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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도주 빛 바다’ 항해 오디세우스, ‘빨간 물’ 이용 거인 퇴치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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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5호 22면

와글와글 

수니온 곶의 포세이돈 신전과 포도주색 바다. [사진 손관승]

수니온 곶의 포세이돈 신전과 포도주색 바다. [사진 손관승]

폭염과 폭우, 코로나19로 어지러웠던 지난 여름, 호메로스의 『오디세이아』를 읽으며 버텼다. 아무리 서양 최고의 고전이라지만 그냥 읽으면 몇 페이지 넘기지 못하고 주저앉게 되는 책이지만, 포도주를 마시며 포도주라는 관점으로 읽었더니 뜻밖에도 술술 읽혔다. 『오디세이아』에 묘사된 한 장면을 읽어보자. “나는 방금 전우들과 함께 배를 타고 이리로 왔는데 다른 말을 쓰는 사람들을 향해 포도주 빛 바다 위를 항해하는 중이었소.”

‘포도주 빛 바다’라는 표현은 『일리아드』에 5번, 『오디세이아』에 12번 등장한다. ‘이른 아침에 태어난 장밋빛 손가락을 가진 새벽의 여신’이란 표현과 함께 호메로스적인 관용어로 유명하다. 영어로는 ‘wine-dark’라 번역이 되는 포도주처럼 검붉은 바다는 도대체 어떤 모습일까? 오래전 아테네 인근에 있는 수니온곶을 방문했다가 비로소 알게 되었다. 그곳에는 포세이돈을 기리는 웅장한 신전이 우뚝 서 있고 석양이 지는 아름다운 모습을 보기 위해 많은 이들이 몰려들었다. 포세이돈은 오디세우스가 트로이 전쟁이 끝난 뒤에도 귀향하지 못하고 10년 동안 방랑을 하게 만들었던 심술쟁이 바다의 신이다. 고대 그리스의 신들은 인간처럼 질투하고 경쟁하며 바람을 피우고 욕망하는 재미있는 존재들이었다.

고대 그리스인, 바다·와인 두 액체 중시

거인 폴리페모스에게 진한 포도주잔을 권하는 오디세우스. [사진 손관승]

거인 폴리페모스에게 진한 포도주잔을 권하는 오디세우스. [사진 손관승]

포세이돈 신전 앞의 바다는 시시각각 변하더니 호메로스가 예찬한 것처럼 ‘포도주 빛’이 되었다. 이제는 돌기둥만 남은 포세이돈 신전의 자취와 어울려 그 어떤 교향곡보다 장엄하고, 그 어떤 예술작품보다 아름다운 풍경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무한한 상상력을 제공하는 신비로운 공간이다. 시인의 상상력은 곧 그가 몸담은 자연환경과 생활문화의 반영이었다. 정말이지 그리스의 매력을 알려면 육지가 아닌 바다와 섬으로 시선을 돌려야 한다.

고대 그리스인들에게 두 개의 액체가 중요했다. 그 하나는 바다를 새로운 영토와 시장 개척을 위해 건너가는 ‘액체로 이뤄진 다리’로 인식했다는 점이다. 좁게는 에게해, 넓게는 지중해가 그들의 영역이었다. 호메로스가 남긴 두 개의 책은 거친 바다를 건너 낯선 땅을 찾아 모험을 떠난 영웅들의 진취성에 대한 찬가이다. 물론 당하는 측에서는 침략이고 약탈이었다. 바다와 항해는 이후 인생과 운명을 의미하는 비유로 서양 인문학에 자주 인용된다.

고대 그리스 시대 포도주 희석용기인 크라테르. [사진 손관승]

고대 그리스 시대 포도주 희석용기인 크라테르. [사진 손관승]

두 번째 액체는 영웅들이 즐겨 마시는 ‘빨간 물’ 포도주다. 『오디세이아』는 바다와 포도주라는 두 개의 ‘액체 문명’에 대한 예찬이다. 오디세우스의 아들 텔레마코스가 아버지의 행적을 찾아 나설 때, 어김없이 포도주는 등장한다. 부친의 귀중한 물품을 보관하고 있던 창고에는 황금과 청동, 옷, 향기로운 올리브유와 함께 ‘오래되어 달콤한 포도주’가 있었다. 아버지가 돌아올 날을 위해 ‘물을 타지 않은 신성한 음료’는 남겨두고 본인은 그다음 것을 가져가겠다고 주장한다. 최상급 와인은 곧 가장의 권위와 존경을 의미한다. 와인은 신이나 죽은 사람들에게 제물을 바칠 때 헌주로 자주 이용된다. “꿀처럼 달콤한 포도주가 든 잔을 건네 그도 헌주하게 하시오.” 종교적 의미의 포도주는 로마 시대 기독교를 국교로 받아들이면서 유럽의 술, 더 나아가 최초의 글로벌 음료가 된다.

