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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이낸셜 스토리, 시장이 이해하는 이야기를 만들다 [SKI 혁신성장 연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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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K이노베이션 혁신성장 연구

⑩-끝 탄소에서 그린으로, 파이낸셜 스토리 경영

다음 달 창립 60주년을 맞는 SK이노베이션은 1962년 대한석유공사에서 출발했다. 1980년 선경(SK의 전신)에 인수된 이후 석유화학, 종합에너지, 바이오, 배터리와 그린에너지까지 섭렵하면서 지난 60년간 변신과 성장을 거듭해왔다. 오늘날 SK를 재계 2위 대그룹으로 만든 토대가 된 SK이노베이션의 혁신성장 10가지 성공 비결에 관한 학술 심포지엄이 지난달 30일 기업가정신학회 주최로 열렸다. 오늘날에도 유효한 경영 인사이트를 발굴하는 자리였다. 이날 발표된 내용과 연구결과를 정리해 연재한다. 마지막 혁신성장 스토리는 '카본 투 그린(탄소에서 그린으로)', 파이낸셜 스토리 경영 기법. 김상준 이화여대 경영학과 교수의 분석 발표를 토대로 정리했다.

검은 고양이를 흰 고양이로 만들 수 없을까

2014년 최태원 회장의 저서 『새로운 모색, 사회적 기업』엔 쥐가 들끓어 곤란에 처한 마을을 구해준 고양이가 등장한다. 고양이는 두 종류로 나뉜다. 쥐를 잡아 오면 대가로 생선을 받는 '검은 고양이'와 보상이 없어도 알아서 쥐를 잡아 오는 '하얀 고양이'다. 검은 고양이는 경제적 이익을 좇는 영리기업, 흰 고양이는 사회적 기업을 은유한다. '이윤을 추구하면서도 사회적 문제를 해결하는 사회적 기업의 가치를 일반 기업에 심을 수 없을까.' 파이낸셜 스토리는 검은 고양이었던 SK에 사회적 기업의 DNA를 심어 흰 고양이로 바꾸자는 최태원 회장의 생각에서 출발한다.

사회적 가치를 숫자로 만들어 평가하다

SK는 일반 기업들도 인센티브를 통해 사회적 가치(SV, Social Value)를 추구할 수 있음을 입증하려 했다. 2015년, '사회성과인센티브(Social Progress Credit, SPC)' 프로그램을 통해 사회적 기업이 창출한 성과를 화폐 가치로 측정, 금전적으로 보상하는 실험을 시작했다. 사회적 가치를 회계장부에 기록할 수 있는 숫자로 만들어 경제적 가치와 비교할 수 있게 정보공시를 하면, 사회적 가치가 투자 의사 결정에서 중요한 요소가 될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다.

5년 후인 2020년, SPC 프로그램의 효과를 확인했다. 2015년 44개 기업으로 시작한 SPC에 지난해 기준으로 총 288개 기업이 참여했다. 고용, 사회 서비스, 환경, 사회 생태계 성과로 측정된 이들 기업의 사회 성과는 총 714억원에 달했다. 때마침 국내에 유입된 ESG 경영 패러다임이 SK의 사회적 가치 실험에 불을 지폈다.

최태원 회장은 2020년 10월 열린 CEO세미나에서 '파이낸셜 스토리'라는 새로운 화두를 던졌다. 파이낸셜 스토리는 자본시장을 뜻하는 '파이낸셜'과 기업의 생존 전략에 대한 '스토리(이야기)'를 합친 단어다. 조직 매출, 영업이익 등 재무성과에 더해 시장이 매력적으로 느낄 수 있는 목표와 구체적 실행 계획이 담긴 '성장 스토리'를 만드는 전략이다. 사회적 가치를 자본시장에서 평가할 수 있는 환경을 SK가 만들고 그를 시장으로 확산하자는 속뜻도 담겼다.

파이낸셜 스토리를 추진하기 위한 방법론도 구상했다. 중대한 변화(Deep Change, 딥 체인지)와 게임의 룰을 바꾸는(Game Changer, 게임 체인저) 것이다. 딥 체인지는 기업이 추구하는 가치·비전·조직구조·업무방식을 총체적으로 바꾸는 노력을 의미한다. 게임 체인저는 생산과 경쟁, 시장 구조가 달라질 수 있는 방향으로 사업을 재편하는 기업을 뜻했다.

SK이노베이션 김준 총괄 사장이 지난해 7월 스토리데이에서 회사의 친환경 사업 전략을 발표하고 있다. 사진 연합뉴스

SK이노베이션 김준 총괄 사장이 지난해 7월 스토리데이에서 회사의 친환경 사업 전략을 발표하고 있다. 사진 연합뉴스

탄소에서 그린으로, '카본 투 그린'

5년간 30조원을 투자해 '탄소에서 그린으로' 회사를 완전히 바꾸겠다. -2021.7.1 김준 SK이노베이션 총괄사장

SK의 파이낸셜 스토리 주문에 가장 먼저 답한 건 정유·석유화학·배터리 등 그룹의 핵심 사업을 이끄는 SK이노베이션이었다. 김준 부회장(당시 총괄사장)은 지난해 7월 1일 전사 경영진이 총출동한 '스토리데이'에서 SK이노베이션의 새로운 사업 전략 '카본 투 그린(Carbon to Green)'을 발표했다. 파이낸셜 스토리 전략에 맞춰 사업 중심축을 탄소에서 그린으로 전면 이동하겠다는 '탈 정유' 선언이었다.

