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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유에서 섬유까지, 수직계열화 빅픽처 [SKI 혁신성장 연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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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K이노베이션 혁신성장 연구 

⑥ 석유에서 섬유까지, 수직계열화 빅픽처

다음 달 창립 60주년을 맞는 SK이노베이션은 1962년 대한석유공사에서 출발했다. 1980년 선경(SK의 전신)에 인수된 이후 석유화학, 종합에너지, 바이오, 배터리와 그린에너지까지 섭렵하면서 지난 60년간 변신과 성장을 거듭해왔다. 오늘날 SK를 재계 2위 대그룹으로 만든 토대가 된 SK이노베이션의 혁신성장 10가지 성공비결에 관한 학술 심포지엄이 지난달 30일 기업가정신학회 주최로 열렸다. 오늘날에도 유효한 경영 인사이트를 발굴하는 자리였다. 이날 발표된 내용과 연구결과를 정리해 연재한다. 여섯 번째 혁신성장 스토리는 종합석유 화학 사업의 밑그림이 된 '석유에서 섬유까지' 수직계열화 빅픽처. 김상준 이화여대 경영학과 교수의 분석 발표를 토대로 정리했다.

선경의 석유사업 진출 준비, 유공 인수로 첫 걸음

선경의 주요 사업은 직물이었다. 원재료인 석유 수급은 기업의 존폐를 결정한다. 최종건 SK 창업주가 생전 정유공장 설립에 사활을 걸었던 이유다. 1973년 선경 석유를 설립, 석유사업을 본격적으로 추진하려 했지만, 대외변수가 발목을 잡았다. 1973년 10월 제4차 중동전 발발로 제1차 석유 위기가 닥쳐 원유 가격이 몇 배로 올랐다. 선경석유에 공동투자한 일본의 데이진과 이토추상사도 본래 계획을 포기하고 자본투자까지 중단하면서 정유공장 설립은 무산됐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최종건 회장은 폐암 투병 중 향년 48세 일기로 눈을 감았다.

수장의 부재, 혹독한 대외 환경은 선경을 벼랑 끝으로 내모는 듯했다. 그러나 경영권을 승계한 최종현 SK 선대회장은 벼랑 끝에서 오히려 큰 그림을 그렸다. 석유부터 섬유에 이르는 전 과정을 수직계열화해 선경을 에너지·화학 분야 글로벌 일류 기업으로 키우겠다는 빅픽처였다. 그는 사우디아라비아 왕가 등 막강한 석유 네트워크를 갖춘 고위급 인물들과 다각적 우호 관계를 다져가며 원유 공급 루트를 확보하는 등 석유사업 진출을 위한 기반을 다져 나갔다.

1986년 내한한 야마니 석유상(가운데)과 최종현 SK선대회장(왼쪽). 사진 SK이노베이션

1986년 내한한 야마니 석유상(가운데)과 최종현 SK선대회장(왼쪽). 사진 SK이노베이션

1977년 10월 최 회장은 민간인으로는 이례적으로 야마니 석유상의 초청을 받았다. 야마니 석유상은 당시 사우디아라비아는 물론 석유수출국기구(OPEC) 국가에도 영향력이 있던 석유상이었다. 그는 "한국이 필요한 만큼 원유를 증량해 공급해 주겠다"고 약속했다. 2차 오일쇼크로 한국이 원유 부족에 허덕이던 시기였다. 이는 1980년 선경이 대한석유공사를 인수하는 결정적 계기가 됐다. '석유에서 섬유까지' 수직계열화 빅픽처는 유공 인수로 첫걸음을 내디뎠다.

