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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 앞에서 되레 마약왕에 호통…'수리남' 실화에 더 놀랐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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넷플릭스 시리즈 '수리남'은 실제 남미 국가 수리남을 장악했던 한국 출신 마약왕 조봉행과 그를 잡으려 분투한 민간인 K씨의 실화를 바탕으로 한다. 사진 넷플릭스

넷플릭스 시리즈 '수리남'은 실제 남미 국가 수리남을 장악했던 한국 출신 마약왕 조봉행과 그를 잡으려 분투한 민간인 K씨의 실화를 바탕으로 한다. 사진 넷플릭스

 넷플릭스 시리즈 ‘수리남’을 본 시청자 대부분이 한 번쯤 품는 의문이 있다. 아무리 드라마지만 저런 극한 상황에서 민간인이 살아남는 게 과연 가능할까 하는 의문이다. 남미의 낯선 나라 수리남을 장악한 한국인 마약상 전요환(황정민)을 잡기 위한 국정원 작전에 민간인 강인구(하정우)가 투입된다는 설정부터 비현실적으로 다가온다.

하지만 알려진 대로 드라마 속 이야기는 실제 있었던 일에 살을 입힌 것이다. 1990년대 말~2000년대 초 수리남에서 활동한 한국인 마약상 조봉행과 그를 검거하는 데 일조한 민간인 K씨가 모델이다. 조봉행 검거 사실 자체는 2011년 6월 검찰을 통해 밝혀졌지만, 검거 뒤에 있던 민간인 K씨의 활약 등 구체적인 작전 과정은 같은 해 10월 중앙SUNDAY 보도(‘수리남 군경이 마약왕 비호, 잡을 방법은 오직 외국 유인뿐’)를 통해 처음 드러났다. 드라마를 연출한 윤종빈 감독 역시 작품을 준비하며 K씨를 만났다. 기사와 윤 감독의 증언 등을 종합해 드라마와 실제, 차이점과 공통점을 살폈다.

마약 밀매하던 목사, 실제로는 선박냉동기사 

드라마와 실제가 가장 크게 다른 점은 조봉행(황정민 역)의 행적이다. 드라마 속 전요환은 한국에서부터 마약을 유통한 인물로 그려지지만, 실제 조봉행은 한국에서는 마약 관련 일을 하지 않았다. 한국에서 선박 냉동기사로 일하던 조씨는 1994년 국내에서 빌라 건축을 빌미로 10억원을 가로챈 뒤 수배를 받던 중 수리남으로 도주했다. 수리남을 도주지로 택한 건 선박 냉동기사로 일하던 중 8년간 수리남에 체류했던 경험이 있기 때문이었다.

'수리남' 극 중에서 전요환(황정민)은 목사 지위를 이용해 신도들을 마약 유통에 활용한 것으로 표현되지만, 실제 조봉행은 종교 지도자 연기를 하지는 않았다. 사진 넷플릭스

'수리남' 극 중에서 전요환(황정민)은 목사 지위를 이용해 신도들을 마약 유통에 활용한 것으로 표현되지만, 실제 조봉행은 종교 지도자 연기를 하지는 않았다. 사진 넷플릭스

넷플릭스 시리즈 '수리남' 보도스틸. 사진 넷플릭스

넷플릭스 시리즈 '수리남' 보도스틸. 사진 넷플릭스

1995년 수리남 국적을 취득한 조씨는 생선 가공공장을 차려 면세유를 밀매하다가, 사업이 어려워지자 마약 유통에 손을 댔다. 드라마의 설정처럼 조씨는 실제로 당시 수리남 대통령과 친분이 있었다고 한다. 2010년 취임한 데시 보우테르세 대통령이 군인 신분이던 시절 마약 밀매에 사용하던 선박을 조씨가 수리해준 게 인연이 됐다.

전요환이 한인교회 목사 신분을 이용해 마약 밀매에 신도들을 동원하는 대목도 실제로 있었던 일이 아니다. 윤 감독은 목사 설정을 도입한 이유에 대해 “어떻게 하면 주인공이 마약왕에게 속은 게 가장 극적으로 보일까 고민하다가 직업만으로 사람들에게 믿음을 주는 종교인을 택했다”고 설명했다.