바다, 시장 개척 위한 ‘액체 다리’로 인식

거인 폴리페모스에 맞선 오디세우스 일행. [사진 손관승]

거인 폴리페모스에 맞선 오디세우스 일행. [사진 손관승]

포도주는 핑크빛 유혹의 키워드이기도 하다. 대리석처럼 몸매가 풍성하고 마술에 능한 요정 키르케가 오디세우스 일행에게 내놓은 것은 치즈, 보릿가루, 노란색 꿀과 더불어 프람네 산(産) 포도주였다. 그런데 포도주 안에 해로운 약도 함께 넣음으로써 오디세우스의 부하들이 고향을 완전히 잊게 만들고, 마술을 부려 돼지우리에 가둬버린다. 프람네 산 포도주란 소아시아 앞바다에 있는 이카리아 혹은 이카로스 섬에 있는 프람네 산(山)에서 생산된 포도주라고 한다. 여신들 가운데 고귀한 칼립소가 오디세우스를 유혹할 때나 시간이 지나 먼 길을 떠날 때 이별의 선물로 챙겨준 것 역시 포도주였다. “향기로운 뗏목 안에 가죽 부대 두 개를 넣어주었는데 그중 하나는 검은 포도주가 든 것이었고, 큰 것은 물이 든 것이었다.” ‘빵과 포도주’란 표현은 먼 길을 떠나는 자의 생명 양식을 가리킨다.

오디세우스를 수식하는 많은 말 가운데 ‘참을성 많은’이라는 표현이 자주 등장하는데, 리더의 덕목인 인내심이다. 그의 참을성과 지략을 강조하는 에피소드에서도 포도주는 언급된다. 무법자들이며 거인들인 키클롭스의 영역에 들어갔다가 외눈박이 거인 폴리페모스의 동굴에서 빠져나올 때 위기 탈출의 도구로 이용한 것도 포도주였다. “나는 세 번이나 그자에게 포도주를 주고, 그자는 어리석게도 세 번이나 그것을 받아 마셨소.”

이 외눈박이 거인은 과음으로 자다가 토하게 되는데, 도대체 어떤 술을 마셨기에 그런 걸까? 오디세우스는 ‘손잡이가 둘 달린 항아리에 포도주를 한껏 퍼왔다’고 했던 트라케 산 포도주를 가져왔다. 호메로스는 그 술을 가리켜 ‘암브로시아요 넥타르’라고 표현했으니 곧 신들이 마시던 음료라는 뜻이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포도주를 ‘크라테르’란 도기에 넣어 물이나 다른 음료와 희석한 뒤 마셨다. 포도주와 물의 비율은 초기에는 1:3, 후기에는 2:3 정도 되었는데, 이 포도주의 경우 보통 1:20으로 마셨다고 함은 그만큼 알코올 함량이 높았다는 뜻이다. 거대한 악과 맞선 주인공은 힘이 아닌 포도주를 이용한 꾀로 승리를 거둔다.

천신만고 끝에 고향 이타카에 돌아왔을 때 악당들 무리가 날마다 집에서 소와 양을 잡아 잔치를 벌이며 오디세우스의 ‘반짝이는 포도주’를 축내고 있었다. 포도주는 그가 반드시 지켜야 할 고향과 집의 상징이었다. 이처럼 포도주는 『오디세이아』의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동행하고 있으니, 와인과 글의 만남인 ‘와글와글’의 가장 오래된 고전인 셈이다. 자, 이제 와인 한 잔하며 다시 읽어보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은가?

손관승 인문여행작가 ceonomad@gmail.com MBC 베를린특파원과 iMBC 대표이사 를 지냈으며, 『리더를 위한 하멜 오디세이아』, 『괴테와 함께한 이탈리아 여행』 등 여러 책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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