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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이지영의 문화난장

부석사 물들인 안은미의 파격 몸짓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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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이지영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이지영 논설위원

이지영 논설위원

지난 11일 경북 영주 부석사. 오후 1시가 되자 일주문 앞에 우스꽝스러운 복장의 무용수들이 꽹과리 소리에 맞춰 나타났다. 동그란 선글라스에 신발은 짝짝이, 갓을 다섯 개나 겹쳐 쓴 남성 무용수들은 꼭두각시춤에 어울릴 법한 치마저고리를 입고 있었다. 추석 연휴 기간 천년 고찰을 찾은 관람객들의 눈길을 한번에 사로잡았다. 현대무용가 안은미가 이끄는 안은미컴퍼니의 ‘기특기특’ 공연은 그렇게 시작됐다.

부석사 초입 일주문에서 배흘림 기둥으로 유명한 무량수전까지는 500m 가파른 계단길로 이어져 있다. 공연은 그 길을 올라가며 중수기적비ㆍ당간지주ㆍ천왕문ㆍ회전문ㆍ범종루 앞마당 등에서 11개의 레퍼토리를 펼쳐 보였다. 출발할 땐 50명 안팎이었던 관객은 마지막 안양루 공연에 이르러선 200여 명으로 늘어났다. 이게 뭐지, 하고 따라가며 50분 길이의 현대무용을 감상한 셈이었다. 군데군데 설치된 조각가 이태수의 ‘떠 있는 돌’ 조형물은 “의상대사를 흠모한 여인 선묘가 커다란 바위로 변해 하늘에 뜨는 신통력을 발휘, 도적 무리를 쫓아내고 이곳에 부석사를 짓게 했다”는 창건 설화를 상기시켰다.

천년사찰-현대무용 만남
동시대와 소통하는 전통
청와대·경복궁 활용 논란
문화유산이 박제품인가

11일 부석사 안양루에서 현대무용가 안은미가 공연을 하고 있다. 사진 안은미컴퍼니

11일 부석사 안양루에서 현대무용가 안은미가 공연을 하고 있다. 사진 안은미컴퍼니

10, 11일 이틀 동안 총 18차례 진행된 ‘기특기특’ 공연은 지난 3일 시작된 ‘2022 세계유산축전-안동·영주’의 프로그램 중 하나다. 세계유산을 그저 오래된 전통으로 보존만 하지 말고 동시대와 교차하고 소통할 수 있도록 활용하자는 취지에서 파격과 도발의 아이콘, 안은미와 손을 잡은 것이다.

문화유산 활용 방안을 놓고 문화계 안팎이 시끄럽다. 청와대 개방이 논란에 불을 지폈다. 지난달엔 한 방송사 웹예능 프로그램이 청와대 앞뜰에 소파를 갖다 두고 가구 브랜드를 노출해 상업화 논란이 불거진 데 이어 패션 잡지 보그의 화보 촬영을 두고 문화재청장이 국회에서 사과하는 일까지 일어났다.

보그 화보 촬영은 문화재청의 ‘문화유산 방문 캠페인’과 연계해 진행됐다. 한복의 새로운 현대적 해석과 열린 청와대를 함께 소개하겠다는 의도였다. 하지만 청와대 영빈관 의자에 분홍 드레스를 입고 누워있는 모델 사진 등이 지난달 22일 공개되면서 “역사적인 공간에 걸맞지 않다” “국격을 떨어뜨렸다” 등의 비판이 제기됐다. “누워있는 모습이 기생을 연상시킨다”는 비논리적인 주장까지 등장했고, 일본 디자이너 류노스케 오카자키의 의상이 화보에 포함됐다는 것도 문제점으로 꼽혔다. 이 디자이너가 반한(反韓) 활동을 한 이력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그저 일본인이었을 뿐이지만, 탁현민 전 청와대 의전비서관은 TBS ‘김어준의 뉴스공장’에 출연해 비난 목소리를 높였다. 문화유산의 활용이냐, 훼손이냐에 대한 사회적 논의를 거칠 겨를도 없이 여론은 인터넷을 중심으로 한 방향으로 쏠렸고, 결국 보그 코리아는 관련 화보를 공개 이틀 만에 홈페이지에서 삭제했다.

부석사 일주문에서 펼쳐진 '기특기특' 첫 장면. 이지영 기자

부석사 일주문에서 펼쳐진 '기특기특' 첫 장면. 이지영 기자

불똥은 인근 경복궁까지 번져 11월로 예정된 구찌 경복궁 패션쇼가 취소 위기를 맞기도 했다. 지난달 29일 “화보 관련 부정적인 국민 여론을 감안해 진행이 쉽지 않다”고 밝혔던 문화재청은 여론이 잦아들자 지난 8일 다시 “예정대로 진행한다”고 했다. 문화재청이 이렇게 여론의 눈치를 보는 이유는 문화유산에 대한 지나친 엄숙주의 때문이다.

엄격한 전통의 잣대로 들여다보면 부석사의 ‘기특기특’ 공연 역시 꼬투리 잡힐 여지가 많다. 시커먼 수염을 그대로 드러낸 남성 무용수들이 여성 한복을 입은 것부터 불경스럽기 짝이 없었다. 장영규 음악감독이 만든 배경 음악에선 클럽에서 들어봤음직한 전자음이 난무했다. 유네스코 세계유산의 품위를 손상했다 비난할 여지는 차고 넘쳤다.

하지만 관객 반응은 호응 일색이었다. 가족과 함께 11일 공연을 본 장웅조 홍익대 문화예술경영학과 교수는 “부석사의 역사적 맥락과 장소적 맥락이 ‘안은미’스러운 실험적 몸의 언어로 살아난 공연이었다. 중간중간 코믹한 부분을 섞어 윤회·고행 등 어려운 주제도 쉽게 이해할 수 있게 표현했다. 중학생인 아들도 재미있다고 하더라”고 말했다.

‘2022 세계유산축전: 안동·영주’의 주제는 ‘이동하는 유산’이다. 세계유산의 문화예술적 가치를 동시대에 맞춰 갱신해 미래로 온전하게 이행할 수 있는 다양한 태도와 관점을 제시하겠다는 의도다. 그 갱신과 이행 과정에서 분란이 생길 수 있다. 하지만 욕먹는 게 두려워 보존에만 매달리면 유산에 잠재된 여러 의미까지 박제된 유물 신세가 돼버릴지 모른다. 동시대적 가치를 찾기 위한 시도를 멈추지 말아야 하는 이유다. 경복궁도, 청와대도 마찬가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