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 악수도 무시한 여장부…'무례한 앤 공주'의 반전 이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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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 스코틀랜드 밸모럴 성에서 단란한 때를 보내는 엘리자베스 2세(맨 왼쪽)와 앤 공주(가운데). 62년 후, 이곳에서 어머니는 숨을 거두었고 앤 공주가 운구를 런던으로 모시는 책임을 맡았다. AP=연합뉴스

1960년 스코틀랜드 밸모럴 성에서 단란한 때를 보내는 엘리자베스 2세(맨 왼쪽)와 앤 공주(가운데). 62년 후, 이곳에서 어머니는 숨을 거두었고 앤 공주가 운구를 런던으로 모시는 책임을 맡았다. AP=연합뉴스

1년에 약 400회. 올해 72세인 영국 앤 공주가 10대 후반부터 매년 왕실 대표로 주관 또는 참석해온 행사 숫자다. 고(故)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이 낳은 4남매 중 유일한 딸인 그는 스코틀랜드 밸모럴 성에서 런던까지 운구 행렬을 지켰다. 6시간을 차를 타고, 다시 2시간 비행기를 타는 여정이었지만 숨 돌릴 틈도 없이 스코틀랜드행 비행기에 다시 올랐다고 한다. 글래스고 시에서 열리는 작은 정례 행사에 참석하기 위해서였다. 스코틀랜드의 독립 의지를 꺾고 영국의 일원으로 결속을 다지기 위해 수 세기 동안 계속된 행사지만, 그다지 중요한 행사는 아니라고 한다. 취소했어도 큰 흠결은 되지 않았을 거란 얘기다. 앤 공주는 그러나 묵묵히 행사에 참석했다. 그의 성격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뉴욕타임스(NYT)는 지난 14일(현지시간) “과거에도 소규모 영지를 가진 영주 정도가 해왔던 의무적 행사”라며 “앤 공주는 그러나 수십 년 간 이 행사를 주관해오며 불평 한마디 하지 않았다”고 전했다. NYT는 이어 “찰스 3세는 앞으로 왕실 관련 업무를 처리하는 데 있어서 앤 공주에게 더욱 의지하게 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엘리자베스 2세의 빈자리를 앤 공주가 상당 부분 ‘큰 어른’으로 대신할 거란 전망이다. 북한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오른팔로 여동생 김여정 노동당 제1부부장이 활약하는 것을 연상시키는 대목이기도 하다.

지난해 엘리자베스 2세가 왕실 관련 행사에 앤 공주(보라색 옷)를 대동하고 나타난 모습. AP=연합뉴스

지난해 엘리자베스 2세가 왕실 관련 행사에 앤 공주(보라색 옷)를 대동하고 나타난 모습. AP=연합뉴스

앤 공주는 장례 고정 내내 공공 장소에서 감정을 드러내는 것을 미덕으로 여기지 않는 영국 왕실 법도에 충실했다. 그런 그도 운구차 뒤를 따르는 차 안에선 눈물이 그렁그렁한 모습이 카메라에 포착됐다.

 운구차 행렬 차량 안의 앤 공주. AFP=연합뉴스

운구차 행렬 차량 안의 앤 공주. AFP=연합뉴스

가디언ㆍITV 등 영국 매체들은 “엘리자베스 2세는 감정에 휩쓸리지 않는 차분함을 우선시했고, 그런 점을 가장 잘 물려받은 이가 앤 공주”라는 평을 내놓고 있다. 엘리자베스 2세는 때로 차갑다는 비판을 받았다. 1997년 다이애너 전 왕세자비 사고사 이후 닷새 동안 침묵을 지킨 것이 대표적이다. 앤 공주는 그러나 이후 배니티페어와 인터뷰에서 “닷새 후 성명을 발표했던 건 왕실의 법도에 따른 것일 뿐이고 어머니는 남은 가족의 안위를 걱정했다”고 옹호했다. 앤 공주 본인도 한때 냉소적 태도로 현지 매체에서 “무례한 공주 전하(Her Royal Rudeness)”라는 별명으로 불리기도 했다.