배우 전도연 주연의 영화 '집으로 가는 길'(2013)은 조봉행 조직이 보석 원석이 담긴 가방이라고 속인 마약 가방을 들고 프랑스에 입국하려다 교도소에 수감된 주부 장모씨의 실화를 그렸다. 조봉행은 주부, 용접공, 무직 여성, 미용실 종업원 등 경제적으로 어렵고 범죄 전력이 없는 한국 동포들을 꾀어 마약 운반책으로 이용했다.사진 CJ ENM

배우 전도연 주연의 영화 '집으로 가는 길'(2013)은 조봉행 조직이 보석 원석이 담긴 가방이라고 속인 마약 가방을 들고 프랑스에 입국하려다 교도소에 수감된 주부 장모씨의 실화를 그렸다. 조봉행은 주부, 용접공, 무직 여성, 미용실 종업원 등 경제적으로 어렵고 범죄 전력이 없는 한국 동포들을 꾀어 마약 운반책으로 이용했다.사진 CJ ENM

조씨는 목사로 활동하진 않았지만, 수리남 내 처지가 어려운 한국인 교포들을 마약 밀매에 끌어들였다고 한다. 그중 조씨 조직에 속아 무슨 일에 연루되는지도 모른 채 마약을 운반하다 붙잡혀 프랑스령 교도소에 수감됐던 주부 장모(당시 37세)씨의 사연은 배우 전도연 주연의 영화 ‘집으로 가는 길’(2013)로 제작되기도 했다.

일부러 머리 밀고 중국 갱과 싸움…“살기 위해”

K씨가 국정원 작전에 협조하게 되는 과정도 드라마와 살짝 다르다. 드라마 속 강인구는 전요환에 속아 억울한 옥살이를 하던 중 국정원을 만나게 되지만, 조씨로 인해 사업에 차질이 생긴 현실의 K씨는 주베네수엘라 한국 대사관에 도움을 구한 뒤 국정원의 협조 요청을 받게 됐다고 한다. 중앙SUNDAY 인터뷰에서 K씨는 “친한 친구가 수리남에서 선박용 특수용접봉을 판매하는 사업이 유망하니 같이하자고 권했다”며 “용접봉은 잘 팔렸지만, 그 판매를 중개하던 조씨가 대금을 주지 않았다. 어떻게든 사업을 살려 보려 했으나 방도가 없어 주베네수엘라 한국대사관에 도움을 청하게 됐다”고 설명했다.

'수리남' 속 민간 사업자 강인구(하정우)의 모델이 된 K씨는 2011년 인터뷰에서 "친한 친구가 수리남에서 선박용 특수용접봉 판매업이 유망하다고 해 직장생활을 접고 가게 됐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친구가 수리남을 방문했을 때 조봉행이 꾸며놓은 연극에 속아 사업을 벌이게 된 것이었다"고 말했다. 사진 넷플릭스

'수리남' 속 민간 사업자 강인구(하정우)의 모델이 된 K씨는 2011년 인터뷰에서 "친한 친구가 수리남에서 선박용 특수용접봉 판매업이 유망하다고 해 직장생활을 접고 가게 됐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친구가 수리남을 방문했을 때 조봉행이 꾸며놓은 연극에 속아 사업을 벌이게 된 것이었다"고 말했다. 사진 넷플릭스

이렇게 국정원 작전에 뛰어들게 된 K씨의 모험담은 영화보다 더 영화 같았다. K씨는 국정원 요청을 수락한 뒤 조씨 조직에 들어가기 위해 “머리를 빡빡 밀고 차이나타운에서 중국 갱들과 몇 달 동안 일부러 싸우기도 했다.”(윤 감독) 실화 그대로 만들면 “오히려 신빙성이 떨어질까 봐” 덜어낸 부분이 더 많을 정도다. K씨는 “거기에서 살아가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방식이었다”고 중앙SUNDAY 인터뷰에서 회고했다.

K씨는 드라마 속 강인구보다 훨씬 더 고립무원의 상태였다. 강인구는 마약밀매 조직에 사전에 침투해 있던 국정원 언더커버 요원, 마약상 행세를 하며 전요환을 대면한 국정원 요원 최창호(박해수) 등 조력자가 있지만, K씨의 경우 수리남 현지에서 혼자서 조씨를 상대했다고 한다.

