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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사설

영빈관 신축, 대통령실 수석들도 몰랐다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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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878억 예산 편성’ 보도 하루 만에 백지화

누가 어떻게 밀어붙였는지 꼭 밝혀져야

대통령실이 국빈용 영빈관을 건립하기로 하고 878억6300만원의 사업비를 편성했다가 여론의 비판에 직면하자 취소했다. 경제가 워낙 어려운 만큼 영빈관 추진에 앞서 국민 동의를 구했어야 했다. 고금리·고물가·고환율 등 3고(高) 위기로 민생이 고통받고 있고, 재정 긴축을 추진하는 마당에 거액을 들여 불쑥 영빈관을 신축하겠다니 누가 납득할 수 있겠는가.

추진 과정부터 불투명하고 졸속이었다. 정부 내에서 누가 이런 발상을 기획하고 밀어붙였는지 알려지지 않고 있다. 영빈관 신축은 윤 대통령이 취임 일성으로 밀어붙인 대통령실 용산 이전과 맞물려 있다. 따라서 영빈관 신축이 필요하다고 판단했으면 윤 대통령이 도어스테핑 등을 통해 직접 국민에게 설명하고 여론 수렴 과정을 거쳤어야 했다. 그러나 이 사업은 기획재정부가 국회에 제출한 내년도 국유재산관리기금 예산안에 슬쩍 끼워져 있었을 뿐, 대통령실 수석들조차 잘 몰랐던 것으로 드러났다. 정부가 대통령실 이전비로 책정한 496억원의 2배 가까운 돈이 드는 사업을 왜 예비타당성 조사를 건너뛰고 사전 공론화도 없이 예산에 반영부터 했는지 납득이 가지 않는다. 대통령실은 “용산으로 이전한 뒤 외빈 행사를 치러 보니 경호 비용과 시민 불편이 초래돼 영빈관 신축을 추진했다”고 해명하지만, 이는 윤 대통령이 청와대에서 용산으로 집무실을 옮기겠다고 선언했을 때부터 제기된 우려인 만큼 설득력을 갖지 못한다.

미국 등 선진국엔 초대형 영빈관이란 개념 자체가 없다. 윤 대통령도 취임식과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 방한 공식 만찬을 각각 신라호텔과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소화한 바 있다. 그래놓고 돌연 영빈관 신축을 밀어붙이니 국민이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지 않나. 윤 대통령이 논란이 불거진 지 하루 만에 계획을 접은 것은 만시지탄이나 다행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대선 과정에서 공개된 김건희 여사 녹취록에 “(영빈관을) 옮길 거야”라는 말이 나와 억측이 난무했던 것을 고려할 때 이런 일이 누구에 의해, 어떤 경위로 추진됐는지는 밝혀져야 할 것이다.

‘영빈관 소동’은 윤 정부의 작동 시스템에 문제가 있음을 방증하는 사례의 하나다. ‘만 5세 취학’ 등 설익은 정책을 불쑥 던졌다가 여론의 집중포화를 맞자 부랴부랴 거둬들이는 일이 반복돼 왔다. 정책 컨트롤타워가 돼야 할 대통령실이 제 역할을 하지 못한 결과가 아닌가. 속히 정무와 소통 기능을 정비해 매사를 국민 눈높이에서 바라보고 숙성된 해결책을 제시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윤 대통령이 “국민만 보고 일하겠다”고 아무리 공을 들여도 이런 일 하나로 그간의 공적이 한순간에 무너진다. 이번 사태를 반성하면서 다시 시작한다는 각오로 새 판을 짜야 국정 위기를 돌파할 수 있음을 명심하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