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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방촌·전세사기 취재해보니, 현실이 더 영화 같더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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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7면

영화 ‘홈리스’는 전세 사기를 당한 어린 부부가 연고도 없는 노인의 집에서 지내게 되며 벌어지는 서스펜스를 그렸다. [사진 그린나래미디어]

영화 ‘홈리스’는 전세 사기를 당한 어린 부부가 연고도 없는 노인의 집에서 지내게 되며 벌어지는 서스펜스를 그렸다. [사진 그린나래미디어]

“‘홈리스’는 단지 한국뿐 아니라 전세계 많은 곳에서 일어나고 있는 사회적 이슈를 흡인력 있게 다루고 있다.”

지난해 50회를 맞은 네덜란드 로테르담국제영화제가 한국 극영화로 유일하게 ‘홈리스’(15일 개봉)를 초청하며 밝힌 평가다. 이 영화로 장편 데뷔한 임승현(35) 감독에 대해선 “신인 감독을 넘어서는 현명함을 보여줬다”고 극찬했다.

전세 보증금 사기로 갈 곳이 없어진 어린 부부가 노인이 혼자 살던 집에 머물게 되는 상황 속에 청년 세대의 불안, 노인들의 고독 문제를 새겨 넣었기 때문이다. 주인공 부부가 갓난아기까지 데리고 전단지 아르바이트, 배달 일을 하며 찜질방을 전전하는 전반부가 다큐멘터리처럼 묘사했다면 후반부는 벼랑 끝에 몰린 부부의 심정을 공포·스릴러 장르 문법을 빌려 표현했다. MZ세대판 ‘기생충’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임승현 감독

임승현 감독

‘홈리스’는 임 감독이 동기 김승현 작가와 함께 각본을 써서 만든 단국대 영화콘텐츠전문대학원 졸업작품이다. “집을 갖기에는 너무 어려운 세대가 된 것 같다”며 요즘 청년들을 ‘홈리스 세대’라 명명한 임 감독을 8일 전화 인터뷰로 만났다.

‘홈리스’란 제목의 의미는.
“서울역 노숙인들을 떠올릴 수도 있지만, 말 그대로 ‘집이 없음’이란 직역에 가깝다.”
자전적 경험에서 영화를 만들게 됐다고 들었다.
“고등학교 3학년이 되던 겨울에 집이 경매에 붙여졌다. 그 바람에 가족들과 한 달 넘게 찜질방에서 생활했는데 밤마다 사람들의 시끄러운 소음에 잠들지 못했다. 아파트와 곰팡이 가득한 반지하를 오가며 지내기도 했다. 영화에 그런 기억들을 반영했다. 내 개인적인 경험에, 김승현 작가의 이모 할머니가 혼자 사시다가 전구를 갈던 중 떨어지셔서 심하게 다쳤던 일화를 넣게 됐다. 영화는 실제보다 극적으로 그렸다.”
주인공 부부에 대한 설명이 많지 않다.
“부부가 어려 보이고 뭔가 집안에 문제가 있지 않을까, 유추할 정도의 생략이 관객의 상상을 자극하기에 더 좋을 것 같았다. 가출 팸에서 만났다는 설정이다.”
서울역 쪽방촌 등을 취재해 반영했다고.
“유튜브에서 독거 노인, 고독사를 소재로 한 다큐멘터리를 많이 찾아봤다. 쪽방촌을 관리하는 공무원들, 그리고 쪽방촌에서 사는 주민들과도 만나 대화를 나눴다. 더위·추위가 제일 힘들다고 하신 게 기억난다. 전세 사기는 재개발 확정지역의 전셋집을 싸게 내놓고 보증금을 받아 잠적하는 뉴스를 참고했다. 취재해보니, 현실이 더 영화 같더라.”
일본의 좀도둑 가족을 그린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어느 가족’,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과도 주제가 닮았다.
“시나리오를 다 쓰고 두 영화를 봤는데 ‘기생충’은 좀 더 계급 문제인 것 같고, ‘어느 가족’이 우리 각본과 공감대가 있었다. 일본 사회의 어떤 부분이 우리와 맞닿아 있더라. 시나리오 쓰며 참고한 영화는 다르덴 형제 감독의 ‘더 차일드’다. 로테르담 영화제 때도 느꼈지만, 유럽이 복지가 좋다는 환상이 있지만 역시나 빈곤, 주거 문제에 대한 고민이 크더라. 현지 관객들도 ‘기생충’에도 나온 반지하 공간을 흥미롭게 봐주셨다.”

극 중 한결(전봉석), 고운(박정연) 부부에겐 집이 없다. 반면 독거노인 예분(송광자)은 평생을 바쳐 마련한 번듯한 집이 있지만, 자식들은 미국에 살며 어머니를 돌보지 않는다.

집에 집착하는 고운의 홀린 듯한 눈빛은 예분의 젊을 적 모습처럼 보이기도 하는데.
“고운이 뭔가에 씌인 듯 보이길 바랐다. 고운이 ‘이 할머니랑 우리랑 똑같다. 아무도 우리한테 관심이 없다’는 말도 한다. 이를 통해 무관심의 공포를 말하려 했다. 무관심 속에 누군가는 보호받지 못하고 있으니, 서로가 서로에게 관심을 갖고 살아가자는 말을 하고 싶었다.”

대학에서 심리학을 전공하다 2학년 때 입대한 임 감독은 봉준호 감독의 ‘살인의 추억’을 우연히 보고 영화에 매료돼 제대 후 영화로 진로를 바꿨다. “심리학은 아픈 사람의 이야기를 잘 들어야 하는데 제 그릇이 그렇게 크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는 그는 “진로를 고민하던 차에 ‘살인의 추억’을 봤는데 음악, 연기, 카메라 미장센이 정말 대단했다. 그 영화를 지금까지 20번 넘게 보며 감독의 꿈을 키웠다”고 했다.

‘홈리스’는 김승현 작가와 공포 장르 단편 2편에 이어 만든 세 번째 작품. 둘이 공동 각본을 쓴 또 다른 장편 ‘물비늘’은 10월 부산 국제영화제 ‘한국영화의 오늘-비전’ 부문에 초청됐다. 강에서 래프팅하던 중 의문사한 손녀의 사라진 시신을 1년 간 찾고 있는 할머니의 이야기다.

‘홈리스’ 개봉과 함께 차기작 ‘물비늘’이 영화제에 초청된 소감을 그는 이렇게 말했다.

“제일 기쁜 건 보석 같은 배우들을 보여드릴 수 있다는 거예요. ‘홈리스’의 박정연·전봉석 배우가 뜨거운 여름에 아이 안고 연기하면서 무거운 감정선 때문에 괴로워했는데, 개봉으로 이어져 감독으로서 행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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