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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박현영의 워싱턴 살롱

젠틀 미소로 韓전기차 뒤통수…바이든은 '공손한 트럼프'였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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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박현영 기자 중앙일보 경제에디터
박현영 워싱턴특파원

박현영 워싱턴특파원

"우리는 미래를 건설할 겁니다. 바로 여기 미국에서, 미국인 노동자와, 미국 기업과, 미국산 제품으로 말이죠."

"미국서, 미국산으로 미래 만들자" #북미 제조 전기차에만 세제 혜택 #반도체 등 첨단산업 제조업 장려 #"미래엔 한·미 상호보완 아닐수도"

미국 백악관 사우스론에 모인 관중 수백 명 앞에서 미국 대통령이 마이크를 잡고 이렇게 연설했다. 이 대통령은 누굴까.

‘미국’과 ‘미국인’을 반복적으로 언급한 데서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MAGA)' 또는 '미국 우선주의(America First)'를 주창한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을 떠올리기 쉽지만, 이 연설의 주인공은 조 바이든 현 대통령이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지난 13일 백악관에서 연 인플레이션 감축법 통과 축하 행사에서 참석자들과 사진을 찍고 있다. 로이터=연합뉴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지난 13일 백악관에서 연 인플레이션 감축법 통과 축하 행사에서 참석자들과 사진을 찍고 있다. 로이터=연합뉴스

바이든 대통령은 지난 13일(현지시간) 백악관으로 민주당 정치인과 유권자를 초대해 '2022년 인플레이션 감축법'(IRA) 입법을 축하하는 성대한 잔치를 열었다. 그는 IRA는 "미국에서 만들어질 미래에 관한 것"이라고 강조했다.

IRA는 바이든 대통령과 집권 민주당의 대선 공약과 정치적 정체성을 집대성한 법이다. 서민을 위한 약값 인하, 제조업 일자리 창출, 이산화탄소 배출 감축, 대기업ㆍ부자 세금 인상 등 민주당 핵심 어젠다를 골고루 담았다.

바이든 대통령이 연설에서 "이 법은 미국에서 만든 전기차나 연료전지차를 사면 최대 7500달러까지 세금 공제를 해준다"고 소개하자 박수가 쏟아졌다.

미국·캐나다·멕시코 밖에서 만든 전기차의 세제 혜택 제외는 차별이라며 항의하고 있는 한국 정부 입장은 설 자리가 없어 보이는 장면이 연출됐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 부부와 카멀라 해리스 부통령 부부가 지난 13일 백악관에서 연 인플레이션 감축법 통과 축하 행사에서 인사하고 있다. EPA=연합뉴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 부부와 카멀라 해리스 부통령 부부가 지난 13일 백악관에서 연 인플레이션 감축법 통과 축하 행사에서 인사하고 있다. EPA=연합뉴스

바이든 대통령은 지난해 1월 취임 직후 세계 무대에 "미국이 돌아왔다"고 외치며 트럼프 정부 정책과 단절을 선언했지만, 지금까지 대외·경제 정책을 뜯어보면 트럼프 못지않게 짙은 보호주의 색채를 엿볼 수 있다.

지난해 7월 연방 정부가 공공물자를 조달할 때 미국산 제품을 우선 구매하도록 미국산 부품 비중을 늘리는 '바이 아메리칸(Buy American)' 정책이 대표적이다. 지난해 11월 인프라 법안에는 신규 연방 인프라 건설 사업에 쓰이는 모든 철강은 미국에서 조달돼야 한다고 못 박았다.

연방 정부 인프라 사업이나 공공조달 시장에 국한했던 ‘메이드 인 아메리카’, ‘바이 아메리칸’ 요구는 지난달 의회를 통과하고 발효한 IRA에서 ‘메이드 인 아메리카’ 전기차에만 세제 혜택을 주기로 하면서 민간 소비 시장에까지 확대됐다.

트럼프 정부 정책을 승계해 지금까지 유지하고 있는 대중국 고율 관세도 대표적인 보호무역 장치다. 대선 후보 시절 바이든은 트럼프가 중국 등 경쟁자뿐 아니라 유럽연합(EU)과 한국 등 동맹에 부과한 관세를 "무모하다”, “재앙적”이라고 비판했지만, 지금까지도 관세를 철회하지 않았다.

