 자세는 다른 직원의 사기까지 떨어뜨릴 수 있기 때문. 직원 개개인에게도 장기적으로 바람직하지 않다는 평가가 나온다. 하버드 비즈니스리뷰(HBR)는 지난 15일 조용한 사직 흐름을 주목하며 “회사는 필요할 때 기꺼이 나서는 인력들로 굴러가게 돼 있다”면서 “이런 추세는 회사뿐 아니라 직원 개개인에도 좋지 않다”고 진단했다. 조용한 사직을 택하는 사람들에겐 업무 역량을 키울 기회가 이전보다 줄어들 것이란 의미이다.

 인터뷰 중인 미국 노동부 장관 마크 월시. 사진 야후 파이낸스 캡처

인터뷰 중인 미국 노동부 장관 마크 월시. 사진 야후 파이낸스 캡처

허슬 컬쳐의 부작용 : 열정적으로 일하는 ‘허슬 컬쳐(hustle culture)’에 대한 반발로 보는 시각도 있다. 성장·성과 중심의 조직 문화에 변화가 필요하다는 신호라는 것. 허슬 컬쳐는 스타트업처럼 빠른 시간 내 급성장을 추구하는 조직들이 지향하는 문화다. 구성원의 업무 의욕을 고취할 수 있지만, 직원들이 지쳐서 포기하는 ‘번아웃(burn out)’을 겪을 수도 있다. 지난 3일 마크 월시 미국 노동부 장관은 한 방송 인터뷰에서 조용한 사직 유행을 두고 “고용주들은 직원들이 만족 못 하고 행복하지 않다는 걸 빠르게 알아채야 한다”고 말했다.

대퇴사 시대 그후 : 코로나 19 확산기 미국은 일명 ‘대퇴사 시대(great resignation)’를 맞았다. 원격근무를 지원하지 않거나 임금이 낮은 일자리에 연연하지 않고 퇴사 후 이직을 택하는 노동자들이 급증하면서다. 일할 사람이 귀해지자 임금 인상이 계속됐다. 미국 노동부에 따르면, 지난 2분기 민간부문 임금과 급여는 전년 동기 대비 5.7% 늘어 2002년 이후 가장 빠른 속도로 증가했다. 전반적인 인플레이션 속도를 감안해도 큰 폭 상승이다. 최근 시작된 조용한 사직이 장기화된다면 개인들이 굳이 퇴사와 이직 비용을 들이지 않고 다니던 직장에서 실속을 챙기는 흐름으로 이어질 수 있다. 다만, 임금 인플레이션을 진정시킬 정도로 영향을 줄 수 있을지는 지켜볼 점.

한국에선 어때  

● 원조는 한국 ‘워라벨’? : 국내에선 ‘조용한 사직’에 대해 새롭지 않다는 반응이 많다. ‘워라벨’을 추구하는 라이프스타일이 어제오늘 일은 아니기 때문. 지난해 12월 구인·구직 플랫폼 사람인이 직장인 3293명을 조사한 결과, 70%는 “딱 월급 받는 만큼만 일하면 된다”고 답했다. 이렇게 답한 비율은 20대(78.5%)와 30대(77.1%)가 40대(59.2%)와 50대(40.1%)보다 더 높았다.

2020년 같은 업체가 2030 남녀 2708명을 대상으로 ‘가장 입사하기 싫은 기업 유형’을 조사한 결과 ‘야근, 주말 출근 등 초과 근무 많은 기업’(31.5%)이 ‘업무량 대비 연봉이 낮은 기업’(23.5%)을 제치고 1위에 올랐다.

‘부캐’로 이중생활 : 조용한 사직을 제안한 자이드 펠린의 ‘부캐’(보조 캐릭터)는 가수다. 가수로서 운영하는 소셜미디어 계정도 따로 있다. 국내에서도 퇴근 이후 ‘부캐’의 삶에 더 가치를 두는 직장인들이 많다. 퇴근 후 웹소설 창작 강의를 듣는 30대 직장인 A씨는 “정해진 시간 주어진 업무는 집중해 마친 뒤 퇴근 후 웹소설 창작 강의를 듣는다”면서 “작가를 꿈꾸며 수업을 듣고 글을 쓰면 업무 스트레스도 잊고,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있다는 기분이 든다”고 말했다.

초과 근무 대신, 부업 소득을 올리는 ‘N잡러’도 증가 추세다. 긱워커 플랫폼 뉴워커가 지난 5월 국내 직장인 881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응답자 10명중 약 4명(41.4%)은 부업 경험이 있었고, 약 6명(57.9%)은 경제적 이유로 부업을 찾을 의향이 있다고 답했다. IT 대기업에 다니는 개발자나 디자이너들에게 부업을 연결해주는 서비스들도 최근 급성장 중이다. 이들은 경력직 부업 플랫폼 DIO(디오), 재능 공유 플랫폼 크몽, 숨고 등에서 ‘부캐’로 활동한다.

중앙포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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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월급 루팡’보단 낫다 : 대기업 직장인 김모(34)씨는 “조용한 사직은 남에게 피해를 안 주지만 지시를 위한 지시를 하거나 동료에게 묻어가는 ‘월급 루팡(하는 일 없이 월급만 받는 이)’은 조직에 피해를 준다”면서 “기본 업무를 다하는 ‘조용한 사직’은 직장인의 권리이자 무해한 선택지”라고 말했다.

조용한 사직에 대응하는 법  

HBR은 조용한 사직이 확산되고 있다면 ① 직원의 핵심업무를 재정의하고 ② 직원들이 뭘 원하는지 정확히 알고 지원해야 하며 ③건강에 해로운 ‘허슬 문화’ 대신 ‘주인의식 만들기’로 대체해 지속가능한 문화를 만들라고 조언한다.

사진 리멤버

사진 리멤버

실제로 직원들이 회사에 금전적 보상만을 기대하는 건 아니다. 업무 기회를 더 선호한다는 조사도 있다. 명함관리 플랫폼 ‘리멤버’가 지난 8월 스타트업으로 이직한 500명에 조사해보니, 이직 이유로 ‘다양한 업무 기회와 기대감’(37.1%)을 꼽은 응답이 ‘금전적 보상’(28.6%) 응답자보다 많았다. 한국인사관리학회장인 김종인 건국대 교수(경영학과)는 “젊은 직원들이 업무에 몰입할 수 있도록 회사 공간을 개선하거나, 코로나로 모호해진 업무를 재조정해 일하는 환경을 효과적으로 바꿀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이어서 그는 “조용한 사직 이슈를 계기로, 조직 전반을 돌아보고 개선안을 실행하는 기업들이 인재 확보(HR) 면에서 경쟁 우위에 오를 수 있을 것”이라고 조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