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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김태유의 퍼스펙티브

반도체 초격차 위해 반도체 지원법 조속히 통과시켜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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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4면

초격차 전략은 강소국의 필승 전략

김태유 서울대 명예교수, 리셋 코리아 운영위원

김태유 서울대 명예교수, 리셋 코리아 운영위원

현대 문명의 역사는 기술 패권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영국에서 직물혁명으로 시작된 1차 산업혁명은 팩스 브리태니카(Pax Britannica) 시대를 열었고, 미국에서 기계·화학·전기 등 중화학공업 중심의 2차 산업혁명은 팩스 아메리카나(Pax Americana) 시대를 열었다. 그리고 컴퓨터의 보급과 인터넷 확산으로 시작된 3차 산업혁명은 닷컴 버블의 시련을 넘어 이제 디지털 기술 기반의 4차 산업혁명의 완성을 향해 질주하고 있다. 글로벌 디지털기술, 그 벨류체인의 주도권을 장악한 나라가 글로벌 패권국으로 등극할 것은 의심할 여지 없는 사실이다.

기술 패권을 가장 먼저 인식하고 첨단 기술의 해외 유출을 제도적으로 막기 시작한 것은 최초의 기술 선진국 영국이었다. 기술자의 해외 이민을 금지했고, 조직적인 기술 해외 유출은 국가반역죄와 같은 중대 범죄로 다스려 중형에 처했다. 그러나 농부로 위장한 면직물기계 기술자 새뮤얼 슬레이터의 미국 이민까지 막을 수는 없었다. 슬레이터는 미국에서 산업혁명의 선도자, 공장 체계의 아버지로 추앙받는 반면, 영국에서는 반역자 슬레이터로 매도되었다.

미국이 안보 약속하며 칩4 동맹 제안하는 건 반도체 초격차 때문
미·중이 반도체 기술 따라잡으면 한국은 양측에서 버림받을 수 있어
한국은 잘하는 기술 집중 지원해 더 잘하게 하는 과점 패권 노려야
국회는 반도체법 통과시켜 협치의 국가 발전 모범사례 만들어야

과점 패권으로 부유해진 유럽 강소국들

김태유의 퍼스펙티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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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미국 실리콘밸리에서 태동된 디지털기술은 이민보다는 주로 기업 간 기술 협력을 통하여 국외로 확산된다. 과거 영국에서 미국으로 가는 이민 대열에서 섬유 기술자를 색출해내는 것은 불가능했지만, 이제는 범세계적으로 기업 간 광범위한 협력과 협업에도 불구하고 특허제도와 계약에 의해 첨단 과학기술의 국외 유출은 제도적으로 방지할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 세계무역기구(WTO) 같은 국제기구가 준 사법적 권한과 구속력을 행사하여 서비스와 지적재산권 등의 노하우나 고유 기술을 보호하기 때문이다. 원료·소재·부품·장비·중간재 등 수없이 많은 국가와 기업이 얽히고설킨 국제 분업사회에서 기술 패권에 의한 제재와 고립은 경제적 파멸을 의미한다.

그런데 패권이라고 하면 우리와는 관계없는 먼 나라 이야기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과거 농업사회에서는 패권이란 국토가 크고 인구가 많은 강대국의 전유물이었다. 경제도 전쟁도 모두 인력에 의존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산업사회 최초의 패권국인 영국 국토는 24만㎢로, 한반도만한 섬나라였다. 경제도 전쟁도 모두 산업기술력에 의존하는 산업사회가 도래했기 때문이다.

농업사회에서는 혼자 독차지하는 ‘독점 패권국’만 있었지만, 산업사회에서는 패권을 몇몇 나라가 나누어 갖는 ‘과점 패권국’도 있다. 원천기술부터 응용기술, 설계기술, 생산기술 등 국제적으로 분업화되는 산업기술 벨류체인의 특성 때문이다. 미국·영국 같은 강대국보다는 스웨덴·노르웨이·핀란드 같은 스칸디나비아 3국 혹은 네덜란드·벨기에·룩셈부르크 같은 베네룩스 3국 등의 선진국이 한국의 발전 모델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더 많다. 이런 선진국들이 바로 과점 패권국인 강소국이다.

반도체 초격차가 외교적 힘 가져와

강대국은 나라가 크고 무역 의존도가 낮아 가능한 모든 상품을 국내에서 잘 만들어 써야 한다. 그래서 강대국의 독점 패권 전략은 뒤떨어진 기술 분야를 국가가 골고루 지원해서 모든 분야를 다 잘할 수 있도록 하는 ‘균형발전 전략’이다. 그러나 강소국은 나라가 작고 무역 의존도가 높아 어차피 많은 상품을 수입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잘 만드는 상품을 더 잘 만들어 고가에 수출해야 그만큼 더 좋은 물건을 수입해서 쓸 수 있다. 그래서 강소국의 과점 패권 전략은 잘하는 기술을 국가가 집중 지원해서 더 잘하도록 하는 ‘초격차 전략’이다. 우리가 초격차 기술 전략을 채택해야 하는 이유가 3가지다. 첫째, 국제 경쟁에서 이길 확률이 가장 높다. 둘째, 산업 전후방 효과로 인하여 제2, 제3의 새로운 초격차 기술을 계속 확보해나갈 수 있다. 셋째, 강대국 간의 세력 균형에서 캐스팅보트 같은 조정자로서 외교적 힘을 행사할 수 있다.