혁신의 코어, 연구소를 울산에 만든 이유

1985년 유공 기술연구소 준공. 사진 SK이노베이션

1985년 유공 기술연구소 준공. 사진 SK이노베이션

최종현 회장은 유공 인수 후 울산공장을 둘러보고 "여기는 R&D가 없네"라 언급하고 연구소 구축을 지시한다. 연구·개발 원칙은 세 가지였다.
1. 기반사업에 대한 연구를 우선적으로 해 사업 확장성을 높인다.
2. 핵심 기술은 사지 않고 직접 만든다. 핵심기술을 합작투자나 소싱으로 해결하면 사업 성과가 불확실해지기 때문이다.
3. 연구소는 현장에 있어야 한다. 그래야 현장에서 필요한 기술적 수요를 긴밀히 파악해 대응할 수 있다.

이 같은 원칙에 따라 1985년 울산 콤플렉스(CLX)에 설립된 울산기술지원연구소는 훗날 SK이노베이션이 배터리, 윤활기유 등 다양한 사업으로 진출하게 되는 주요 원천기술을 제공하는 혁신 코어 역할을 수행했다.

유공은 1984년 방향족 공장을 착공했다. 나프타 분해시설을 갖추고 벤젠·톨루엔·자일렌 등을 대량 생산하기 위해서다. 이어 나프타 분해과정에서 나오는 에틸렌을 대량생산하는 공장을 짓고, 에틸렌 공장의 후공정으로 폴리올레핀 생산 공장을 지었다. 선경합섬에서 생산하는 섬유의 원료가 되는 파라자일렌은 유공의 방향족 공장에서 생산하는 자일렌을 활용하는 식으로 모든 생산 공정을 연결했다. 1991년 울산콤플렉스에 9개 공장을 합동 준공하면서 휘발유와 합성고무·합성섬유 원료에 이르는 석유화학 필수제품을 위한 생산시설을 완전히 갖추게 됐다. 석유에서 섬유까지, 수직계열화의 완성이었다.

울산CLX 전경. 사진 SK이노베이션

울산CLX 전경. 사진 SK이노베이션

SKMS 경영관리 체계 정비 

기업의 존재 이유와 성장 방향성을 담은 '빅 픽처'와 이를 이뤄내기 위해 갖가지 방법론을 구축한 것이 SK이노베이션의 성장 핵심이다. 김상준 이화여대 경영학과 교수 제공

기업의 존재 이유와 성장 방향성을 담은 '빅 픽처'와 이를 이뤄내기 위해 갖가지 방법론을 구축한 것이 SK이노베이션의 성장 핵심이다. 김상준 이화여대 경영학과 교수 제공

혁신 방법에 대한 고민은 '경영 관리 체계'로 옮겨갔다. 최 회장은 경영권을 승계받자마자 일찌감치 선경의 경영 방식 진단에 대대적으로 나섰다. 석유에서 섬유까지 수직계열화, 에너지·화학 분야 글로벌 일류 기업으로의 여정을 제대로 실행하려면 객관적인 내부 진단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수직계열화는 다양한 사업, 기술이 한 우산 아래 공존하는 것을 뜻하기도 한다. 다양한 이해 관계자들이 같은 목표를 갖고 효과적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소통하는 용어의 정의를 분명히 하고, 구성원 간 역량이 조화롭게 어우러질 수 있는 장치가 필요했다. 1979년 3월 일찌감치 세상에 나온 SKMS(SunKyung Management System, 선경 경영 관리 시스템)는 인사·재무·기획 등 일상적인 관리요소를 포함해 일을 대하는 자세·의욕에 사교 방법 등을 두루 포함하고 있는 일종의 실전 경영 교과서다.

김상준 이화여대 경영학과 교수는 "미래에 대한 예언, 큰 그림을 그린 것으로 끝난 게 아니라 그 그림을 현실화하고 계속해서 나아갈 수 있는 혁신 도구(방법론)를 끊임없이 고민했다"며 "자신이 그린 미래를 향해 자신을 끊임없이 변화시켜 나간다는 측면에서 SK이노베이션의 핵심 성장 동력을 '자기충족적 혁신'이라 명명하고 싶다"고 말했다.

