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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유회사가 전기차 배터리 개발한 이유는... [SKI 혁신연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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업데이트

⑦ 전기차 배터리, 미래를 앞서간 도전
다음 달 창립 60주년을 맞는 SK이노베이션은 1962년 대한석유공사에서 출발했다. 1980년 선경(SK의 전신)에 인수된 이후 석유화학, 종합에너지, 바이오, 배터리와 그린에너지까지 섭렵하면서 지난 60년간 변신과 성장을 거듭해왔다. 오늘날 SK를 재계 2위 대그룹으로 만든 토대가 된 SK이노베이션의 혁신성장 10가지 성공비결에 관한 학술 심포지엄이 지난달 30일 기업가정신학회 주최로 열렸다. 오늘날에도 유효한 경영 인사이트를 발굴하는 자리였다. 이날 발표된 내용과 연구결과를 정리해 연재한다. 일곱 번째 혁신성장 스토리는 국내 첫 전기차 배터리 도전. 한국과학기술원(KAIST) 경영대학 이지환 교수의 분석 발표를 토대로 정리했다.

40년 전 점 찍은 배터리 사업

자동차 연료로는 기름 밖에는 생각하지 못했던 40년 전인 1982년 12월 9일. 최종현 SK 선대회장은 유공(SK이노베이션의 전신)의 부·과장급 간담회에서 ‘종합 에너지 회사’라는 비전을 제시했다. 선경(SK의 전신)이 유공을 인수한지 2년밖에 안 된 시점이었다.

그는 “석유가 지하자원이므로 그 사업 또한 한계가 있고 더욱이 공해 문제가 뒤따르고 있기 때문에 될 수 있는 대로 빨리 방향을 바꿔야 한다”며 “10년 후에는 회사의 전체 사업 중 정유 사업의 비율이 다른 에너지 사업의 비율에 비해 낮아질 수 있게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러한 비전을 달성하기 위한 장기적 사업 포트폴리오의 하나로 ‘에너지축적 배터리 시스템’을 거론한 게 배터리 사업의 출발점이었다.

최종현 선대회장의 발언 이후 3년 만에 유공은 종합에너지 개발 계획에 착수했다. 울산에 정유업계 최초로 기술지원연구소를 설립하고 새로운 에너지를 개발하기 시작했다. 지금의 대덕 기술혁신연구원의 전신이다. 이후 유공은 1991년 12월 23일 울산 석유연구실에서 태양전지를 이용한 3륜 전기차를 제작, 성능 실험에 성공했다. 현대차가 국내 첫 4륜 전기차를 개발한 게 그해 11월이었다. 자동차기업이 아닌 회사로는 이례적인 도전이었다.

범세계적·국가주도 과제로 연결

당시 우리나라 경제 근대화를 견인해 왔던 전통 제조업은 다른 개발 도상국과의 경쟁으로 흔들리고 있었다. 첨단 혁신 기술을 이용한 새로운 사업이 절실한 상황이었다. SK이노베이션은 배터리 사업을 단순히 기업 차원이 아닌 국가적·세계적 과제와 연결해 비즈니스 추진력을 갖춰나갔다. 정부는 G7 과제(기술 선진 7개국 진입 프로젝트)의 하나로 ‘전기차용 첨단 축전지 개발’을 추진했다. 울산 유공연구소는 1992년 화학 기반 대기업 기관으론 유일하게 전기차 배터리 개발 국책과제 주관기관으로 선정됐다. 1993년 한 번 충전으로 약 120km를 달릴 수 있는 전기차와 배터리 개발에 성공한다. 이어 1996년부턴 리튬이온 배터리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개발에 돌입했다.

정유·화학으로 축적한 기술 응용

SK이노베이션 직원이 전기차 배터리를 들고 있는 모습. 사진 SK이노베이션

SK이노베이션 직원이 전기차 배터리를 들고 있는 모습. 사진 SK이노베이션

효율적인 배터리 연구 개발을 위해 내부 자원을 최대한 활용하는 전략을 썼다. 1998년 노트북·캠코더용 고용량 리튬이온전지 독자 개발에 성공한다. 리튬이온 전지 제조기술의 핵심은 코팅과 조립기술이다. SK는 20년간 비디오테이프 제조를 통해 축적된 세계 최고 수준의 기술을 이미 확보하고 있었던 것이다.

수십년간 축적해온 석유·화학기술을 새로운 분야에 응용한 덕에 속도를 앞당길 수 있었다. SK이노베이션은 2004년 말 세계 세 번째로 고용량 리튬이온 전지 분리막(LiBS·Lithium ion Battery Separator) 독자기술 개발에 성공한다. LiBS는 리튬전지의 양극과 음극의 접촉을 막고 전지의 성능과 안전성을 부여하는 리튬이온 배터리의 핵심소재다.

2004년 미래형 자동차 개발 국책과제에 주관기관으로 참여, 하이브리드 전기자동차(HEV, Hybrid Electric Vehicle)의 핵심부품인 중대형 배터리 시스템 개발을 2년만에 완성했다. 또한 미국 전기차 개발 컨소시엄(USABC) 기술평가 프로그램 등 글로벌 프로젝트에 참여하며 존재감을 키워나갔다.

정공법으로 뚫은 다임러 그룹

SK이노베이션이 세계 전기차 시장에 공식적으로 명함을 내민 건 2009년이다. 하지만 글로벌 완성차 업체를 상대해 보지 못한 경험 부족이 번번이 발목을 잡았다. SK는 정공법을 택했다. 성능·품질 등에 대한 요구수준이 까다롭기로 소문난 다임러 그룹을 뚫기로 했다.

