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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주정완 논설위원이 간다

돈 되는 배출권 거래…해외는 활발, 국내는 썰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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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4면

주정완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고유가 시대 주목받는 탄소시장

주정완 논설위원

주정완 논설위원

지난 7일 경북 안동시 풍천면의 도시공원 천년숲. 숲길을 따라 조성한 산책로, 탁 트인 야외무대 등으로 시민들에게 여유로운 쉼터를 제공하는 곳이다. 경북도청 신도시에 위치한 이곳은 겉모습으로는 다른 지역 공원과 큰 차이가 없어 보인다. 하지만 결정적으로 다른 점이 있다. 공원의 나무들이 건강하게 잘 자라는 것만으로도 돈을 벌어들이고 있어서다. 4년 전 도시공원으로는 전국에서 처음으로 산림부문 배출권 거래제의 정부 인증을 받았다. 나무들이 이산화탄소를 흡수해 지구 온난화 속도를 늦추는 데 기여한 만큼 돈으로 보상받는 방식이다.

공원 입구에 세워둔 안내판을 살펴봤다. 매년 65t의 이산화탄소를 흡수하는 숲이라는 설명이 붙어 있다. 연간 1만㎞를 달리는 승용차로 환산하면 해마다 약 65대 분량이다. 천년숲은 축구장 11개 정도 면적(8만㎡)에 참나무·소나무·산수유 등 큰 나무만 5000그루 넘게 심었다. 산철쭉·진달래·영산홍 등 작은 나무까지 포함하면 7만여 그루에 이른다.

도시 공원에 나무 심고 배출권 받아
산불 피해지 등에도 관련 사업 추진

세계 1위 유럽, 연간 거래량 120억t
지난달 사상 최고가 기록 후 하락세

한국 거래규모는 유럽의 0.2% 수준
선물시장 개설 등 활성화 방안 시급

공원 안내판에는 산림부문 배출권 거래제에서 외부사업 1호로 승인받았다는 설명도 있다. 외부사업은 법적으로 온실가스 배출량을 감축할 의무가 없는 사업자가 자발적으로 참여했다는 뜻이다. 환경부 배출량 인증위원회가 천년숲에 대해 승인한 기간은 30년(2015~2045년), 온실가스 흡수 예상 총량은 1956t이다.

이상환 경북도 산림기획팀 주무관은 “천년숲에서 2020년까지 인증받은 온실가스 배출권은 238t”이라며 “시민들의 휴식 공간으로 활용하면서 배출권 거래로 수익도 낼 수 있어 1석2조”라고 소개했다. 13일 한국거래소의 온실가스(탄소) 배출권 시세(t당 2만7100원)로 계산하면 645만 원어치다. 그는 “언제 거래하느냐에 따라 배출권 시세도 달라진다. 앞으로 적절한 시점을 골라 매각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안동 천년숲 등 배출권 사업 인증

경북 안동 도시공원 천년숲에선 나무들이 이산화탄소를 흡수한 만큼 탄소 배출권을 받는다. 산림부문 외부사업 1호로 정부 인증을 받았다. 30년간 예상 총량은 1956t이다. 주정완 기자

경북 안동 도시공원 천년숲에선 나무들이 이산화탄소를 흡수한 만큼 탄소 배출권을 받는다. 산림부문 외부사업 1호로 정부 인증을 받았다. 30년간 예상 총량은 1956t이다. 주정완 기자

온실가스 배출권을 사고파는 건 남의 나라만의 얘기가 아니다. 국내에서도 2015년부터 배출권 거래 시장을 운영 중이다. 생활 주변에서 배출권 관련 사업을 벌이는 곳도 점점 많아지고 있다. 지금까지 전국에서 아홉 곳이 산림부문 배출권 거래제 외부사업으로 인증을 받았다. 전남 순천만 국가정원과 전북 새만금 방풍림 조성사업 등이다. 경북에선 천년숲과 함께 포항의 해도 도시숲과 철길숲이 등록 절차를 마쳤다. 한국임업진흥원에 따르면 2010년 이후 산이나 공원에서 나무를 새로 심거나 복원한 사업이면 정부 심의를 거쳐 등록할 수 있다. 서울시는 일부 아파트 단지에서 엘리베이터 소비 전력을 절약하는 방식으로 온실가스 배출권을 인정받기도 했다.