트럼프 대통령이 탈퇴한 다자간 무역협정인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에 바이든 대통령이 복귀하지 않은 것도 같은 예다. 바이든 대통령은 대신, 상품과 서비스의 시장 개방을 다루지 않는 인도ㆍ태평양 경제 프레임워크(IPEF)를 창설했다.

바이든의 경제ㆍ통상 정책은 대체로 트럼프 정부 기조를 이어가며 미국 우선주의를 취하고 있지만, 다른 점이 있다면 그 태도다. 트럼프 전 대통령의 트레이드 마크였던 단문의 트윗을 통해 24시간 아무 때나 상대에게 모욕감을 주는 식의 ‘서프라이즈’ 정책 발표는 볼 수 없게 됐다.

바이든 대통령은 최대한 예의를 갖추고, 주어진 제도와 소통 채널 안에서 공식적으로 절차를 밟는 스타일을 보여줬다. 이를 제임스 바커스 전 세계무역기구(WTO) 상소기구 의장은 "공손한 보호무역(polite protectionism)"이라고 부른다.

바커스 전 의장은 카토연구소에 게재한 정책분석 보고서에서 "실망스럽게도 바이든은 무역정책에서 실패한 트럼프의 일방주의와 보호무역주의 정책을 대체로 수용했다"면서 "그와 그의 정부는 트럼프의 허풍과 과장을 빼고 정중하게 했지만, 결과는 거의 같다"고 평가했다.

미국이 보호무역과 더 많은 제약을 가하는 적극적 산업정책을 펴고 세계무역기구(WTO) 감독을 받는 다자간 무역체계를 계속 약화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하원의원(플로리다주)을 지낸 민주당원인 바커스 전 의장은 바이든 행정부의 통상 정책은 "트럼프의 '아메리카 퍼스트' 보호주의의 가장 날카로운 모서리를 깎아 만든 것으로, 더 넓은 세상을 외면하는 점은 같되 더 부드럽고 더 세련된 버전"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부드러운 목소리와 미소로 전달하는 공손한 보호무역주의"라고 정의했다.

트럼프 전 대통령이 '미국 우선주의' 기조에서 동맹과도 소원해지며 '나 홀로' '고독한'한 보호주의의 길을 갔다면, 바이든 대통령은 코로나19로 더욱 선명하게 드러난 산업 공급망 교란 대응을 계기로 "같은 생각을 가진(like-minded)" 나라들이 미국을 중심으로 뭉칠 것을 제안한 것도 다른 점이다.

트럼프 행정부가 국내적으로는 '미국 우선주의'를 추진하면서 대외적으로 중국을 견제하는 정책에 시동을 걸었다면, 국제 관계에 밝은 바이든 행정부 수뇌부는 미국이 더 이상 독자적으로 중국의 도전에 맞서기 어렵다는 것을 인정하고 동맹에 손을 내민 것이라는 시각도 있다.

오는 11월 중간선거를 앞두고 바이든 대통령의 '메이드 인 아메리카' 주장은 더욱 강해질 것으로 전망된다. 최근 미국 각지를 돌며 대중 연설을 할 때마다 미국과 미국인에게 유리한 정책을 펴겠다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바이든 대통령의 외교·안보 두뇌인 제이크 설리번 국가안보보좌관이 정권 초부터 강조한 '중산층을 위한 외교'가 구체화하는 모습이다.

여기에는 반도체·전기차·배터리 등 첨단 제조업 일자리를 늘리고, 세제 혜택 등을 통해 미국산을 구매하도록 장려하는 방안이 포함된다. 중국·한국·대만 등 다른 나라들이 반도체 등 제조업이 활발한 것은 국가 주도로 산업을 지원했기 때문이라며 미국도 과거에 했듯이 첨단 산업 육성을 지원하는 산업 정책을 적극적으로 펴겠다고 공언했다.

익명을 원한 전문가는 "지난 수십년간 미국의 기술, 한국의 제조력으로 궁합을 맞춰 온 한·미 경제가 어느 시점에는 상호보완적이 아닐 수도 있다"면서 "한국 정부는 미국에 보호주의적 통상정책이 장기화하는 상황에 대비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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