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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서소문 포럼

문재인 세계관, 윤석열 세계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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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채병건 기자 중앙일보 콘텐트제작Chief에디터
채병건 국제외교안보 디렉터

채병건 국제외교안보 디렉터

멋진 소설이나 영화엔 사람을 매료시키는 ‘세계관’이 있다. 특히 SF나 판타지 장르에서 그렇다. 예컨대 영화로도 만들어진 프랭크 허버트의 소설 『듄』엔 결코 한두 문장으로 요약이 불가한 거대한 상상력의 세계가 담겨 있다. 스파이스의 행성 아라키스로 시작해 전 우주로 뻗어 나간 인류의 진화가 담겨 있다.

매력적인 세계관엔 나를 둘러싼 세상이 어떻게 구성돼 있는지와, 이런 세상에서 어디로 가야 하는지에 대한 판단이 버무려져 있다.

‘갈라치기’로 실패한 문재인 정부
윤석열 정부의 청사진 아직 흐릿
자리 다투느라 국민과 소통 뒷전
국정 전반 꿰는 밑그림 보여줘야

일러스트 = 김지윤 기자 kim.jeeyoon@joongang.co.kr

일러스트 = 김지윤 기자 kim.jeeyoon@joongang.co.kr

세계관을 실제 ‘현실 세계’를 보는 틀로 활용하면 어떨까. 냉전시대 미·소 대결은 같은 세계관에서 출발한 두 명의 자식들이 성장한 뒤 벌어진 대결이라고 볼 수 있다. 공산주의건 자본주의건 모두 기독교와 봉건제, 산업혁명을 공유했던 유럽이 모태였다. 다만 방향이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론, 정반대로 갈라졌다. 이에 대해 중국이 내건 신형대국관계는 자신들이 천하를 호령했던 수백년 전의 시공간을 현재로 다시 가져오겠다는 얘기다.

세계관은 한국 정치를 바라보는 프리즘으로도 이용할 수 있다. 내가 살고 있는 한국 사회가 어떠한지에 대한 인식과, 그렇다면 우리는 어디로 갈지에 대한 비전을 제시하는 게 정치라는 점에서다.

문재인 정부가 정권 재창출에 실패한 건 근본적으론 진보 진영과 민주당이 그리는 세상이 현실의 난제를 해결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중국과의 거리 좁히기로 미국 중심의 한반도 질서에 ‘균형’을 추구했지만 중국은 한국을 껴안지도, 북핵을 억제하지도 못했다. 아직 중국은 미국을 대신할 나라가 아니다. 북한 비핵화의 대가는 김정은 체제 보장이고, 북한도 이걸 남한이 해 줄 수 있다고 믿지 않으니 결국 미국을 설득했어야 했다.

하지만 미국이 뒷짐을 진 채 남북 협력을 했으니 북한은 천박한 욕설로 끝을 냈다. 소득주도성장도, 부동산정책도 현실 진단에서부터 엇나갔다. 무엇보다 문재인 정부와 민주당은, 악의 세력 다스 베이더에 맞서는 선한 연대라는 영화에서나 가능한 ‘스타워즈적 세계관’이어서 실패했다. 한국 사회를 우리 편과 적폐라는 이분법으로 나눈 뒤 지지층의 분노를 결집해 집권 동력으로 삼았으니 분노를 계속 공급해야 생존하는 세계관이었다.

결국 작용에는 반작용이 따르게 마련이다. 뉴턴의 운동 법칙은 물리학에서만 아니라 인간 사회에서도 작동한다. 적폐로 매도됐던 이들은 정권 재창출만은 막자는 데 결집했고 정권을 바꿨다.

그렇다면 지금 보수 진영의 세계관이 득세해야 하는 데 현실은 결코 그렇지 않다. 윤석열 정부가 어떤 세상을 만들려 하는지를 놓곤 명쾌하지 않다. 국민의힘이 그리는 세상이 무엇인지 떠올리려면 흐릿하다. 그 이유는 국민의힘이 탄핵으로 무너졌던 보수의 세계관을 5년이라는 시간을 보내고도 새롭게 재건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로 인한 결과가 오락가락 정책이다.

과거 ‘잘살아보세’로 구현됐던 보수의 세계관은 안보 위협 속 빈곤과 배고픔을 탈출하는 데서 눈부신 성취를 일궈냈다. 하지만 박근혜 시대를 거치며 한계가 확인됐다. 톱다운 방식의 리더십은 민주주의의 토양인 쌍방향 커뮤니케이션을 소홀히 여긴다. 국민을 상대로 자발적 동의를 얻어내는 메커니즘을 구축하지 않으면 때론 ‘피해호소인’ 류의 상징조작과 ‘전자파 참외’ 같은 선전선동에 극히 취약하다.

그럼에도 문재인 정부의 실패로 집권한 국민의힘은 어떤 나라를 만들지를 국민과 공유하는 데는 관심이 없어 보이고, 내부 정치투쟁에 열일하고 있다. 역시 대통령실에선 고개를 갸우뚱하게 만드는 정책이 느닷없이 나온다. 청와대를 벗어난 건 주로 궁 안에서 통치했던 조선시대 제왕들처럼 ‘청와궁’ 담장 안에서 통치 세력의 담론에 갇혀 세상과 유리된 왕궁형 리더십과 절연하기 위함이었다. 그런데 민심을 묻지도 않고 영빈관 신축이 불쑥 나오니 비판을 자초했다.

사실 최악은 정책 혼선과 여론 설득의 실패를 보완하기 위해 분노 유발 정치에 다시 기대는 것이다. ‘문재인 정부 땐 더했다’는 비교는 과거를 상기하는 효과가 있지만 거기까지다. 지지층이 원하는 건, 국민이 궁금해하는 건 어떤 나라를 만들려는지, 그렇다면 만들 수 있는지다. 윤석열 정부와 국민의힘이 정권교체에 성공한 지 반년이 흘렀다. 이젠 일관성 있는 정책과 여론을 중히 여기는 태도로 지난 정부의 적폐 세계관을 대체할 청사진을 차근차근 보여줄 때가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