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日 역주행 통화정책에 '1달러=144엔'...‘나쁜 엔저’ 부메랑 맞나

중앙일보

입력

일본 도쿄에 있는 일본은행의 본점의 모습. [로이터=연합뉴스]

일본 도쿄에 있는 일본은행의 본점의 모습. [로이터=연합뉴스]

 엔화의 '날개 없는 추락'에도 일본은행은 여전히 통화정책 실험 중이다. 엔화가치가 24년 만에 가장 낮은 수준으로 떨어졌지만 ‘엔저(低)’와 저금리 정책을 포기할 기미가 없다. 구로다 하루히코(黑田東彦) 총재의 고집스러운 믿음에 안전자산이란 엔화의 지위도 위태롭다. 자칫 투기세력의 먹잇감까지 될 조짐이다.

 엔화가치는 지난 7일 달러당 144엔대로 밀렸다. 아시아 외환위기 시절인 1998년 8월 이후 24년 만에 가장 낮은 수준이다. 엔화값 하락의 마지노선으로 여겨지던 ‘1달러=140엔’이 무너진 뒤 이 선을 쉽게 넘지 못하고 있다. 13일에도 엔화가치는 달러당 142.52엔 수준을 오가고 있다. 일본 정부의 구두개입도 무소용이다. 최근 JP모건은 엔화가치가 달러당 147엔까지 밀릴 수 있을 것으로 예상했다.

 엔화의 자유낙하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다. 긴축의 가속 페달을 제대로 밟는 미국이 기준금리를 공격적으로 인상하며 달러 표시 자산이 매력적인 투자처가 되면서다. 미 연방준비제도(Fed)는 올해 들어 지난 7월까지 기준금리를 2.25%포인트 인상했다. 이달에도 최소 0.5%포인트 인상에 무게가 실린다.

 두 나라의 금리 격차는 갈수록 커지고 있다. 일본의 단기금리는 마이너스(-0.1%)다. 장기금리차는 더 크다. 지난 12일 기준 일본 10년물 국채 금리는 연 0.244%다. 같은 날 미국 10년물 국채금리는 연 3.362%에 장을 마감했다. 미국과 일본의 국채 10년물 금리 차는 3%포인트가 넘는다.

그래픽=차준홍 기자 cha.junhong@joongang.co.kr

그래픽=차준홍 기자 cha.junhong@joongang.co.kr

 돈은 금리가 낮은 곳에서 높은 곳으로 흐른다. 돈이 일본을 떠나 미국으로 흘러드는 건 자연스럽다. 엔화를 던지고 달러를 사는 수요가 늘어날 수밖에 없다. 엔화값을 끌어내리는 요인이다. 구로다의 굳건한 신념에 엔저 하락에 베팅하는 수요도 늘고 있다. 하락세를 더 부추긴다.

 ‘엔화 엑소더스’를 불러오는 0%대 장기금리는 일본의 통화정책 때문이다. 인위적인 수익률곡선제어(YCC) 정책에 따라 일본은행은 장기금리 지표인 10년물 국채금리 상단을 0.25%에 묶어두고 있다. 이 수치를 넘으면 일본은행은 무제한 (국채) 매입(채권값 상승, 금리 하락)을 통해 금리를 낮춘다. 장단기 금리 역전을 막기 위해서다.

 제로 금리에 자금 이탈이 이어지며 통화 가치가 떨어지면 금리를 올려 자금이 빠져나갈 문턱을 높이는 게 일반적이다. 미국의 보폭에 발맞춰 금리 인상에 나서는 한국 등이 대표적인 예다.

구로다 하루히코 일본은행(BOJ)총재. 중앙포토

구로다 하루히코 일본은행(BOJ)총재. 중앙포토

 하지만 일본은행의 선택은 다르다. 주요국의 긴축 기조에도 흔들림 없이 ‘통화 완화 마이웨이’다. ‘긴축 결의’의 장(場)이었던 지난달 잭슨홀 미팅에서도 구로다 총재는“임금과 물가가 안정적이고 지속 가능한 형태로 상승할 때까지 완화 이외에는 선택지가 없다”고 독자 노선을 강조했다.

 외따로 통화정책이 엔저를 부른다는 비판의 목소리에도 구로다는 “미국과 금리 차가 크지 않은 영국과 한국 통화가치도 급락하고 있다”고 반박했다고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전했다. 긴축으로 통화 가치를 높이는 건 근거 없다는 것이다. 환율은 재무성의 문제이지, 중앙은행의 일이 아니라는 것도 구로다의 시각이다.