경북도는 산불 피해지의 산림 복원 사업에도 주목하고 있다. 2020년부터 산불 피해지에서도 배출권 거래제 외부사업을 할 수 있게 됐다. 도규명 경북도 산림기획팀장은 “지난 3월 경북 울진에서 대형 산불이 발생해 큰 피해를 봤다. 임야 소유자들과 협의해 산림 복원 사업을 등록하는 방안을 추진 중”이라고 말했다. 그는 “배출권 거래 수익으로 부동산 관련 세금을 충당할 정도만 돼도 소유자들의 관심이 커질 것”이라고 덧붙였다.

안동 천년숲 입구에서 탄소 배출권 거래제 외부사업을 소개하는 안내판. 주정완 기자

안동 천년숲 입구에서 탄소 배출권 거래제 외부사업을 소개하는 안내판. 주정완 기자

온실가스 배출권은 기업이나 공공기관이 이산화탄소 등의 배출량을 줄이는 데 중요한 인센티브로 작용한다. 이론적으로는 환경 보호와 배출권 거래 수익의 ‘두 마리 토끼’를 추구할 수 있다. 그런데 시장의 문을 열었다고 저절로 거래가 활발해지는 건 아니다. 국내 배출권 시장에는 긍정적인 변화도 있지만 한계도 뚜렷하다. 일반 투자자를 완전히 배제한 ‘그들만의 리그’이기 때문이다. 상장지수펀드(ETF) 등을 이용한 간접 투자도 안 된다. 외국인의 투자도 불가능하다. 투기 세력의 유입을 차단하는 효과는 있지만 시장 활성화에는 어려움을 겪고 있다.

현재 국내 배출권 시장에는 회원사 690여 곳만 참여할 수 있다. 시장의 운영은 한국거래소가 맡았다. 회원사 중 금융회사는 국책은행 2곳(산업·기업은행)과 증권사 18곳이 있다. 다른 은행이나 증권사는 명함도 내밀지 못한다. 압도적으로 숫자가 많은 건 배출권 할당 대상업체 670여 곳이다. 온실가스를 배출하는 사업장으로 정부가 지정한 곳이다. 철강·반도체 같은 제조업과 발전·수송 관련 업체 등이 여기에 속한다. 사업장마다 정부가 정해준 온실가스 감축 목표량이 있다. 이 목표량을 지키지 못하면 시장에서 돈을 내고 배출권을 사들여야 한다. 반대로 감축 목표량을 초과하면 배출권을 내다 팔 수 있다.

해외 배출권 ETF, 소액 투자 가능

2015년 1월 한국거래소에서 열린 온실가스 배출권 시장의 개장식 모습. [중앙포토]

2015년 1월 한국거래소에서 열린 온실가스 배출권 시장의 개장식 모습. [중앙포토]

배출권에 관심 있는 일반 투자자에게 전혀 방법이 없는 건 아니다. 국내가 아닌 해외 배출권을 거래하는 방법이다. 특히 올해는 글로벌 투자자들이 배출권 시장에 몰려드는 결정적인 계기가 있었다. 지난 2월 러시아의 침공으로 발생한 우크라이나 전쟁이다. 전쟁으로 석유·천연가스 공급에 심각한 차질을 빚으면서 에너지 가격이 급등했다. 해외 배출권 시장은 이런 에너지 가격 변화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모습이다.

해외 배출권 시장에서 대표 선수는 유럽연합(EU)이다. 지난해 거래량은 120억t으로 압도적인 세계 1위다. 손승태 한국거래소 배출권시장팀장은 “EU에선 금융회사 등 다양한 투자자들이 배출권 시장에 참여하고 있다. 현물보다는 파생상품인 배출권 선물의 거래 비중(89%)이 매우 높다”고 말했다. 미국은 국가 차원의 배출권 시장을 운영하지 않는다. 대신 동북부 9개 주 배출권 시장(RGGI)과 캘리포니아주 배출권 시장(CCA)에서 거래하고 있다.