김상준 이화여대 경영학과 교수 인터뷰

김상준 이화여대 경영학과 교수.

김상준 이화여대 경영학과 교수.

심포지엄에서 '자기충족적 혁신'을 SK이노베이션의 핵심 성장 동력으로 꼽아 주셨는데요. 여타 기업 역시 각자 나름의 혁신 기법을 동원해 변화를 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SK이노베이션만이 지니는 차별화된 지점은 무엇일까요.  

"제가 MBA 강의를 하면서 간접적으로 듣게 된 기업의 비전 수립 과정은 SK의 것과는 다른 면이 있었습니다. 비전 수립과 현재가 멀게만 느껴지고 사후적으로 현재의 사업이 포장된 느낌이 있었죠. 미래의 비전보다는 현재의 영업이익 관리가 더 중요하게 느껴진 대목도 있었습니다. SK이노베이션의 초창기 유공 인수 이후의 일련의 기업 변화 과정, '자기충족적 혁신'은 단순히 중장기 계획을 세우고 그것을 이뤄내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 당시는 상상할 수도 없었던 미래를 치밀한 분석 하에서 그려내고, 이를 위해서 끊임없이 자기 혁신을 만들어 낸 것입니다.
물론 선경의 유공 인수를 정치적 조치로 받아들이는 역사적 견해를 무시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유공 인수까지 선경이 석유사업 진출을 위해 시도했던 다양한 노력도 간과할 수 없는 대목입니다. 석유사업에 대해 단순히 예언하고 열망한다고 이루어진 것은 아닙니다. 이런 경우 자칫 경영자의 자기 오만(hubris)이나 자기과신(overconfidence), 자기만족으로 귀결될 여지가 있죠. 그렇기 때문에 자기충족적 혁신을 이뤄내기 위해서는 빅픽쳐, 그리고 혁신을 만들어 내는 도구(방법론)를 개발하는 것을 게을리하지 않는 끊임없는 자기혁신이 필요합니다."

울산 콤플렉스(CLX)는 다양한 사업을 가능케 하는 '변형적 과정'을 통해 새로운 혁신을 만들어냈다고 평가하셨는데요. 변형적 과정이란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설명한다면요.

"쉽게 이야기하면 돌연변이, 다양한 사업이 만들어질 수 있게 바탕을 만드는 겁니다. 기술개발은 다양한 사업을 만들어내는 원천이 될 수 있는데, 기업에서 만드는 기술은 대개 특정 제품이나 사업을 염두에 두고 개발된 것이기 때문에 그 활용도가 제한적일 가능성이 큽니다. 그러나 이 같은 목적에 부합하는 기술개발보다는 더 근원적인 기초과학에 근거한 기술개발을 주도해야 합니다.
울산 콤플렉스 내 석유정제 과정에서 나오는 나프타는 다양한 화학제품을 만들기 위한 중간산출물의 원료였고, 나프타에서 비롯된 중간산출물을 바탕으로 다양한 사업이 가능케 됐습니다. 물론 석유화학산업 자체가 애초 이런 변형적 사업이 가능한 것들로 구성돼 있고, 태생적으로 돌연변이를 만들어낼 개연성은 높습니다.
하지만 그 다각화의 정도는 기업이 어떤 기술을 가지고 어떤 사업을 시도하느냐에 따라 달라질 것입니다. 단기 성과에 매몰된 근시안적 경영(myopic management)에서 벗어나는 핵심은 R&D입니다. 이 사실을 오늘날 모르는 이들은 없죠. 그러나 울산 연구소가 만들어질 당시로 돌아가면 과연 R&D에 대규모 투자를 단행할 용단을 가진 기업가, 경영인들이 과연 얼마나 있었을까 하는 겁니다. 경영자의 도전 의식과 결단력, 그리고 이를 실행에 옮기기 위한 끈질긴 노력이 한데 합쳐서 만들어진 게 울산 콤플렉스인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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