'수리남' 극 중에서 강인구(하정우)는 국제 마약상 연기를 하는 국정원 요원 최창호(박해수) 등 의지할 데가 있지만, 실제 K씨는 현지에서 홀로 조봉행을 상대했다. 사진 넷플릭스

'수리남' 극 중에서 강인구(하정우)는 국제 마약상 연기를 하는 국정원 요원 최창호(박해수) 등 의지할 데가 있지만, 실제 K씨는 현지에서 홀로 조봉행을 상대했다. 사진 넷플릭스

넷플릭스 시리즈 '수리남' 보도스틸. 사진 넷플릭스

넷플릭스 시리즈 '수리남' 보도스틸. 사진 넷플릭스

드라마에서 강인구는 최창호와 수차례 큰 목소리로 통화해도 들키지 않지만, K씨는 국정원과 통화가 조봉행 부하에게 발각돼 죽기 직전까지 갔다. 이때 K씨는 되레 “장난 좀 친 것 가지고 날 이렇게 대하느냐”고 항의하는 기지를 발휘해 위기를 모면했다고 한다. 잠잘 때도 권총을 항상 베개 밑에 두고 잤다는 K씨는 “당시엔 정말 ‘이제 죽었구나’라는 생각이 드니 이상하게 맘이 차분해졌다. 내친김에 ‘어차피 이 길밖에는 없다’는 생각으로 조씨를 불러 거꾸로 큰소리를 쳤다”고 말한 바 있다.

K씨와 강인구, 부성애만큼은 판박이 

믿기 힘든 내용에 설득력을 부여하는 건 실제 K씨가 지닌 강인함이었다. 윤 감독은 “처음에 녹취록을 봤을 땐 이 사람이 무슨 ‘깡’으로 목숨 걸고 이런 일을 했을까 이해가 안 됐는데, 만나보니 납득이 됐다. 실제로 보면 얼굴이 새카맣고 군인 같은, 어디다 떨어뜨려 놔도 생존이 가능할 것 같은 느낌”이라고 K씨를 묘사했다. 강인구가 어려서 부모를 잃고 책임감 강한 성격을 갖추게 된 점, 알고 지내던 여성에게 불쑥 전화로 프러포즈해 결혼한 점도 모두 K씨의 실제 인생에서 따온 것이라고 한다.

아버지로서 강인구의 부성애 또한 K씨의 이야기였다. K씨는 중앙SUNDAY 인터뷰에서 국정원 협조 요청을 수락한 이유에 대해 “나중에 내 아이들(1남2녀)에게 부끄럽지 않은 떳떳한 아빠이고 싶었다”며 “수리남에 있을 때 아내와 아이들 생각이 참 많이 났다. 혹시 내가 잘못되면 가족들은 어떻게 하나 하는 걱정이 들 때면 ‘괜한 일에 뛰어들었나’ 하는 후회도 하곤 했다”고 돌이키기도 했다.

넷플릭스 시리즈 '수리남' 보도스틸. 사진 넷플릭스

넷플릭스 시리즈 '수리남' 보도스틸. 사진 넷플릭스

국정원이 전요환을 잡기 위해 수리남 밖으로 유인하려는 설정은 실제 작전과 유사하다. 2008년 초 수리남에서의 검거작전이 실패하면서 신변이 위험해진 K씨는 그해 10월 귀국한 뒤 국제 통화로 조씨와 마약 거래를 이어간 끝에 브라질로 유인하는 데 성공했다고 한다. 조씨는 결국 2009년 7월 23일 상파울루 과룰류스 공항에서 브라질 경찰에 붙잡혔고 2011년 국내로 압송된 뒤 징역 10년형을 선고받고 복역하던 중 2016년 4월 건강 악화로 사망했다.

K씨의 근황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다. 2011년 K씨를 인터뷰했던 본지 강갑생 기자는 “당시에는 조봉행이 여전히 살아있어 K씨의 신변이나 호구지책이 걱정됐다. 그래서 물으니 K씨는 담담히 웃으며 ‘국정원에서 알아서 해주겠죠’라고 했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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