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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역주행 통화정책…‘나쁜 엔저’ 부메랑 됐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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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1면

안전자산 엔화의 추락

“코로나19로 물류비용이 올랐지만, 가격 인상을 안 하고 버텼는데, 이제 한계네요.”

일본 지바(千葉) 현에서 직원 약 30명의 식품업체를 운영하는 네 시무라(가명) 사장은 “연내엔 상품 가격을 올릴 수밖에 없을 것 같다”며 한숨을 내쉬었다. 이 회사 제품 원재료의 절반 이상은 수입으로, 엔화 가치가 떨어지면 그만큼 부담이 늘어난다.

그래픽=차준홍 기자 cha.junhong@joongang.co.kr

그래픽=차준홍 기자 cha.junhong@joongang.co.kr

엔화 가치가 24년 만에 가장 낮은 달러당 140엔대로 추락했지만, 일본은행은 ‘엔저(低)’와 저금리 정책을 포기할 기미가 없다. 구로다 하루히코(黑田東彦) 총재의 고집에 안전자산이란 엔화의 지위도 위태롭다.

엔화 가치는 지난 7일 달러당 144엔대까지 밀렸다. 아시아 외환위기 때인 1998년 8월 이후 24년 만에 최저였다. 13일에도 엔화 가치는 달러당 142엔을 오가고 있다. 최근 JP모건은 달러당 147엔까지 떨어질 거로 내다봤다.

미·일 두 나라의 금리 격차는 갈수록 커지고 있다. 미 연방준비제도(Fed)는 올해 들어 지난 7월까지 기준금리를 2.25%포인트 인상했다. 이달에도 최소 0.5%포인트 인상에 무게가 실린다.

그래픽=차준홍 기자 cha.junhong@joongang.co.kr

그래픽=차준홍 기자 cha.junhong@joongang.co.kr

일본의 단기금리는 마이너스(-0.1%)다. 장기금리 차는 더 크다. 지난 12일 기준 일본 10년물 국채 금리는 연 0.244%다. 같은 날 미국 10년물 국채금리는 연 3.362%에 마감했다. 미·일 국채 10년물 금리 차는 3%포인트가 넘는다.

엔화를 던지고 달러를 사는 수요가 늘어날 수밖에 없다. ‘엔화 엑소더스’를 불러오는 0%대 장기금리는 일본의 통화정책 때문이다. 인위적인 수익률곡선제어(YCC) 정책에 따라 일본은행은 장기금리 지표인 10년물 국채금리 상단을 0.25%에 묶어두고 있다. 이 수치를 넘으면 일본은행은 무제한 (국채) 매입(채권값 상승, 금리 하락)을 통해 금리를 낮춘다. 장단기 금리 역전을 막기 위해서다.

통화 가치가 떨어지면 금리를 올려 자금이 빠져나갈 문턱을 높이는 게 일반적이다. 미국의 보폭에 발맞춰 금리 인상에 나서는 한국 등이 대표적인 예다.

하지만 일본은행의 선택은 다르다. ‘긴축 결의’의 장(場)이었던 지난달 미국 잭슨홀 미팅에서도 구로다 총재는 “임금과 물가가 안정적이고 지속 가능한 형태로 상승할 때까지 완화 이외에는 선택지가 없다”고 독자 노선을 강조했다. 또 구로다는 “미국과 금리 차가 크지 않은 영국과 한국 통화가치도 급락하고 있다”고 반박했다고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전했다. 더딘 걸음을 하던 물가 상승세도 최근 에너지 가격 급등의 영향으로 목표치(2%)를 웃돌고 있지만, 이 정도로는 부족하다는 입장이다.

일본은행이 이처럼 공고한 물가 오름세에 연연하는 건 장기 불황의 트라우마 때문이다. 가계와 기업이 투자나 소비를 하기보단 돈을 쟁여만 놨다. 줄어든 민간 수요를 보완하기 위해 정부가 재정 지출을 늘렸다.