카본 투 그린은 ESG 경영 패러다임이 확산하는 외부 상황을 지켜보던 SK이노베이션이 고민 끝에 내린 결론이었다. SK이노베이션은 대표적인 탄소 배출 산업인 정유·석유화학으로 성장한 기업이다. 탄소에서 그린으로의 지각변동은 사업 존속 자체의 위기였다. 이러한 딜레마 속에서 친환경 사업으로 탄소 배출량을 줄여 총배출량을 상쇄하자고 판단했다. 궁극적으로는 탄소 배출이 많은 사업에서 딥 체인지를 시도, 기술혁신을 통해 탄소 배출량을 줄여 에너지 업계의 게임 체인저가 되겠다는 목표를 세웠다.

SK이노베이션은 카본 투 그린을 실행할 방법을 세 가지로 제시했다. 탄소를 배출하는 만큼 그를 상쇄할 수 있는 사업 포트폴리오를 만드는 것, 중장기적으로는 친환경 사업인 배터리를 중심으로 성장을 가속하는 것, 궁극적으로는 기술 혁신을 통해 탄소 배출을 0으로 만드는 것이다. 플라스틱 리사이클 등 친환경 비즈니스로 사업을 전환하는 '그린 트랜스포메이션(Green Transformation)', 배터리를 중심으로 그린 포트폴리오를 강화하는 '그린 앵커링(Green Anchoring)', 2050년 이전 '넷 제로(Net Zero) 조기 달성' 등 카본 투 그린의 핵심 전략은 이렇게 나왔다.

대전환을 앞두고 시장에 신뢰를 줄 수 있는 더욱 강력한 조치도 필요했다. 회사의 대응 성과를 CEO의 평가·보상과 직접 연계하면서 넷제로 추진 실행력을 높여야 했다. 환경(E)과 사회(S) 분야의 실천 노력에 더해 주주, 투자자, 고객 등 다양한 이해관계자가 공감하고 지지하는 수준으로 지배구조(S)를 강화해야만 했다. 이에 회사는 지난해 7월 파이낸셜 스토리를 발표하며 이사회 중심 경영 강화를 위한 거버넌스 개선안을 함께 내놓았다. 이사회가 CEO 평가‧보상‧승계 등에 대한 의사결정권을 보유하게 되면서 지배구조 투명성을 증명해 장기적인 시장의 신뢰를 끌어낼 기반을 마련했다는 평가다.

김상준 이화여자대학교 경영학과 교수.

김상준 이화여자대학교 경영학과 교수.

김상준 이화여대 경영학과 교수 인터뷰

SK이노베이션 창립 60주년 기념 ‘혁신성장 연구’에 참여한 소감은.

"SK라는 그룹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파악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개인적인 지적 호기심을 충족시키는 데 도움이 됐습니다. 기업이 성장하고 오랫동안 생존한 것은 그 자체만으로 대단한 일이기에 성장 과정을 혁신의 관점에서 바라본 것이 학문적으로 의미 있는 사례 연구였습니다. 좋은 경영의 사례, 혁신을 위한 도전적 의사결정을 발견해 개인적으로 흥미 있는 연구였습니다."

SK이노베이션 파이낸셜 스토리의 핵심은 무엇인가요.

"파이낸셜 스토리는 최태원 SK 회장의 언어이자 의지이며 이는 즉흥적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사회적 가치(SV)라는 개념을 만들어오는 과정에서부터 ESG 경영에 대한 대응 버전으로 확장된 것입니다. 여기엔 중의적인 의도가 있습니다. 사회적 기업을 통해 사회 문제를 해결하고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수행하겠다는 경영철학, 다른 하나는 고용 등 기업 활동의 외부효과를 자본 시장에서 인정받고 실제 화폐 단위의 기업 가치로 환원하는 것입니다. 파이낸셜 스토리가 시장을 타깃으로 만든 '스토리'라면, 이사회를 타깃으로 한 내부용 '거버넌스 스토리'도 있습니다. 핵심인 그린 트랜스포메이션은 다양한 방식으로 도전하고 또 실패할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최태원 회장의 의지, SK이노베이션의 사업 궤적을 보면 장기적으로는 이뤄낼 것이라 기대합니다."

파이낸셜 스토리가 SK 내부의 외침으로만 그치면 안 된다고 했는데.

"파이낸셜 스토리는 ESG 경영과 맥을 같이 합니다. SK이노베이션의 경우, 석유화학 사업이 주요 사업이었기 때문에 탄소 배출에 대한 문제의식이 남달랐습니다. 내부에서는 탄소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 생존에도 위협을 느낄 수 있다고 생각하는 분위기였고, 이를 바꾸는 노력이 곧 ESG 경영을 하는 것이라 믿었습니다. 최태원 회장은 사회적 가치에 대한 확고한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이를 적극 창출하는 방안을 주문했고, 그것이 경영 시스템 전반을 바꾸는 '딥 체인지'의 이름으로 아이콘화 됐습니다. 최 회장은 단순히 기업 내부의 변화가 아니고 산업의 게임 룰을 바꿔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어찌 보면 중장기 전략에 대한 발표로 보일 수 있지만, 그 속엔 그린 트랜스포메이션 등 게임의 룰을 바꾸려는 계획이 녹아있습니다."

연구의 성과와 의의는.

"이번 연구를 진행하며 받았던 질문 중 인상 깊었던 것, 그리고 저 스스로에게도 질문했던 것은 ‘결국 교과서에도 나오고 누구나 다 아는 내용을 정리한 것이 아니냐’는 것이었습니다. '선언'을 위해 어떤 조직 진단이 이뤄졌고, 어떤 이유에서 미래 청사진이 천명됐는지는 그동안 다뤄지지 않았습니다. 끈질기고 장기적인 시각에서 일관된 행위들이 포착됩니다. 맥락 속에서 경영자의 도전 의식과 결단력을 더욱 체감할 수 있었던 연구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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