한국 삼성과 SK하이닉스의 메모리 반도체와 대만 TSMC의 반도체 파운드리가 초격차 전략의 성공 사례이다. 미국의 극동 방위선 애치슨라인에서 제외되었던 한국과 대만에 미국이 안보를 약속하고 칩4 동맹을 간곡히 제안하는 것은 반도체 초격차 기술 때문이다. 그러나 어느 한순간도 방심할 순 없다. 미국·중국 할 것 없이 모두들 반도체 기술 발전에 국력을 집중하고 있으며 그들이 우리의 초격차를 따라잡는 순간 우리는 양측 모두로부터 버림받게 될 것이다.

초격차 확대 기회 놓치면 안 돼

적자생존이란 냉엄한 생존 법칙이 지배하는 국제사회에서 올바른 전략은 승리의 영광과 행복을, 잘못된 전략은 패배의 치욕과 불행을 초래하게 된다.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번 싸워도 위태롭지 않다’(知彼知己 百戰不殆)고 했는데 균형발전이란 허울 좋은 명분에 빠져 강소국이 강대국의 독점 패권 전략을 그대로 따라해 국가 경쟁력을 상실하는 것은, 마치 체질과 증상에 맞지 않는 약을 처방하여 몸을 망치는 것과 같다. 물론 반도체 기술만이 다른 산업기술보다 월등하게 중요하고 가치 있는 기술은 절대로 아니다. 그러나 반도체 기술이 강소국 한국의 필승 전략이 될 수밖에 없는 이유는 반도체 기술이 현재 우리가 가진 최고의 초격차 기술이기 때문이다.

세계 해전 사상 유례를 찾을 수 없는 이순신 장군의 23전 23승 신화의 진짜 비밀을 아는가. 왕명을 거역하여 삭탈관직에 백의종군까지 불사하면서도 결코 불리한 전투에는 뛰어들지 않은 것이 연전연승의 비결이었다. 이순신은 조선의 소함대로 왜군의 대함대를 대적하는 강소국의 필승 전략을 이미 터득하고 있었다. 지금 유리한 반도체 산업을 더 지원하는 초격차 확대 기회를 놓치는 것은 마치 유리한 한산도(閑山島)나 명량(鳴梁)같은 결정적인 승리의 기회를 놓치는 것과도 같이 돌이킬 수 없는 실수가 될 수 있다.

중국은 물론이고 최근 미국도 520억 달러 규모의 반도체 지원법을 통과시켰다. 지금 당장 여야를 막론하고 국회의원들이 모두 합심하여 ‘반도체 지원법’을 조속히 통과시킴으로써 여야 협치에 의한 국가 발전의 모범사례를 만들어 나가자.

사업보국과 ‘진짜 사나이’

1884년 7월 미국은 조선과의 국교를 사실상 단절한다. 당시 루시우스 푸트 주한 미국 공사의 보고서에서 “사람 머리털과 전복껍질 같은 상품”을 생산하는 조선을 국가로 인정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이것이 훗날 미국이 일본의 조선 지배를 승인한 가쓰라-태프트 밀약의 배경이 된다.

1950년 1월 미국은 극동방위선인 애치슨 라인에 한국을 제외한다. 그리고 5개월 후 북한은 남침을 감행한다. 당시 한천·인삼·해산물·흑연 등을 조금 생산하던 한국을 미국이 피 흘려 지킬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었으리라.

미국은 뒤늦게 한반도의 지정학적 가치를 인정하고, 미군 3만6634명과 한국군 15만여 명의 고귀한 목숨을 희생하여 공산주의의 확산을 차단하고 한국의 자유와 평화를 지켜냈다. 냉전 종식과 중국의 패권 도전으로 인하여 이제 한국의 ‘지정학적 가치’보다는 ‘반도체 등 첨단기술의 가치’가 미국에 더 중요해졌다. 그래서 바이든 미 대통령은 일본보다 한국을 먼저 방문했으며, 첫 방문지도 주한 미군부대가 아닌 삼성전자 반도체 공장이었다.

고 이병철 회장이 1983년 반도체에 사운을 걸겠다는 도쿄선언이 오늘 한국의 안보와 경제적 번영을 수호하고 있는 셈이다. 대만에서는 반도체 회사 TSMC를 호국신산(護國神山)이라고 부른다.

첨단기술일수록 발전 속도가 점점 더 빠르기 마련이다. 오늘 한국의 반도체 기술이 내일도 우리를 지켜줄 것으로 기대할 수는 없다. 방법은 단 하나, 우리 반도체 기술을 더욱 발전시켜 초격차를 지켜나가는 것이다. 그것만이 영원한 적도, 영원한 동지도 없는 냉엄한 국제사회에서 한국의 안보와 경제적 번영을 보장받을 수 있는 최선의 전략이다.

최근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첫째도, 둘째도, 셋째도 기술”이라는 인터뷰 뒤에는 ‘부모형제 나를 믿고 단잠을 이룬다’라는 군가의 후렴이 들릴 듯한 비장함이 느껴진다. 삼성의 사훈 ‘사업보국(事業報國)’이 진짜 사나이의 호국신기(護國神器)로 거듭나고 있는 것이다.

김태유 서울대 명예교수, 리셋 코리아 운영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