금리를 낮춰 기업의 투자를 유도하고 엔저로 경쟁력을 확보한 기업이 돈을 벌어 실적을 늘리고, 이를 통해 임금을 늘려 소비를 회복시키는 선순환이 구로다의 구상이다.

하지만 이런 구상은 통하지 않는 시대가 됐다. 2000년대 말 엔고를 타개하기 위해 제조업체 상당수가 생산 기반을 해외로 이전한 탓이다.

구로다의 역주행 통화정책은 오히려 ‘나쁜 엔저’란 부메랑으로 돌아오고 있다. 기업의 실적 개선에도 임금은 제자리걸음이다. 저금리가 이어지며 이자 소득이 줄고, 엔저로 수입 물가 등이 오르며 실질 구매력 하락 등의 부작용이 발생하고 있다.

도쿄상공리서치가 8월 1~9일 일본 내 기업 5907곳을 조사했더니 “엔저가 경영에 마이너스”라고 답한 기업이 48.7%였다. “플러스가 될 것”이라고 답한 기업은 3.2%에 그쳤다.

엔저·저금리 여파, 투기세력 먹잇감 된 엔화·일본국채

지난 8일 세일을 알리는 도쿄 신주쿠 광고판 앞에 서 있는 일본 시민들. 달러당 엔화는 역대 최저 수준을 기록하고 있다. [EPA=연합뉴스]

지난 8일 세일을 알리는 도쿄 신주쿠 광고판 앞에 서 있는 일본 시민들. 달러당 엔화는 역대 최저 수준을 기록하고 있다. [EPA=연합뉴스]

13일 니혼게이자이신문(닛케이) 분석에 따르면 엔저에 따른 일본 수출기업의 이익 증가 폭은 20년 전보다 절반 가까이 줄었다. 야마토 증권 분석 결과 달러당 엔화 가치가 1엔 하락할 경우 2000년에는 기업의 경상 이익이 0.7% 늘어나는 효과가 있었지만, 현재는 0.4%에 그친다. 수출 대신 해외 생산을 택한 기업들이 크게 늘어서다.

오히려 엔저와 저금리로 엔화와 일본 국채는 투기 세력이 노리는 먹잇감이 되고 있다. 도시마 이쓰오 도시마&어소시에이츠 대표는 지난 7일 니혼게이자이 인터넷판에 “그동안 일본 엔화에 관심을 보이지 않던 외국인 투자자까지 (시장에) 뛰어드는 걸 검토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런데도 일본은행이 당장 통화정책의 방향을 틀 가능성은 작다. 막대한 국채 발행 규모 등을 고려하면 금리 인상에 따른 이자 부담과 일본은행이 보유한 국채의 평가손 발생 우려도 부담이 되기 때문이다.

시장 개입도 쉽지 않다. 블룸버그 통신은 “시장 개입을 위해서는 미국과의 공조가 필요한데 인플레 압력에 시달리는 미국이 엔화 강세를 용인할 가능성은 작다”고 진단했다.

아사히신문은 최근 “엔저로 대기업 제조업체의 이익이 늘어나는 것은 틀림없지만, 전력이나 가스, 생활필수품의 가격이 줄줄이 올라 그 고통이 일본 전체로 퍼지게 될 것”이라 우려하면서 “현재 정부는 손을 쓰고 싶어도 움직일 방법이 없는 실정”이라고 진단했다.

금리정책 미세조정을 전망하는 전문가도 나온다. 이다은 대신증권 연구원은 “YCC 정책에 따른 부작용을 줄이기 위해 장기금리 지표를 현재의 국채 10년물 금리에서 5년물 금리로 변경할 가능성이 존재한다”고 밝혔다.

부작용이 커지면서 구로다 총재의 임기가 끝나는 내년 4월 통화정책이 달라질 수 있다는 예상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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