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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최악의 원전사고는 '디자인'도 치명적이었다[BOOK]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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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저 프렌들리
클리프 쿠앙·로버트 패브리칸트 지음
정수영 옮김
청림출판

‘사용자 친화적인’이란 뜻의 ‘유저 프렌들리(user friendly)’는 이제 상식이 됐다. 걸음마를 배우는 아이들도 직관적으로 보기만 하면 조작할 수 있게 만든 애플의 아이폰 신화는 지금은 누구나 따라 하고 있고, 또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되는 당연한 ‘유저 프렌들리 룰’이 됐다.

 구글 수석디자이너인 클리프 쿠앙과 달버그 디자인 공동창업자인 로버트 패브리칸트가 『유저 프렌들리』라는 제목의 영어판을 처음 출간한 시기인 2019년에도 이런 사정은 거의 비슷했을 것이다. 그런데 왜 그렇게 ‘흔해 빠진’ 개념을 책 제목으로 선택했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 그건 아마도 누구나 잘 안다고 생각하는 ‘사용자 친화성’의 역사적 배경이나 깊은 의미, 세세한 작용에 대해 정작  많은 사람이 실제로는 거의 모르거나 파편적으로만 알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필자들이 이 책을 쓰기 위해 인터뷰한 전문가만 해도 100명이 넘는다고 한다.

스리마일섬 원자력 발전소 냉각탑(1978). 책 '유저 프렌들리'에 실린 도판. ⓒ Chris Allen/청림출판 제공

스리마일섬 원자력 발전소 냉각탑(1978). 책 '유저 프렌들리'에 실린 도판. ⓒ Chris Allen/청림출판 제공

 지은이들은 유저 프렌들리 원칙이 왜 필수가 돼야 하는지를 설명하기 위해 1979년 3월 28일 발생한 미국 펜실베이니아주 스리마일섬 원전 사고의 예를 든다. 지하실 배관이 막히면서 일어난 고장은 결국 냉각장치 파열과 노심용융으로 이어져 미국 역사상 최악의 원전 사고로 기록됐다. 당시 발전소 제어실에는 1100개의 다이얼과 게이지, 스위치 상태 표시등과 600개가 넘는 경고등이 설치돼 있었다. 동시다발적으로 울리는 경고음과 경고등 때문에 핵심 문제를 찾기가 어려운 구조였다. 디자인이나 설계의 잘못이 단지 모양이나 기능을 나쁘게 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자칫하다가는 치명적인 사고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것을 확실히 보여준 사건이 아닐 수 없다. 2019년 파리 노트르담 대성당 화재도 첨단 화재 진압 시스템을 이해하기 어려운 조작부와 결합한 디자인 오류에서 그 원인의 하나를 찾을 수 있다.

 이 책은 ‘유저 프렌들리’한 디자인이 얼마나 우리의 실생활과 산업에 큰 영향을 미치는지에 대해 다양한 사례를 인용해 꼼꼼하게 지적하고 안내한다.

2006년 당시 애플을 이끌던 스티브 잡스가 아이팟 나노를 소개하는 모습. [로이터=연합뉴스]

2006년 당시 애플을 이끌던 스티브 잡스가 아이팟 나노를 소개하는 모습. [로이터=연합뉴스]

 할런 크라우더는 1972년 ‘사용자 친화적’이라는 단어를 최초로 컴퓨터에 사용한 사람 중 한 명이다. 그런데 이 개념을 이어받아 사용자 친화적인 세상을 창조해 나간 기업은 크라우더가 다녔던 IBM이 아니라 애플이었다. 애플은 1984년 책상(데스크톱)과 창(윈도) 등 익숙한 은유를 매개로 일반인의 구미에 맞게 만든 매킨토시 컴퓨터를 내놓아 디지털 세상의 지형을 바꿔 놓았다.

 ‘사용자 경험(User-Experience, UX)’이라는 용어를 처음 만든 도널드 노먼은 『디자인과 인간 심리』(1988)라는 책에서 문고리부터 온도조절계까지 일상의 여러 물건이 사람들을 실망시키는 사례들을 분석했다. 정년을 앞두고 애플의 설득으로 다시 일하게 된 노먼은 ‘사용자 경험 전문가’ 패널을 꾸리고 제품 디자이너 조니 아이브가 ‘유저 프렌들리’의 대표 상품이라고 할 수 있는 아이팟, 아이맥, 아이폰을 디자인할 수 있게 지원했다.

 사용자 친화적인 세상에서는 사용자 인터페이스 하나로 제국이 하나씩 세워진다. IBM은 펀치카드 방식의 메인프레임 컴퓨터로 1970년대까지 세계를 호령했다. 스티브 잡스의 복귀 후 애플의 회생을 이끈 일등공신은 아이팟의 클릭휠이었다. 키보드가 붙은 휴대폰 블랙베리 역시 아이폰이 지배하기 전까지 큰 제국을 이루었다. 아마존의 급성장도 사용자 인터페이스에서 비롯됐다. 바로 원클릭 구매 기능이다. 이 기능으로 온라인 구매의 마지막 결제 단계를 없애 버림으로써 아마존은 장바구니 단계에서의 이탈을 막는 데 결정적인 우위를 확보할 수 있었다. 원클릭 주문은 역사상 가장 사업적 가치가 큰 버튼이라는 평가를 받다가 2009년 페이스북의 ‘좋아요’ 버튼에 자리를 내줬다.

테슬라 모델 S 운전대(2012). 책 '유저 프렌들리'에 실린 도판. ⓒ Chris Allen/청림출판 제공

테슬라 모델 S 운전대(2012). 책 '유저 프렌들리'에 실린 도판. ⓒ Chris Allen/청림출판 제공

 구글의 ‘원 박스’ 디자인과 구글글라스, NTT 도코모의 이모티콘, 디즈니의 매직밴드 시스템, 아마존의 알렉사, 테슬라의 모델 S 오토파일럿 기능 등 ‘유저 프렌들리’한 디자인과 아이디어는 쉴 새 없이 잇따라 등장하고 있다.

 이제 사용자 경험(UX)과 디자인 싱킹(Design Thinking)이란 개념은 개인의 디지털 일상뿐 아니라 기업과 사회, 자선 활동까지 완전히 바꾸고 있다. 내용이나 기능, 편리함은 없이 미적인 것만 추구하는 과거 시대의 산업디자인은 설 땅을 잃어 가고 있다.

 저비용항공사 제트블루의 최고경영자를 지낸 데이비드 닐먼은 1년에 몇 차례씩 시간을 따로 할애해 승무원으로 근무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CEO가 직접 일반 사용자가 되어 일상 경험을 해 보는 것이야말로 유저 프렌들리한 디자인과 상품 개발에 절대적인 요소이기 때문일 것이다. 이 책에는 이 사례처럼 실제로 사용자 친화적인 제품이나 서비스를 어떤 방식으로 만들어 내는지를 설명하는 실용적인 팁들이 많다. 전문 디자이너나 개발자들은 물론 ‘사용자’인 일반 독자들이 읽어도 매우 유익한 정보들이 가득 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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