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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터 프리즘] 환율 무대응이 능사인가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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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5호 30면

황정일 경제산업에디터

황정일 경제산업에디터

킹(King)달러의 시대. ‘강(强)달러’라는 표현이 하나둘씩 ‘킹달러’로 바뀌고 있다. 최근 달러의 위세를 보면 그럴 만도 하다. 달러 대비 주요국의 통화 가치는 연일 곤두박질치고 있다. 원화 가치도 마찬가지다. 원화 가치는 15일 1393.7원까지 떨어졌다. 13년 5개월여 만에 1390원 선이 무너졌다.

킹달러 시대의 역사는 잔인한 교훈을 남겼다. 달러 강세는 1997년 한국을 비롯해 아시아를 외환위기로 몰아넣었고, 이듬해에는 러시아의 금융위기를 초래했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스리랑카는 디폴트를 선언하고 국제통화기금(IMF)과 30억 달러 규모의 구제금융 협상을 진행 중이다. 파키스탄과 방글라데시도 IMF에 구제금융을 요청한 상태다. 달러 강세와 신흥국들의 도미노 부도가 맞물리면 우리 금융 시장도 안심할 수 없다.

킹달러 공포 전방위로 확산
통화스와프 강력 추진해야

하지만 정부와 한은의 입장은 “경각심을 갖고 모니터링하겠다”(추경호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는 수준에 머물고 있다. 과거 정부가 환율에 기민하게 대응하던 것을 고려하면 사실상 무대응에 가깝다. 외환보유고가 5일 기준 4364억3000만 달러에 이르고, 대외건전성 지표가 안정적이기 때문이다. 외환보유고는 규모만 놓고 보면 세계 9위권으로, 1997년 외환위기 때인 204억 달러에 비하면 20배 넘는다. 2008년 금융위기에 비하면 2배 이상 많다. 언제든 달러를 풀어 시장 안정 조치를 취하는 데 전혀 부족하지 않다고 판단하는 것이다.

한국경제의 기초 체력도 과거 위기 때와는 차이가 있는 게 사실이다. 원화 가치가 많이 내렸지만 국가신용 위험도 지표인 신용부도스와프(CDS) 프리미엄은 7월 이후 하락세다. 경상수지 역시 상반기 기준 248억 달러 흑자를 기록하는 등 여전히 양호한 수준을 보이고 있다. 그러다 보니 정부는 오히려 과민하게 반응해 외환보유고를 필요 이상 늘리면 기회비용이 커져 부작용이 발생할 수 있다고 경고한다. 한은은 최근 “외환보유고의 적정 규모는 장기적이고 동태(動態)적 관점에서 평가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정부의 입장이나 한은의 설명은 틀리지 않는다. 하지만 최근의 원화 가치 하락세가 시장에 미치는 영향은 공포 그 자체다. 금융시장은 말할 것도 없고 원자재나 중간재를 수입해야 하는 기업의 선물환(일정한 시세로 달러·위원화 등을 매매) 문의가 늘고 있다. 수입물가가 치솟으면서 인플레이션도 끝이 보이지 않는다. 공포가 확산하면 이성이 마비된다. 냉철한 판단이나 사실을 보는 노력 대신 일단 남들과 같은 행동을 해야 편안함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는 별것 아닌 거 같았던 작은 불씨에 경제 전체가 혼란에 빠져들 수 있다.

‘지표’나 ‘사실’에 기인한 냉철한 분석도 중요하지만, 막연한 공포를 잠재울 ‘한 방’이 필요한 시점이다. 정부는 확인을 안 해 주고 있지만, 15일 외환시장에 이른바 ‘도시락 폭탄’(점심시간에 달러 집중 매도)을 던져 달러당 1400원이 깨지는 것을 막은 것도 이 같은 맥락일 것이다. 그러려면 한·미 통화스와프 같은 좀 더 확실한 게 필요하다. “현 상황에서 통화스와프로 달러 강세를 막을 수 있다는 것은 오해”(이창용 한은 총재)라고 하더라도, 과거 사례를 돌이켜보면 적어도 최악의 상황에서 안전판 역할은 할 수 있으니 정부는 주요국과의 통화스와프 체결에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

지난 5월 21일 한·미 정상회담 때 발표한 ‘통화협력체계 구축’도 이제는 구체적인 무엇인가를 내놔야 할 시점이다. 당시 한·미 정상이 “양국은 질서 있고 잘 작동하는 외환시장을 위해 더 긴밀히 협의해 나가겠다”고 발표하면서 통화스와프보다 더 확실한 보험이라는 평가가 많았지만, 넉 달이 지나도록 소식이 없다. 최근의 원화 가치 하락은 킹달러로 인한 세계적인 추세이긴 하나, 이것이 정부가 손 놓고 있을 이유가 될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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