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시설 나온 뒤 영양실조” 자립준비청년 생활고에 ‘좌절’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805호 12면

보호시설 퇴소자들 힘겨운 홀로서기

윤석열 대통령이 13일 충남 아산에서 열린 자립준비청년 간담회에서 발언하고 있다. [연합뉴스]

윤석열 대통령이 13일 충남 아산에서 열린 자립준비청년 간담회에서 발언하고 있다. [연합뉴스]

“보호 시설 퇴소 후 2년은 제 인생에 암흑기였어요. 시설에 가기 전에도, 지금도 안 힘든 건 아니지만 그때는 정말 너무 힘들었어요. 어릴 때부터 하고 싶었던 미술을 배우기 위해 학원비에 생활비까지 감당하려니 돈도 시간도 부족하더라고요. 하루를 2500원짜리 편의점 샌드위치 하나로 버텼어요. 그러던 어느 날 지하철에서 갑자기 앞이 안보였어요. 영양실조로 쓰러진 거죠. 그 때 ‘나는 밥도 안 먹고 사람도 안 만나고 돈만 벌고 공부만 하는데, 단 하루도 쉬지 못하는데, 왜 나는 안 되지? 내 인생은 왜 이러지?’ 싶었어요.”

지난 3일 어느새 보호 종료 8년차가 된 이가영(25·가명)씨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꿈을 이루기 위해 홀트아동복지회로부터 교육비 및 생계비를 지원받아 대학 입시를 준비하고 있다고 밝힌 그녀의 당찬 모습 뒤로 그간의 처절함이 느껴졌다. 이씨는 중학생 때부터 고등학생 때까지 보육원과 공동생활가정에서 ‘보호아동’으로 생활했다. 보호아동은 보호자가 없거나 보호자가 양육할 수 없는 환경에 있어 아동복지시설에서 양육하는 아동이다. 이씨는 알코올 중독 아버지의 잦은 폭력을 피해 보육원에 들어갔다. 그가 고등학교 졸업 직후 만 17세의 어린 나이에 ‘자립준비청년’이 된 배경이다.

자립준비청년은 이씨처럼 보육원·공동생활가정·위탁가정 등 시설에서 살다 독립한 청년을 일컫는 말이다. 보호아동은 국가가 정한 보호 종료 연령인 만18세에 시설에서 나와 독립해야 한다. 지난 6월부터는 본인 의사에 따라 만 24세까지 보호 기간을 연장할 수 있지만, 아직 만18세에 나오는 청년이 상당수다. 2017년부터 2021년까지 지난 5년간 사회에 나온 자립준비청년은 1만2256명으로, 매년 약 2500명에 달한다. 지난해 홀로서기에 나선 자립준비청년 2102명 중 863명(41.1%)이 만18세 만기 퇴소자다. 연장종료로 나온 청년은 1239명(58.9%)에 그쳤다.

6월부터 24세까지 보호기간 연장 가능

시설을 나선 상당수 자립준비청년이 처음 느끼는 감정은 ‘기대감’이다. 이씨 역시 “처음에는 드디어 나만의 공간을 가질 수 있다는 생각에 좀 들떴다”고 회상했다. 단체 생활로 인한 엄격한 규칙에서 벗어날 수 있고, 독립된 공간에서 자유를 누릴 수 있는 첫 기회였기 때문이다. 아동복지시설은 각 보호아동의 성격과 개성이 존중받기 힘든 곳이다. 시설마다 다르지만 학원을 다니지 않는 고등학생의 통금을 오후 7시30분으로 제한하는 곳도 있다. 한 달 용돈도 너무 적어 친구들과 놀기 어렵다. 6년전 보육원에서 퇴소한 안지안(24)씨가 고등학생 때 받은 월 용돈은 3만원에 불과했다. 지난해 공동생활가정에서 자립한 대학생 제찬영(20)씨의 고등학생 용돈도 월 3만원이었다. 하교 후 아이스크림 하나 사 먹기 힘든 금액이다.

