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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패는 수업료” 최종현 큰그림, 연 1조 석유개발 매출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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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3면

[복합위기의 시대 ‘혁신 DNA’] ①자원개발로 극복한 오일쇼크

고(故) 최종현 SK 회장(왼쪽 둘째)이 1981년 초 내한한 야마니 사우디아라비아 석유장관(오른쪽 둘째)과 담소를 나누는 장면. [사진 SK]

고(故) 최종현 SK 회장(왼쪽 둘째)이 1981년 초 내한한 야마니 사우디아라비아 석유장관(오른쪽 둘째)과 담소를 나누는 장면. [사진 SK]

글로벌 공급망 불안에다 고물가·고유가가 겹치면서 복합위기가 현실화하고 있다. 위기 대비와 미래 선점을 위한 혜안이 필요한 때다. 1962년 대한석유공사로 출범해 SK그룹에 인수된 후 올해 창립 60주년을 맞는 SK이노베이션의 ‘혁신 DNA’ 연재를 통해 위기 극복 솔루션을 모색해본다.

1973년과 78년, 두 차례의 오일쇼크로 원유 가격이 급등하면서 전 세계 경제가 휘청거렸다. 특히 1차 오일쇼크 당시 한국은 중동 국가에 ‘비우호국’으로 분류돼, 석유 수입 길이 막히면서 원유 재고가 열흘 치에 불과했다.

급박한 상황에서 선경은 최종현(1929~98) 회장 주도로 석유 수출금지 엠바고를 풀어 원유를 들여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2차 오일쇼크 때도 정부 책사 자격으로 하루 5만 배럴의 원유를 도입하는 데 기여했다.

당시 선경의 주력은 직물 사업이었다. 원료를 전량 수입에 의존하는 구조라 석유 수급에 사업 존폐가 달려 있었다. 최종현 회장은 73년 ‘섬유부터 석유까지’라는 슬로건을 제시하고, 수직계열화를 통해 선경을 에너지·화학 기업으로 키우겠다는 큰 그림을 그렸다. 이어 사우디아라비아 왕가 등 ‘석유 큰손들’과 교류하면서 석유 사업 진출을 위한 기반을 다져나갔다. 그 네트워크가 오일쇼크 때 위력을 발휘한 것이다. 당시 야마니 사우디 석유상은 최종현 회장에게 “한국이 필요한 만큼 원유를 증량 공급하겠다”고 약속하기도 했다.

오일쇼크는 안정적 원유 수급을 위해서는 직접 자원 개발에 나서야 한다는 교훈을 남겼다. 선경은 80년 유공을 인수한 후 곧바로 자원기획실을 설치하고 ‘무자원 산유국 프로젝트’를 가동한다. 기름 한 방울 나지 않는 나라를 산유국으로 만들어 에너지 안보에 대응하겠다는 청사진이었다. 이춘우 기업가정신학회장(서울시립대 교수)은 “에너지가 공급 안 되면 국가가 마비된다. SK는 소명감을 가지고 석유 사업에 진출했다”며 “긴 호흡으로 먼 미래를 내다본 대표적 경영 사례”라고 평가했다.

석유 개발은 대규모 자본과 오랜 시간이 투입돼야 했다. 초기엔 리스크를 줄이기 위해 글로벌 기업의 자원 개발 프로젝트에 지분을 투자하는 방식으로 참여했다. 83년 미국 코노코의 인도네시아 카리문광구 사업, 이듬해 미국 옥스코의 아프리카 모리타니 사업에 뛰어들었으나 빈손으로 돌아와야 했다. 최 회장은 “수업료가 필요하다. 담당자를 절대 문책하지 말라”며 힘을 실어줬다.

이후 세 번째 석유개발 사업에서 대박이 터진다. 84년 북예멘 마리브광구 탐사개발권 24.5%를 사들인 지 5개월 만에 3억~4억 배럴 규모의 초대형 유전이 발견된 것이다. 3년 후 본격적인 생산이 시작됐고, 당시 우리나라 일평균 원유 도입량의 약 4%를 책임지게 된다.

SK는 이후 숱한 실패를 거쳐 남미 페루와 남중국해 등지에서 내실 있는 유전을 개발한다. 이에 자극받은 다른 기업도 해외 석유 개발 사업에 진출하면서 에너지 안보 역량을 축적하는 환경이 조성된다.

SK는 이후 약 40년간 34개국에서 100여 개의 석유 개발 사업을 진행했다. 현재 연 매출은 1조원대, 사업 성공률은 10%로 평균치인 5%의 두 배에 이른다. 김현욱 KDI 국제정책대학원 교수는 “자원 개발 과정에서 내부 역량과 기술력이 축적됐고, 원유 공급원 확보를 비롯해 에너지 안보라는 국가적 어젠다에도 기여한 것도 소득”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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