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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즐]9월23일이 오면…그해의 패자부활전 ‘100일 프로젝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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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즐] 최창연의 원룸일기(5)  

9월 23일에 무엇인가를 시작하면 12월 31일에 딱 100일이 된다. 귀뚜라미 울음소리가 들리고 바람이 선선해지는 시기, 늦여름의 풍요로움이 지나가고 조금씩 낙엽이 떨어지는 시기가 되면, ‘올해도 이대로 가는 건가’라는 쓸쓸한 생각이 들기 시작한다. 이즈음 새로운 일을 시작하면 연말이 다가온다는 초조함을 위안하기 좋다. 아직 늦지 않았다는 생각에 안심이 된다.

뭐든 꾸물거리고 늦된 나는, 봄에 다짐한 일들이 가을이 되어서야 해볼까 하는 마음이 드는데, 그런 나에게 9월 23일은 또 한 번 기회를 준다. 지금 시작하면 올 한 해가 가기 전에 하나쯤은 매듭을 지을 수 있다. 12월 31일까지 이제 100일이 남아 있고, 나는 패자부활전을 기다리듯이 9월 23일을 기다린다.

처음 100일 프로젝트를 알게 된 것은 10년 전 활동하던 독서 모임을 통해서였다. ‘좋은 습관 만들기’라는 제목으로, 100일 동안 아침마다 2시간 일찍 일어나, 만들고 싶은 습관을 실행하는 소모임이 진행되었다. 참가자 대부분이 영어 공부와 독서를 목표로 세웠는데, 나는 ‘그림 그리기’를 목표로 정했다. 다행히 아침에 글쓰기를 하겠다는 사람, 기타를 치겠다는 사람, 달리기를 하겠다는 사람이 있어서 같은 팀으로 묶였다. 독서팀, 영어팀 사이에서 우리는 예체능팀이 되었다.

아침에 일어나 워크북을 따라 그림을 그리는 것은 어렵지 않았는데, 정작 새벽 다섯 시에 일어나는 것이 힘들었다. 겨우겨우 100일의 반 정도를 성공했다. 그런데 돌아보니 그 50일이 어마어마한 시간이었다. 왜냐하면 나는 그림을 그릴 줄 아는 사람이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단 50일만 성공했는데도! 오랫동안 그림을 그리고 싶다고 생각만 해왔는데 꿈이 하나 이루어진 것이다. 그해 겨울을 떠올리면 ‘처음으로 그림을 그린 해’라는 문장이 떠오른다. 예체능팀의 다른 이들은 ‘기타를 시작한 해’ ‘직장을 그만두고 운동으로 건강해진 해’라는 기억으로 남았을 것이다. 우리는 지금도 종종 그때를 흐뭇하게 추억하곤 한다.

이후에도 9월 23일이 되면 ‘그림일기 쓰기’ ‘책 출간하기’ 등을 목표로 100일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작년에는 100일 동안 ‘인물 그리기’를 시도했다. 어느 해는 열심히 시도했고, 어느 해는 어이가 없을 정도로 못 할 때도 있었지만, 100일 프로젝트는 늘 위안이 되었다. 한 해의 끝에서 남은 날들이 사라져갈 때 무언가를 붙잡고 있는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끝내고 나면 그 해를 기억할 만한 경험이 하나 생겨났다.

[그림 최창연]

[그림 최창연]

얼마 전 유튜브 알고리즘에 근 손실이라는 키워드로 여러 가지 영상이 떴다. 40대가 되니 가만히 있어도 근육이 손실되는 나이가 되었다. 어디 빠져나가는 것이 근육뿐이랴. 결혼하고 출산을 하면서 자연스럽게 멀어진 친구들, 코로나로 인한 여러 모임의 단절, 줄어드는 체력과 덩달아 같이 줄어드는 자신감, 모두 모래알처럼 빠져나가는 것투성이다. 그래서인지 무엇인가 쌓여가는 실감을 얻고 싶다는 생각을 종종 한다. 삶이 쌓인다는 느낌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생계를 위한 밥벌이, 부모님의 병환이나 급한 일을 챙기는 것만으로도 시간이 빠르게 지나간다. 일 인분의 삶을 꾸리는 것은 제법 재미있고, 스스로를 책임진다는 생각에 보람도 있지만, 정작 앞으로 나아간다는 기분이 들지는 않았다. 뒤로 밀리지 않고 잘 버텼다는 기분일 뿐.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것이 공격이라면, 나의 삶은 급한 일을 잘 쳐내며 방어하는 기분에 가깝다.

가끔 궁금하다. 결혼하고, 아기를 낳고, 좀 더 큰 집에 살았다면, 지나간 삶을 바라볼 때 ‘쌓이는 기분’이 들었을까. ‘사랑하는 이와 결혼한 해’ 혹은 ‘첫아이가 태어난 해’ ‘처음으로 학부모가 된 해’와 같이 기억될 것이다. 커가는 아이를 보면서 세월의 힘을 실감하기도 할 것이다. 나의 경우에는 30대 이후로는 어느 해를 펼쳐보아도 비슷비슷하다. 분명 숨차게 달려왔는데, 열심히 살았는데, 돌아보면 그 시절에 무엇을 했는지 딱 떠오르는 기억이 없달까. 원룸에서 싱글의 삶을 산다는 것은 한 해의 의미를 스스로 만들어야 한다는 것일지도 모른다.

해마다 세워둔 랜드마크들 

9월 23일이 위안이 되는 지점은 바로 여기다. 이때 시도하는 일은 지금껏 경험해보지 않은 일이 좋다. 바꾸어 말하면, 한해를 돌아봤을 때 ‘아. 올해에는 이런 이런 일을 경험했지’라고 떠올릴 수 있는 일이 좋다. 좋아하는 일을 조금씩 난이도를 높여 쌓아가도 좋을 것이다.

랜드마크는 어떤 지역을 대표하는 지형이나 시설물을 가리키는 말인데, 100일 동안 무언가를 하면, 그 일이 그해의 랜드마크가 된다. 지금의 나를 뒤 돌아보면, 그렇게 해마다 세워둔 랜드마크들이 보인다. 허허벌판 같은 나날 속에 특별한 표시가 생겨난 것이다. 디테일은 엉망일 때도 잦지만, 그래도 좋다. 그 해를 기억할 때 떠올릴 수 있는 일이 하나 있다는 것이. 삶이 그저 흘러가는 것만이 아니라, 어떤 지점에서는 독특한 무늬를 내며 쌓이기도 한다는 것이.

이제 달력도 몇장 남지 않았고, 조금 있으면 크리스마스와 연말이 찾아올 것이다. 올 한 해도 빛의 속도로 사라져가는 지금 나는 9월 23일을 기다린다. 올해는 어떤 멋진 일을 경험해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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