화려함과도 거리가 멀다. 트위드 원단의 무릎 아래를 덮는 스커트 등 일정 스타일을 고수했고, 찰스 3세와 다이애너와의 결혼식에 입었던 드레스를 이후 다른 왕실 행사에 입고 나타나기도 했다. 패션잡지 보그(Vogue)는 그를 두고 “‘지속 가능성’이라는 말이 유행하기 전부터 이미 그런 패션을 실천한 인물”이라고 평했다. 아버지 필립 공의 냉소적 유머 감각과 어머니의 합리적 성격과 책임감을 두루 물려받았다는 평가를 받는다.

필립공과 엘리자베스 2세 품에 안겨있는 찰스 3세(맨 왼쪽)와 앤 공주. 1951년, 앤 공주 출생 이듬해 사진이다. AP=연합뉴스

필립공과 엘리자베스 2세 품에 안겨있는 찰스 3세(맨 왼쪽)와 앤 공주. 1951년, 앤 공주 출생 이듬해 사진이다. AP=연합뉴스

그런 그에게도 숨구멍은 있어야 한다. 승마가 그중 하나다. 그는 영국 왕족 중에선 최초로 올림픽에 승마 선수로 출전하기도 했다. 올림픽 메달은 목에 걸지 못했지만, 영국 국내 승마 대회에선 1등을 한 기록도 있다. 그는 과거 영국 매체와 인터뷰에서 “왕족으로 산다는 건 한정된 울타리에 갇혀있다는 것”이라며 “그럴수록 말(馬)을 타고 그 울타리 밖을 내다보며 숨을 쉬는 게 필요하다”고 말했다.

지난 6월 윌리엄 왕세손과 함께 말을 타고 왕실 행사 중인 앤 공주(오른쪽). AP=연합뉴스

지난 6월 윌리엄 왕세손과 함께 말을 타고 왕실 행사 중인 앤 공주(오른쪽). AP=연합뉴스

그는 승마선수였던 인연으로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위원으로도 활동하고 있다. 2018년 평창 겨울올림픽과 인연이 깊은 고(故) 자크 로게 IOC 위원장을 버킹검궁으로 초청하기도 했다. 지금도 IOC내에서 위원 선출위원장이라는 요직을 맡고 있다. 한 북미권 IOC 위원은 기자에게 “말 대신 행동으로 맡은 일을 착실히 해내는 인물”이라고 평하기도 했다.

앤 공주와 자크 로게 IOC 위원장이 2014년 버킹검 행사에서 환담하고 있다. AFP=연합뉴스

앤 공주와 자크 로게 IOC 위원장이 2014년 버킹검 행사에서 환담하고 있다. AFP=연합뉴스

승마는 그러나 그에게 악연도 남겼다. 첫 남편 마크 필립스가 같은 승마선수였는데, 1988년 서울 여름올림픽에서 은메달을 땄던 인물이지만 불륜을 하면서 결혼은 파경을 맞았다. 앤 공주는 이후 엘리자베스 2세의 호위 업무를 맡았던 티모시 로런스와 재혼했다.

강단 있는 성격은 영국 안팎에서도 유명하다.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이 재임 시절 영국을 찾아 엘리자베스 2세와 왕실 가족을 만났을 때, 앤 공주는 정식으로 악수를 나누는 대신 어깨만 으쓱해 보였다. 1974년 납치 미수 사건에선 자신의 차를 가로막고 내리라고 고함을 치는 범인에게 “그렇게는 못 한다 이놈아(Not bloody likely)!”라고 맞받아치기도 했다.

트럼프 당시 대통령 내외가 재임 당시 영국 런던 버킹검궁을 방문했을 당시 사진. 앤 공주(맨 왼쪽 파란 원 안)가 트럼프 대통령을 주시하고 있다. 사진 유튜브 캡처 https://www.youtube.com/watch?v=CnQ9dddBWAk

트럼프 당시 대통령 내외가 재임 당시 영국 런던 버킹검궁을 방문했을 당시 사진. 앤 공주(맨 왼쪽 파란 원 안)가 트럼프 대통령을 주시하고 있다. 사진 유튜브 캡처 https://www.youtube.com/watch?v=CnQ9dddBWAk

그는 2020년 배니티페어와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나는 그냥 왕실 사진 뒷줄에 서 있는 고루하고 까다로운 사람일 뿐이지만, 그래도 젊은 세대가 왕실을 너무 빨리 바꾸진 않았으면 좋겠어요. 인생에선 오래 반복되어온 기본과 기초가 중요한 법이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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