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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시선2035

경력보유 여성을 아시나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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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정진호 기자 중앙일보 기자
정진호 경제정책팀 기자

정진호 경제정책팀 기자

경력보유 여성이라는 단어를 며칠 전 처음 들었다. 경력단절 여성 대신 쓰는 말이란다. 출산과 육아로 경력이 끊어졌다는 부정적 표현을 피하고, 과거 경력과 함께 육아도 하나의 경력으로 인정해야 한다는 취지다. ‘경단녀’는 당연한 말이 아니었다. 인터넷에서 경력보유 여성을 검색해봤다. 이 단어가 처음 공식적으로 쓰인 건 지난해 11월이다. 당시 성동구는 전국 최초로 경력단절을 경력보유라는 용어로 바꾸고, 경력인정서를 발급하는 조례를 제정했다. 커뮤니티와 트위터 등에서 호응이 쏟아졌다. 이후 국회에선 공식 용어를 경력보유 여성으로 변경하는 내용의 법안이 발의됐다.

처음 아이디어를 낸 건 성동구의 임경지 청년정책자문관이다. 임 자문관은 “단절이라는 말이 가지는 부정적인 의미를 바꿔야겠다고 생각했다”며 “코로나19 확산으로 어린이집·학교 등 돌봄에 공백이 생기면서 30~40대 여성이 직장을 그만두는 경우가 많다는 통계를 봤다. 코로나가 끝나고 다시 일터로 복귀하는 여성에게 도움이 되는 방안을 고민한 결과”라고 말했다. 그는 돌봄을 위해 직장을 그만둔 남성에게도 경력인정서를 발급하기 위해 제도 개편 작업을 하고 있다.

지난 6월 대구의 한 복지센터에서 취업을 희망하는 여성들이 구직상담 순서를 기다리고 있다. [뉴스1]

지난 6월 대구의 한 복지센터에서 취업을 희망하는 여성들이 구직상담 순서를 기다리고 있다. [뉴스1]

아직은 미약하다. 경단녀는 여전히 일상 언어다. 그러는 동안 경력보유 여성은 주변에서도 나오고 있다. 30대 초반에 들어서면서다. 지난해 출산 뒤 회사를 그만두고 최근 구직을 준비하는 A는 이력서에 자녀가 있다는 내용을 적는 족족 면접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는다고 했다. A는 변호사, 전문직인데도 그렇다.

통계로는 더 명확하다. 지난해 15~54세의 기혼 여성 중 경력이 단절된 여성은 144만8000명으로, 전체의 17.4%다. 경력이 중간에 끊긴 사유로는 육아가 42.3%로 절반에 가까웠다. 결혼(27.4%), 임신·출산(22.1%)이 그 뒤를 이었다. 이 때문에 연령대별 여성 고용률을 그래프로 그려보면 30대에 밑으로 꺼진 후 40대에 다시 노동시장에 진입하면서 고용률이 올라가는 M자 형태다.

낙태라는 용어는 어느 날부터 자발적 임신중단 또는 임신중지로 바꿔 쓰기 시작했다. 한자어 ‘떨어질 락(落)’이 윤락·타락 같은 비도덕적 단어와 연결되는 만큼 인공 임신중지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강화한다는 이유에서다. 그 사이 헌법재판소는 여성과 의료진을 처벌하도록 한 낙태죄 조항이 헌법에 합치되지 않는다고 결정 내렸다. 동물권이 강화하면서 애완동물은 반려동물로, 도둑고양이는 길고양이로 쓰기 시작했다. 반려견이란 말은 이제 자연스러운 표현이 됐다.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처럼 말이 달라져서 세상이 바뀐 건지, 세상이 달라져서 말이 바뀐 건지는 알 수 없다. 다만 부정적인 뉘앙스를 고쳐 쓰는 것으로 현실을 조금이나마 바꿀 수 있다면 그 자체로 의미 있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