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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 파일] 상경 전쟁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805호 31면

김나윤 정치부문 기자

김나윤 정치부문 기자

최근 오래간만에 고등학교 동창과 저녁 식사를 했다. 이름만 들으면 알 만한 지방의 공기업에 재직 중인 그는 식당에 들어서면서 “하마터면 이번 주말에 서울 못 올 뻔했다”고 이야기를 털어놓기 시작했다. 친구는 매주 월요일이 되면 잊지 않고 서울행 KTX 승차권을 예매한다. 근무는 지방에서 하고 있지만 주말 여가 생활은 여전히 서울에서 보내고 있기 때문이다. 바쁜 일정 탓에 시기를 놓쳐 고작 하루 늦게 기차표를 알아보니 서울로 가는 금요일 황금 시간대 좌석이 이미 동이나 간신히 입석으로 왔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정부의 지역균형발전 정책에 따라 공공기관·공기업이 일제히 지방으로 이전하면서 그의 직장 동료들 역시 서울과 근무지를 오가며 수년째 매주 기차표 예표에 매달리고 있다. 그는 “지방을 살리려는 정책 취지는 사라지고 애꿎은 직장인들이 돈과 시간만 허비하고 있다”고 하소연했다.

정부도 이러한 사정을 전혀 모르는 것은 아니다. 최근 이상민 행정안전부 장관은 한 매체와 인터뷰에서 공공기관 이전만으로 수도권 과밀화 현상을 실질적으로 분산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고 공감하면서도 그 대안으로 “젊은이들이 지방으로 가려면 결국 대기업이 내려가야 한다”며 민간 기업 이전을 제시했다. 이어 이 장관은 “20대 대기업의 본사나 공장, 서울대·연세대·고려대 등 주목을 끌 만한 주요 대학과 특목고를 함께 내려보내야 효과가 있다고 생각한다”며 실효성에 대해 다소 의문이 드는 답변을 불쑥 내놓기도 했다.

KTX 열차를 이용하는 승객들. [연합뉴스]

KTX 열차를 이용하는 승객들. [연합뉴스]

지방 소멸을 막기 위한 국가 대책은 과거부터 진보·보수 정권의 구분 없이 대부분 일자리 이주 방식에 집중됐다. 때론 권력의 힘을 빌려 각 지역에 공기업을 ‘강제적으로’ 분산 배치하거나 세금 감면, 주거 지원 등 각종 혜택을 제공해 민간 기업이 ‘자발적으로’ 이전하도록 했다. 심지어 회사 이전으로 지방 근무를 마지못해 해야 하는 직장인이 해당 지역으로 전입신고를 하면 수당을 지급하는 사례도 있었다. 젊은이들이 경제생활을 유지할 수 있는 일터가 지방에 있어야 지방 도시가 살아난다는 발상에서 출발한 정책들이다.

이러한 정책들의 옳고 그름이나 효능을 평가하려는 것은 아니다. 지방행 기차를 타기 싫어하는 직장인들을 향해 이기적이라고 지적할 마음은 더더군다나 없다. 다만 수도권 대 지방 구도 속에서 인구와 일자리 나눠먹기식 정책만으로는 오늘날 직면한 지방 위기 문제를 더는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없다. 이미 수도권과 지방은 체급과 체질이 달라질 대로 달라진 상태다. 사라져 가는 지방 도시를 획일적으로 확장하는 데 몰두하기보단 지방 군소도시들이 스스로 버틸 수 있는 새로운 도시 설계 정책이 필요한 시기다.

‘지방 시대’를 강조한 윤석열 정부에선 새로운 지방 정책을 경험할 수 있을까. 지난 14일 정부는 지방시대위원회 출범을 위한 특별법 입법을 예고했다. 기존 대통령 소속 자치분권위원회와 국가균형발전위원회에 대한 각각의 근거 법령을 하나로 통합한다는 내용이다. 지방 문제를 국정과제로 삼으면서 지역 균형발전과 지방 분권을 아우르는 통합적 추진 체계를 마련하겠다는 취지다. 하지만 지방시대위원회 기능은 여전히 대통령 자문위 역할에 그친다. 비수도권 지자체들 사이에서 이대로라면 균형발전 정책에 대한 추진 동력을 만들기 어렵다는 우려가 제기되는 이유다. ‘국민 누구나 어디에 살든 공정한 기회를 누리고 골고루 잘 사는 지방 시대’를 내건 지방시대위원회가 시작부터 순탄치 않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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