그래픽=양유정 yang.yujeong@joongang.co.kr

그래픽=양유정 yang.yujeong@joongang.co.kr

하지만 이런 기대감은 금방 ‘걱정’과 ‘좌절’로 뒤바뀐다. 어떻게 살아야할 지, 각종 비용은 어떻게 충당할 지 막막해지기 때문이다. 최근 광주에서 자립준비청년 두 명이 잇따라 극단적 선택을 한  것도 생활고에 시달린 결과로 알려졌다. 지난 18일 새내기 대학생 A군은 금전 문제를 고민하다 세상을 등졌다. 보호 연장 후 기숙사에서 생활하던 A군은 본인 명의로 모인 후원금의 상당수를 기숙사비, 생활비로 사용한 후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았던 것으로 밝혀졌다. 지난 24일엔 보육원 출신 B양이 아파트에서 숨진채 발견됐다. B양은 지적장애가 있는 부모와 함께 기초생활수급비를 받으며 어렵게 생활한 것으로 알려졌다. B양은 유서에 “살아온 삶이 너무 가혹하다”는 말을 남겼다.

지난 13일 윤석열 대통령이 보호종료 후 홀로서기를 앞둔 자립준비청년을 직접 만난 것은 이런 상황을 개선하기 위해서다. 이날 윤 대통령은 충남 아산시에 위치한 충남자립지원전담기관을 방문하고, 자립준비청년 및 전담기관 관계자들과의 간담회에 참여했다. 윤 대통령은 “그간 방침은 18살이 되면 별 준비 없이 돈 500만원 쥐여주고 ‘사회에 나가 알아서 살아라’였다”며 “소식이 끊겨 관리도 안되니 사회에 정상적으로 적응할 수 없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어 “경제적 여건이 어려워 긴축재정을 한다고 해도 이런 부분에 대해서는 쓸 돈은 쓰겠다”며 “청년들의 미래 준비를 위해 정부가 노력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현재 자립준비청년은 500만~1500만원의 자립지원금(지방자치단체마다 다름)과 5년간 매달 35만원의 자립수당을 받을 수 있다. 퇴소 후 5년 이내에 시세보다 낮은 월세로 LH임대주택을 구할 수 있고, 심리상담도 받을 수 있다. 그러나 현 정책만으로는 퇴소 후 일하지 않으면 굶어야 하는 상황이다. 당장 거주 문제를 해결하기도 벅차기 때문이다. 자립준비청년의 47.9%가 살고 있는 임대주택의 경우 매입임대는 월세 부담이, 전세임대는 이자 부담이 크다. 지난해 9월에 발표된 서울 LH매입임대의 임대료는 보증금 100만원에 월세 24만원 수준이었다. 자립수당(월35만원)으로 월세와 공과금 등을 납부하고, 기초생활수급비로 근근히 먹고 사는 정도다. 보증금이 있는 월세집에 머물고 있는 청년들(18.8%)의 부담은 더 크다. 최근 1년간 질병이 있었던 자립준비청년이 끝까지 치료하지 못한 가장 큰 이유는 ‘치료비가 없어서’(37.7%)였다.

안내 체계가 미흡해 각종 지원 정책을 활용하는 자립준비청년은 손에 꼽을 정도다. 이씨만 해도 빠른년생이라 고등학교 졸업 후 시설에 1년은 더 있을 수 있었는데, 아무도 알려주는 사람이 없어 만 17세에 나왔다. 퇴소 후 시설이나 사회복지사에게 한번도 연락을 받은 적이 없다. 500만원이 ‘자립정착금’인 것도, 일회성인 것도 안내를 받지 못했다. 임대주택을 재계약할 수 있다는 사실도 몰라 2년 뒤 월세로 옮기면서 생활비 부담은 더 커졌다. 퇴소한 지 1년8개월이 된 제찬영(20)씨 역시 “주변에 물어볼 어른이 없어 퇴소 후 인천시에서 주는 자립정착금이 800만원인 것도 인터넷을 뒤져보고 가까스레 알아냈다”고 말했다. 학창 시절 부모님을 여의고 성인인 누나에게 가정위탁이 되어 함께 산 황현준(24)씨는 시설에 머물지 않아 따로 알고 있는 시설 관계자도, 사회복지사도 없었다. 가정위탁센터에서도 도움이 되는 정보나 연락을 받지 못했다.

