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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헨티나 경제난, 열 번째 국가부도 위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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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7면

강남규 기자 중앙일보 국제경제 선임기자
강남규 국제경제 선임기자

강남규 국제경제 선임기자

미국 조지타운대 스테펀 아이히 교수는 정치학자다. 그가 지난 5월 『정치학적 통화(The Currency of Politics)』란 책을 내놓았다. 정치학자가 쓴 화폐이론서라서 서방 매체의 주목을 받았다.

아이히 교수는 최근 기자와 통화하면서 “2008년 금융위기와 요즘 팬데믹을 겪으면서 통화정책이 탈정치화에서 정치화 단계로 재진입하고 있다는 점을 알리고 싶었다”고 말했다. 그날 통화는 길지 않았다. 자세한 이야기는 줌(Zoom) 인터뷰로 하기로 했다.

통화가 끝날 무렵 아이히 교수 입에서는 흥미로운 표현이 튀어나왔다. “포괄적 위기(comprehensive crisis)”란 말이었다. 그는 “아르헨티나 등 최근 위기상황을 보면 단순 경제뿐 아니라 정치·법규 시스템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증상을 보인다”고 진단했다.

1827년 이후 9차례 디폴트 선언
IMF 구제금융도 22차례나 받아
외채 규모가 GDP의 70% 넘어
정치인과 관료집단 무기력 상태

정치·경제 등 ‘포괄적 위기’ 직면

아르헨티나 시민과 노동계는 고물가와 긴축에 저항하고 있다. 사진은 노동총연맹(CGT)이 올해 8월 고물가에 항의해 시위하는 모습. [EPA=연합뉴스]

아르헨티나 시민과 노동계는 고물가와 긴축에 저항하고 있다. 사진은 노동총연맹(CGT)이 올해 8월 고물가에 항의해 시위하는 모습. [EPA=연합뉴스]

실제 요즘 아르헨티나가 ‘포괄적 위기’를 맞아 비틀거린다. 역사상 10번째 국가부도(디폴트)를 향해 가고 있다. 표면적으로는 아르헨티나가 국제통화기금(IMF) 등 채권자들이 요구한 각종 보조금과 복지 예산 삭감 등 재정긴축 등을 제대로 하지 못한 결과다. 현재 보수 정권은 2018년 IMF 구제금융 400억 달러(약 55조6000억원)를 받으며 약속한 재정긴축을 법안으로 만들어 제출했으나 의회가 부결시켰다.

그 바람에 아르헨티나는 IMF 처방 가운데 기준금리 인상에만 매달리는 모양새다. 아르헨티나 중앙은행은 이달 15일 아홉 번째 기준금리 인상을 단행했다. 인상폭은  5.5%포인트(550bp)였다. 그리 놀랄 일은 아니다. 한 달 전인 8월에는 기준금리를 9.5%포인트나 올렸다. 9월 현재 기준금리는 75%다.

미국의 2008년 위기 이후 상황을 담은 『붕괴』를 낸 애덤 투즈 컬럼비아대 교수(경제학)는 기자와 인터뷰할 때마다 “아르헨티나는 근대 경제학의 문제 해결과 설명 능력을 시험하는 나라”라고 말하곤 했다.

실제 아르헨티나 속을 들여다보면, 경제학 교과서에 나온 개혁이 왜 이뤄지지 못하고 있는지가 드러난다. 우선 인구의 40%가 절대빈곤층이다. 정부 보조금이나 복지혜택이 없으면 기아사태 등이 벌어질 수 있다. 긴축 등 개혁을 견딜 체력이 고갈돼 있다. ‘내일 더 큰 빵덩어리를 위해 오늘의 고통을 견딘다’는 사회·정치적 인내심을 기대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그 바람에 정치인이나 관료도 무기력하다. 아이히 교수가 말한 전형적인 ‘포괄적 위기’다.

고평가된 아르헨 페소화

고평가된 아르헨 페소화

위기가 오랜 세월 일상화한 결과다. 국내외 전문가들이 아르헨티나 사태를 이야기할 때마다 “1900년대 초 아르헨티나가 프랑스와 독일보다 부유했다”는 스토리를 빼놓지 않는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1827년과 1890년 두 차례 디폴트를 선언한 전과가 있었다.

그런데 1890년 위기는 서방 금융역사에서 분수령이었다. 아르헨티나 위기를 계기로 ‘대마불사(Too big to fail)’란 말이 금융용어로 자리 잡았다. 아르헨티나가 디폴트를 선언하는 바람에 영국 런던의 투자은행 베어링브러더스(Baring Brothers)가 위기에 빠졌다. 영란은행(BOE)이 앞장서 구제금융 펀드를 조성해 베어링 살리기에 나섰다. 대형 투자은행이 망하면 금융시장 전체가 흔들릴 수 있어서다. 당시 런던 금융가들이 규모가 클수록 망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인수합병(M&A) 등으로 몸집 불리기에 본격적으로 나섰다.

아르헨티나 디폴트는 20세기 이후에도 이어졌다. 7차례나 발생했다. 그런데 구제금융 횟수는 디폴트보다 더 많다. 아르헨티나는 디폴트를 선언한 1956년 IMF에 가입했다. 동시에 구제금융을 받았다. 그리고 올해 상반기 440억 달러까지 모두 22차례 IMF에 손을 벌렸다. 얼추 3년에 한 번씩 구제금융을 받았다. IMF 돈을 빌려 IMF 빚을 갚아온 셈이다.

국제 콩값 올라 실낱 기대도

현재 아르헨티나 외채는 2740억 달러 정도다. 국내총생산은 3840억 달러 수준이다. 외채가 GDP의 70%를 넘는다. 가난한 집에 제사는 어김없이 돌아온다고 했다. 원리금을 갚아야 할 일정이 다가온다. 아르헨티나는 상환 규모와 일정을 조정하기 위해 IMF와 협상해 왔다. 하지만 올해 7월 IMF 등 채권자가 신뢰하는 경제장관 마르틴 구스만이 자국 내 반발 때문에 물러났다. 만기 연장 협상이 중단됐다.

늘 그래왔듯이, IMF는 또다시 만기 연장 등을 해줄 가능성이 크다. 언 발에 오줌 누기다. 아르헨티나가 경상수지 흑자를 만들어 외채를 갚는 게 최선이다. 요즘 아르헨티나 주력 수출품인 콩값이 올라 기대해볼 만하다. 이를 위해서는 아르헨티나와 교역 상대의 물가 차이 등을 고려한 페소화의 실질 가치를 떨어뜨려 수출을 촉진해야 한다.

그런데 올해 실질 가치가 상승하고 있다.(그래픽 참조) 이런 와중에 기준금리마저 올렸다. IMF의 요구사항이다. 물가를 잡기 위한 고육책이기도 하다. 하지만 열 번째 디폴트 가능성을 키우는 조치라는 비판이 제기됐다. 영국 경제분석회사 옥스퍼드 이코노믹스는 “기준금리 인상으로 페소화 가치가 오를 가능성이 크다”며 “그 결과 2023년에 부도가 날 수 있다”고 전망했다. 포괄적 위기 탓에 대응능력도 잃은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