ICE선물거래소에 따르면 EU 배출권 선물 가격은 지난달 19일 t당 97.67유로(약 13만6000원)로 사상 최고가를 기록했다. 1년 전(53.76유로)과 비교하면 80% 넘게 뛰었다. 물론 배출권 가격이 줄곧 오르기만 하는 건 아니다. 지난달 19일 정점에 오른 뒤 하락세로 돌아섰다. 지난 12일에는 t당 71.44유로에 거래를 마쳤다. 전 거래일(지난 9일 65.72유로)과 비교하면 8.7% 올랐다. 하지만 최고점에서 배출권을 산 투자자라면 3주일간 27%의 손해를 봤다.

국내에서 1만원 정도의 소액으로 해외 배출권에 투자할 수도 있다. 인터넷에 연결한 컴퓨터나 스마트폰만 있으면 된다. 국내 증권사를 통해 간접 투자 상품인 배출권 ETF의 주문을 내는 방식이다. 한국거래소에는 국내 자산운용사가 만든 네 가지 배출권 ETF가 상장돼 있다. 유럽에 주로 투자하느냐, 유럽과 미국에 함께 투자하느냐로 상품의 종류를 구분한다. 일반 주식처럼 1주 단위로 사고팔 수 있다. 해외 직구(직접구매)로 뉴욕 시장에 상장된 배출권 ETF를 사고파는 것도 가능하다.

국내 거래액 하루 24억원, 소형주 수준

거래가 활발한 해외 배출권 시장과 대조적으로 국내 시장은 썰렁한 모습이다. 지난해 국내 배출권 시장에서 거래량은 2600만t을 기록했다. EU 배출권 시장과 비교하면 0.2% 수준에 불과하다. 하루 평균 거래대금은 24억원에 그쳤다. 웬만한 코스닥 중·소형주보다 적거나 비슷한 수준이다. 거래가 부진하다 보니 배출권 시장은 매일 오전 2시간만 운영하고 문을 닫는다.

극심한 계절적 불균형도 문제로 꼽힌다. 평소에는 거래가 뜸하다가 특정 시점에만 반짝하고 거래가 몰리는 현상이다. 매년 6월이면 배출권 거래가 집중된다. 정부에서 배출권을 할당받은 업체들이 최종 정산을 하는 시기다. 만일 배출권이 남으면 다음 해로 이월할 수도 있다. 다만 일정한 물량은 시장에서 반드시 팔아야 한다는 조건이 붙어 있다. 그러니 6월이면 급매로 팔아치우려는 업체와 급하게 사들이려는 업체가 뒤섞여 배출권 가격이 요동칠 수 있다. 익명을 원한 업계 관계자는 “상당수 업체에서 배출권 담당자의 전문성이 높지 않다. 그러니 미리 대비하지 않고 마감시한에 닥쳐서 움직이는 경향이 있다”고 말했다.

국내 배출권 시장을 활성화하려면 일반 투자자의 참여를 허용하고 파생상품인 선물 시장의 문을 열 필요가 있다. 정부와 한국거래소도 이런 점을 인정하지만 아직 구체적인 일정은 내놓지 않았다. 우선 연구용역을 통해 세부 추진 방안을 검토한다는 계획이다. 환경부는 지난 2월 선물시장 개설 방안을 포함한 ‘배출권 거래시장 고도화 방안’의 연구용역을 발주했다. 한국거래소도 지난 5월 ‘배출권 선물 상장 및 활성화 방안’의 연구용역 입찰을 진행했다. 손승태 팀장은 “배출권 선물을 활용하면 가격 변동의 위험을 관리하고 투자비용도 절감하는 장점이 있다. 선물 시장의 설계 방안과 도입 시기 등을 환경부와 협의 중”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