2009년 7월 다임러 그룹 산하 미쓰비시후소(Mitsubishi Fuso)의 하이브리드 트럭에 장착될 리튬이온 배터리 공급업체 선정을 위한 워크숍이 일본에서 열렸다. SK이노베이션은 미쓰비시후소의 요구사항을 빠르게 반영하며 신뢰를 쌓아 나가며 해외 첫 배터리 공급계약을 체결했다. 이후 2010년 현대·기아 자동차의 ‘블루온’과 ‘레이’에 이어 2011년 다임러 그룹 메르세데스-벤츠의 최고급 사양 전기 스포츠카의 배터리 공급업체로 선정됐다.

국내외 배터리 수주는 계속됐다. 2014년엔 기아자동차의 전기차 ‘쏘울 EV’ 출시하고, 베이징 APEC 공식 행사 차량에 배터리를 탑재했다. 2016년엔 다임러 그룹 산하 메르세데스-벤츠 주력 전기차 프로젝트를 따냈다. 급증하는 글로벌 전기차 수요에 발맞춰 SK는 현재 미국, 중국, 헝가리 등에 생산 거점을 확대하고 있다.

신사업 키운 리더의 의지 

서산 배터리 공장 둘러보는 최태원 SK 회장. 사진 연합뉴스

서산 배터리 공장 둘러보는 최태원 SK 회장. 사진 연합뉴스

SK의 글로벌 배터리 사업 성공 뒤에는 CEO(최고경영자)의 강력한 의지가 있었다. 최태원 회장은 2011년 6월 SK이노베이션 기술혁신연구원(당시 글로벌테크놀로지)을 방문해 방진복을 입고 자동차 배터리 생산라인에 들어가 제품을 일일이 점검했다. 배터리 연구인력의 명함을 모아 만든 패널에 “모든 자동차가 우리 배터리로 달리는 그 날까지 나도 같이 달리겠다”라는 글귀를 쓰며 애정을 드러냈다.

배터리 사업에 대한 의지는 최재원 SK그룹 수석부회장(SK온 대표이사)도 못지않았다. 2012년 초 SK이노베이션 배터리사업팀장에게 “차에 연료를 채우는 것이 아니고 집이나 사무실에서 자동차를 충전하는 시스템에 리딩 역할을 해내자”라며 “저는 이미 그렇게 마음을 먹었고 이 목표를 이루기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이라며 직접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한국과학기술원(KAIST) 경영대학 이지환 교수 인터뷰

카이스트 경영대학 이지환 교수.

카이스트 경영대학 이지환 교수.

이번 연구에 참여한 소감은요.  

“전기차 배터리는 최근에 주목받은 영역이라고 생각했는데요. 연구를 진행하다 보니 그 뿌리가 무려 40년 전이라는 점이 인상적이었습니다. 냉철하게 바라보면 석유를 대체할 에너지원이 무엇이 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은 당시 선도적인 기업이라면 모두 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종합 에너지 회사라는 비전을 정하고, 수많은 실패 위험에도 이를 실천에 옮긴 것은 SK만의 ‘딥 체인지’ 정신 덕분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석유회사 SK이노베이션의 배터리 사업 진출에 대해 어떻게 평가하는지. 

“석유와 2차 전지는 완전히 다릅니다. 어찌 보면 배터리는 SK이노베이션의 전통 주력 사업인 정유업을 위협한다고 볼 수도 있어요. 그런데 SK는 멀리 보고 발상의 전환을 시도했어요. 2010년 SK이노베이션 기업광고 ‘리튬이온 전지’편을 보면 이런 말이 나와요. ‘우리에게 유전은 참 멀리 있었다. 그래서 생각했다. 플러그를 꽂는 곳 그 어디라도 유전이 되게 하자고.’ 배터리를 석유처럼 자동차를 움직이게 하는 에너지원으로 접근한 거죠. 이러한 새로운 접근과 통찰이 지금의 SK 배터리를 만들었다고 봐요.”

SK와 LG 배터리 소송은 어떤 시사점을 줄 수 있을까요? 

“이 분쟁은 대한민국 배터리 산업이 양적으로 팽창하고 시장 구조를 진화하는 과정에서 빚어진 갈등입니다. 국내 전기차 배터리 업계의 큰 내홍이긴 했으나, 역설적으로 보면 글로벌 공급망 위기가 닥친 가운데 전기차 생산 가치사슬 속에서 K-배터리가 갖는 위상에 대한 인식을 높이는 계기가 됐다고 생각합니다. 실제 양사 간의 분쟁이 지속하자 독일의 폭스바겐사는 '양사가 합의하지 않으면 우리는 경쟁국인 중국으로 갈 수밖에 없다'며 원만한 해결을 촉구하기도 했죠.”

SK의 배터리 산업에 대해 전망한다면.    

“SK는 이미 기본적인 수요를 소화해줄 수 있는 글로벌 파트너를 확보한 것 같습니다. 상대적으로 다른 경쟁사에 비해 SK의 시장 점유율이 높지 않아서 확장 여지가 더 크죠. 다만 우려되는 것은 중국 배터리 기업입니다. 배터리 산업은 결국 소재가 되는 니켈, 코발트 등 광물 자원부터 확보해야 하는데 중국 기업들이 패권을 강화하고 있습니다. 최근 2차전지 장비 부문의 국내 경쟁력은 높아지고 있지만, 소재와 부품은 여전히 해외의존도가 높은 실정입니다. 2차 전지 산업을 선도하기 위해서는 셀 제조뿐만 아니라 가치사슬의 출발점이라 할 수 있는 광물 자원 확보할 수 있는 전략적 접근과 인재 양성 계획이 필요합니다.”

SKI 혁신성장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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