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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최진석 칼럼

지적 진동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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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최진석 서강대 철학과 명예교수·새말새몸짓 이사장

최진석 서강대 철학과 명예교수·새말새몸짓 이사장

지적 활동에서 가장 기초적인 단계는 논변이나 논증이다. 논문 심사를 디펜스(defence)라고 하는 것을 봐도, 논변·논증·논문에서는 주로 공격과 방어의 기제가 작동한다. 무너지지 않으려는 자와 무너뜨리려는 자 사이의 대결이다. 무너지지 않으려면 방어 장치가 빈틈없이 치밀해야 하고, 무너뜨리려 해도 빈틈없이 준비해서 공격해야 한다. 여기서는 서로 틈을 허용하지 않으려 애쓴다. 이 단계에서는 옳은지 그른지를 따지는 것에 자신이 가진 모든 역량을 집중해야 스스로 진실하게 사는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그런데, 이 세상의 새로운 것 가운데 옳다는 이유로 등장하는 것은 단 하나도 없다. 오히려 옳은 것으로 평가받기 어려운 욕망이나 충동이나 야망 등이 앞서 작용한다. 옳고 그르고는 사물이 등장하고 사건이 일어난 이후에 그것들을 정리하는 자들의 몫이다. 생각하는 능력이 없으면 먼저 오는 것과 나중에 오는 것을 잘 구분하지 못하고, 무게중심을 두는 위치를 잡지 못한다. 감동은 진동의 형태이므로 진동할 공간이 필요한데, 논증처럼 빈틈을 허용하지 않는 구조에서는 공간이 쓸모없어 보여서 허용되지 않는다.

‘논변’보다 ‘이야기’의 감화력 커
이야기 속 공간에서 화자와 공명
이보다 더 감동의 격조 높은건 시
지성이 시적 충격 받으면 진동 일어

어린 시절, 손톱을 깎고 나서 잘 정리하지 못하고 방 안에 몇 개씩 떨어뜨려 놓은 적이 있다. 어머니로부터 여러 번 지적을 받았던 기억이 있는 것으로 봐서 아마 그 버릇은 바로 고쳐지지 않았던 듯하다. 그러던 어느 날, 재밌는 줄거리가 담긴 이야기책을 읽었다. 어떤 사람이 손톱을 깎고 나서 그것을 아무 데나 버렸는데, 그것을 먹은 쥐가 손톱의 주인으로 변신하였다. 그래서 한 집에 두 사람이 있게 되는데, 결국에는 쥐가 변한 사람이 원래의 사람을 몰아내고 그 집을 혼란에 빠뜨렸다는 얘기다. ‘손톱에 관한 존재론적 고찰’이라는 논문이 있다고 치자. 이 논문을 읽고 감화되어 손톱을 아무 데나 버리는 버릇을 고칠 수 있을까?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 이야기책을 읽고 나서는 깎은 손톱을 제대로 처리하지 못하는 버릇을 바로 고쳤다. 어머니의 잦은 질책이나 치밀한 몇 편의 논변보다도 한 편의 이야기가 사람을 더 효과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다. 이야기가 논문보다 더 감화력이 크기 때문이다. 이야기는 치밀하게 조직된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빈틈을 적절하게 허용한다. 이야기에는 반드시 공간이 허용된다. 이 공간에 청자(聽者)나 독자가 초대되어 자리한다. 이야기 속에 준비된 공간 안으로 들어온 독자나 청자는 거기서 작자나 화자와 공명한다. 공간을 준비해 준 측과 준비된 공간에 들어온 측이 상대에 박자를 맞추며 서로 두드리는 것이다. 논문에서는 상대방을 적대시하며 배타적으로 대하지만, 이야기에서는 상대를 환대의 대상으로 삼아 이야기를 만들며 함께 논다. 논문으로 감동하기 어려운 일이 이야기에서 훨씬 쉬워지는 이유다. 빈틈을 허용하지 않는 내공보다 빈틈을 허용하는 내공이 훨씬 세다. 주면 얻게 되고, 뒤로 물러나면 앞서게 되고, 비우면 채워지는 이치와 비슷하다.

아득한 언제부턴가 인간은 신의 세계에서 벗어나서 문명을 일구며 사는데, 신의 세계에서 벗어날 때 소리를 남겨놓고 빈손으로 와서 문자를 만들었다. 신의 세계에는 춤과 음악만 있고 문자가 없다. 문명이 주로 문자로 이뤄졌음을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인간 가운데 몇 명은 인간 세계에 적응하는 것보다는 신의 세계를 그리워하는 일에 더 바쁘다. 그들은 논변이나 이야기보다는 소리 쪽으로 더 기울어져 있다. 그래서 문자를 최소한 적게 사용하고, 틈새 틈새에 잊지 못하는 고향의 소리를 심는다. 고향이었던 신적 세계에 대한 그리움이 특히 강한 사람들, 바로 시인들이다. 이야기보다 더 높은 단계는 시(詩)이다. 감동의 격조나 크기 혹은 지속성만을 가지고 하는 말이다. 듣는 사람에게 공간을 허용하여 일정 부분 감동을 제공하던 이야기꾼이 감동의 완전성에서 미진함을 느끼면 문자와 문자들 사이를 다양하게 벌려서 거기에 다양한 소리를 심는 시도를 한다. 독자를 배려하느라고 마련한 공간에 소리가 심어지면 공명의 정도는 그만큼 커지고 강해진다. 그래서 훈련된 지성이 시적 충격을 받으면, 어떤 부귀영화에도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자신만의 질서를 창조해내며, 그 길을 미련하게 걷게 되는 것이다. 감동은 지적 진동이며, 가장 센 마약이다.

옳고 그르고를 따지는 것으로만 삶을 채울 필요 없다. 우선 자신 안에 감동을 받아들일 길을 내는 데에 더 많은 시간을 쓰자. 시를 읽는 일에 게으름을 피우지 말자. 자신을 향해 반성하고 질책하는 대신에 조근조근 자신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설명하고, 궁금해하자. 그렇게 하면, 정치도 학문도 예술도 반도체도 기술도 더 나아진다. 논변을 피한 채 이야기를 하자는 말이 아니다. 이야기를 치우고 시를 읽자는 말이 아니다. 논문이 없이는 문명이 서질 못한다. 논변할 때도 이야기하는 심성으로 하고, 이야기할 때도 시적 감동을 품고서 한다. 음악이 흐르는 공간을 차지하고, 시적 감동으로 떠는 사람보다 더 높은 사람이 있으면 나와보라.

최진석 서강대 철학과 명예교수·새말새몸짓 이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