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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다르, 안락사였다…‘네멋대로 해라’의 거장 "사는 것 지쳤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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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뤼크 고다르 감독이 13일(현지시간) 안락사로 숨졌다. 사진은 2004년 5월 18일 '아워뮤직' 영화 시사회에서 기자회견에 참석한 모습. 로이터=연합뉴스

장 뤼크 고다르 감독이 13일(현지시간) 안락사로 숨졌다. 사진은 2004년 5월 18일 '아워뮤직' 영화 시사회에서 기자회견에 참석한 모습. 로이터=연합뉴스

지난 13일(현지시간) 스위스 자택에서 숨진 ‘영화 혁명가’ 장 뤼크 고다르 감독이 안락사(조력자살)를 선택한 것으로 뒤늦게 알려졌다. 고다르 측 법률 고문인 패트릭 지네레 변호사는 뉴욕타임스(NYT)와의 전화 인터뷰에서 “고다르 감독은 다양한 질병에 시달렸고, 우리처럼 (활기차게) 살 수 없기 때문에 ‘이제 (내 삶은) 충분하다’고 말하기 위해 분명한 결단을 했다”고 말했다.

프랑스 일간지 리베라시옹도 감독과 가까운 익명의 지인을 인용해 “고다르는 (심각하게) 아프지는 않았다"며 "(사는 것에) 지쳤을 뿐이고, 삶을 끝내기로 결정했다”고 전했다. 안락사였다는 것을 알리기를 원했다고도 한다. 리베라시옹은 “고다르에겐 (안락사라는) 사실이 알려지는 것이 중요했다”고 지인을 인용해 전했다. 고다르 감독은 실제 2014년 칸 영화제에서 “내가 너무 아프다면 그 굴레에 갇히고 싶지 않다”면서 안락사 의향이 있느냐는 질문에 “네”라고 답했다. 그러면서도 “현재로써는”이란 단서를 달고 “(선택이) 여전히 너무나 어렵다”고 했다.

고다르가 여생을 보낸 스위스에서는 조력자살이 합법이며, 네덜란드, 벨기에, 스페인 등은 특정 조건 아래에서 안락사가 허용된다. 반면 프랑스에서는 죽음이 임박한 환자에 대해 의료진이 연명 치료를 멈추고 숨을 거두기 전까지 수면유도제를 투여하는 것만 허용되고 있다. 고다르의 죽음을 계기로 이런 프랑스에서도 조력자살 등에 대한 합법화 논의가 본격화할 전망이다. 프랑스 대통령실은 이날 홈페이지에 성명을 내고 이른바 '죽음을 선택할 권리'에 대한 국가 차원의 토론에 돌입하겠다고 밝혔다.

1965년 8월 31일 베니스 국제영화제에 참석한 장 뤼크 고다르 감독(오른쪽). 왼쪽은 배우이자 아내였던 안나 카리나. AP=연합뉴스

1965년 8월 31일 베니스 국제영화제에 참석한 장 뤼크 고다르 감독(오른쪽). 왼쪽은 배우이자 아내였던 안나 카리나. AP=연합뉴스

고다르 감독은 1930년 파리에서 부유한 가정에서 네 자녀 중 둘째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프랑스 태생의 저명한 의사였고, 어머니는 스위스 은행가의 딸이었다.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스위스에서 유년기를 보낸 후 프랑스로 돌아와 49년 소르본 대학에서 민족학을 공부했지만, 영화에 심취했다. ‘시네클럽’에 가입해 프랑수아 트뤼포, 클로드 샤브롤, 앙드레 바쟁, 에릭 로메르 등 영화계 유명 인사들과 교류했다. 누벨바그를 이끌었던 영화 평론지 ‘카이에 뒤 시네마’에 52년 합류해 영화평론을 썼다.

그가 대중에 이름을 알린 건 1960년 데뷔작 ‘네 멋대로 해라’를 통해서다. 대본 없는 작품, 카메라 워크와 논리적 연결성이 없는 점프 샷 등의 연출은 당대 파격으로 큰 주목을 받았다. 이후로도 카메라와 음향을 통해 다른 예술 장르로는 표현할 수 없는 영화를 만드는 실험을 이어갔다. 65년 연출한 ‘알파빌’로 베를린영화제 황금곰상을 받았다. 그는 최근까지도 왕성한 작품 활동을 했다. 2014년 장편 3D 영화 ‘언어와의 작별’을 만들어 칸 영화제 심사위원상을 받았고, 2018년 ‘이미지북’은 칸 영화제 특별 황금종려상을 받았다.

그는 프랑스 영화의 새 물결(누벨바그)의 거장으로 꼽히지만, 상업적 성공을 거둔 작품은 드물다. 영화평론가 시절 부모님의 지원이 끊기자 5년간 가족과 친구들의 돈을 훔쳐 체포됐다가 보석으로 풀려났지만, 집안과 아예 결별했다. 작품 활동이 한창이던 1960년대에도 프랑스 정부의 재정 지원으로 겨우 영화를 제작했을 정도였다. 60년대 고다르의 주요 작품에 모두 출연해 그의 뮤즈로 통하던 덴마크 태생 프랑스 배우 안나 카리나(1940~2019)와 61년 결혼했다가 3년 만에 결별했다. 67년 17살 연하의 배우 안느 비아젬스키(1947~2017)와 결혼했지만 79년 이혼 후 2010년 현재 아내와 결혼했다.

“내 삶은 영화의 일부”

장 뤼크 고다르 감독이 1982년 5월 25일 칸 국제 영화제에서 기자회견 중 담배를 물고 있다. AP=연합뉴스

장 뤼크 고다르 감독이 1982년 5월 25일 칸 국제 영화제에서 기자회견 중 담배를 물고 있다. AP=연합뉴스

고다르 감독은 평소 인터뷰를 거의 하지 않았다. 인터뷰를 하더라도 그의 사생활이나 예술에 관한 질문은 피했다. 1980년 한 기자가 스위스로 이주한 이유를 묻자 “그냥 차에 올라타서 고속도로를 달렸다”고만 답했던 게 대표적이다. 영화 ‘네멋대로 해라’에서 주인공이 차를 훔쳐 타고 무작정 달아나는 장면을 묘사한 것이다. 그는 74년 파리에서 그르노블로 이사한 뒤 돌연 스위스로 이주했었다. 그는 “내가 사람들과 이야기할 때 문제는 나는 항상 영화와 삶을 혼동한다는 것”이라며 “나에게 삶은 영화의 일부”라고 말했다. 그는 말년엔 방문객도 만나지 않은 채 아내 앤 마리 미에빌과 은둔 생활을 했다.

그는 유대계 미국인이 주류인 할리우드에선 논란의 인물이었다. 평소 작품에 진보적 관점을 담았던 그가 팔레스타인을 탄압해온 이스라엘과 유대인을 비판하자 반유대주의자로 낙인 찍히면서다. 그가 지난 2010년 아카데미상 평생공로상을 수상할 때도 논란이 다시 불거졌다. 시상식에 불참했던 그는 훗날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소감을 묻자 “아무 의미 없다”라며 “아카데미가 그걸(시상식) 좋아한다면 그렇게 내버려둬라”라고 했다.

이런 논란에도 그는 할리우드에 큰 영향을 미쳤다. 할리우드 거장 쿠엔틴 타란티노는 고다르의 영화 ‘국외자들’의 이름을 따 1991년 제작사를 차렸다. 타란티노는 “고다르는 영화계의 밥 딜런”이라며 “그 둘은 각자의 영역에서 혁명을 이뤘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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