그래픽=이정권 기자 gaga@joongang.co.kr

그래픽=이정권 기자 gaga@joongang.co.kr

더 능동적으로 자립준비청년을 보듬는 시스템이 필요하다. 시설에 살며 ‘시키는 대로’가 체화된 많은 자립준비청년들은 수동적인 삶을 살다 퇴소 후 능동적인 삶을 살아야 하는 것에 적응하기 힘들다. 연락을 두절하거나 삶의 의지를 잃고 무기력에 빠진 사례가 부지기수기인 이유다. 제씨는 “마음의 문을 닫은 채 은둔 생활을 하는 친구들이 많다”며 “당장 어제도 죽고싶다는 연락을 받았다”고 말했다. 실제로 자립준비청년의 50%는 ‘죽고 싶다는 생각이 든 적이 있다’고 밝혔다.

자립준비청년 지원 정책의 근본적인 문제점은 인력 부족이다. 최소 7명 이상의 아동을 돌보고 있는 시설 관계자는 눈앞에 있는 아이들을 돌보기 바빠 새로운 지원 정책을 접하기 어렵다. 자립지원전담기관 및 인력도 부족하다. 자립지원전담기관은 현재 전국 12개 지자체에서 전국 17개 시도로 확대 설치될 예정이지만, 추가로 확충될 전담인력은 120명에 불과하다. 국회 입법조사처가 지난해 4월에 발간한 보고서에 따르면 2020년 기준 전국 자립지원전담요원은 267명이었지만 이들이 돌봐야 하는 청소년의 수는 2만2807명에 달했다. 1명이 85.4명을 담당하는 셈이다. 퇴소 후 5년 미만 자립준비청년들을 대상으로 연 1회 이상 자립 수준을 확인하고 있지만, 형식에 불과하다는 목소리가 나오는 배경이다. “전화 받았어요. 딱 한 번이요. 5분도 안 하고 끝났어요. 힘든 거 있으면 전화하라기에 뭐 좀 물어보려고 전화했는데 안 받더라고요.” 제찬영씨의 경험담이다.

정보·경험 공유할 커뮤니티 구축도 과제

자립준비청년 출신 선배들은 금전적 지원과 더불어 ‘멘토의 존재’와 ‘심리적 지원’을 강조했다. 자립준비청년협회 주우진 대표는 “퇴소 후 좌절감이 들었을 때 학창시절 알고 있던 멘토분들의 응원이 큰 힘이 됐다”며 “개인의 의지도 중요하지만 나의 존재를 알고 응원해주는 멘토가 있다는 게 마치 가족이 생긴 것 같은 기분이었다”고 밝혔다. 이어서 그는 “광주 사례도 단순히 경제적인 문제가 아닐 수 있다”며 “정서적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을 때 도움을 청할 수 있는 멘토가 있었다면 결과가 달라졌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조윤환 고아권익연대 대표 역시 심리적 지원이 절실하다고 주장했다. 그는 “가족이 없는 우리 아이들에게 삶의 의지를 고취시키고, 동기를 부여할 수 있는 더 적극적인 정서적 지원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자립준비청년들이 언제든 정보를 공유하고, 자신의 경험을 털어놓을 수 있는 커뮤니티 구축도 주요 과제다. 현재  정부차원에서 운영하는 자립준비청년 커뮤니티가 없어 보호종료아동을 위한 커뮤니티 케어센터, 자립준비청년협회, 홀트아동복지회 등 자립준비청년을 지원하는 민간단체에서 이들을 위한 커뮤니티 구축에 힘쓰고 있다. 케어센터에서 활동하며 출간을 준비하고 있는 선배 자립준비청년 안지안씨는 이 기사를 접할 자립준비청년에게 이런 말을 남겼다. “힘내, 이런건 너무 뻔한 말이겠죠? 너무 혼자 뭔가를 해결하려고 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우리 같은 자립준비청년들을 도와주는 사람들이 많으니 조금 용기를 내서 꼭 연락했으면 좋겠어요.”

ADVERTISEMENT
ADVERTISEMENT
ADVERTISEMENT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