 일본 경제 회복을 위한 구로다의 처방은 저금리와 엔저다. ‘저금리·엔저→기업실적 향상→임금 증가→가계소비 회복’에 따른 디플레이션 탈출이 목표다. 더딘 걸음을 하던 물가 상승세도 최근 에너지 가격 급등의 영향으로 목표치(2%)를 웃돌고 있지만 이 정도로는 부족하다는 입장이다.

 한국은행은 지난달 ‘해외경제포커스’에서 “비용 측면의 물가상승은 일본은행이 목표로 하는 물가 상승과 상이하며, 일본은행은 임금 상승을 수반하는 2%대의 물가 목표가 안정적·지속해서 실현되는 것이 필요하다는 입장”이라고 지적했다. 이를 위해 계속 돈을 풀 것이란 분석이다.

 일본은행이 이처럼 공고한 물가 오름세에 연연하는 건 장기간 이어진 트라우마 때문이다. 경제의 거품이 무너지고 가계와 기업이 채무 상환에 나선 뒤 경제 주체가 빚을 내기를 꺼리게 됐다. 기업도 투자보다 돈을 쟁여만 놓으며 ‘대차대조표 불황’이 나타난 것이다. 줄어든 민간 수요를 보완하기 위해 등장한 것이 정부다. 경기를 뒷받침하기 위해 정부가 재정 지출을 늘렸다.

그래픽=차준홍 기자 cha.junhong@joongang.co.kr

그래픽=차준홍 기자 cha.junhong@joongang.co.kr

 이를 위해 금리를 낮춰 기업의 투자를 유도하고 엔저로 경쟁력을 확보한 기업이 돈을 벌어 실적을 늘리고, 이를 통해 임금을 늘려 소비를 회복시키는 선순환을 유도하겠다는 것이 구로다의 구상이다. 이 과정에서 필요한 것이 가계와 기업의 뇌리에 각인된 디플레의 기억을 지우는 것이다. 저물가에 대한 인식이 사라질 때까지 물가를 끌어올리고 그를 위해 돈을 푼다는 것이다.

 하지만 구로다의 역주행 통화정책은 ‘나쁜 엔저’란 부메랑으로 돌아오고 있다. 기업의 실적 개선에도 임금은 제자리걸음이다. 저금리 기조가 이어지며 이자소득이 줄고, 엔저로 인해 수입 물가 등이 오르며 실질 구매력 하락 등의 부작용이 발생하고 있어서다.

 에너지 가격 급등에 엔저까지 겹치며 기업과 가계의 부담은 더 커지고 있다. 게다가 주요 기업이 사업장을 해외로 옮기면서 엔저의 실질적 효과는 옅어진 상황이다. 내수 기업만 타격을 입고 있다.

엔화 가치가 24년만에 가장 낮은 수준인 달러당 140엔대에 머무르고 있다. 사진은 지난 3월 서울 중구 하나은행 위변조대응센터에서 직원이 달러화와 엔화를 정리하는 모습. 연합뉴스

엔화 가치가 24년만에 가장 낮은 수준인 달러당 140엔대에 머무르고 있다. 사진은 지난 3월 서울 중구 하나은행 위변조대응센터에서 직원이 달러화와 엔화를 정리하는 모습. 연합뉴스

 오히려 엔저와 저금리로 엔화와 일본 국채는 투기세력이 노리는 먹잇감이 되고 있다. 구로다의 엔저 고수에 엔화 순매도 포지션은 상당한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 엔화가치가 24년 만에 가장 낮은 수준으로 떨어지자 일본은행의 통화정책 전환에 대한 베팅도 이어지며 지난 6월 일본 국채 매도가 급증(채권 금리 상승)했다.

 도시마 이쓰오 도시마&어소시에이츠 대표는 지난 7일 니혼게이자이(日本經濟) 신문 인터넷판 기고문에서 "일본은행과 재무성은 움직이지 않는다는 인식이 공유되며 엔 매도가 '저위험'이라 여겨지고 있다"며 "그동안 일본 엔화에 관심을 보이지 않던 외국인 투자자까지 (시장에) 뛰어드는 걸 검토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매도가 매도를 부르는 것이다.

 그럼에도 일본은행이 당장 통화정책의 방향을 틀 가능성은 작다. 재정 확대를 통한 경기 부양을 포기하기 힘든 데다 막대한 국채 발행 규모 등을 감안하면 금리 인상에 따른 이자 부담과 일본은행이 보유한 국채의 평가손 발생 우려도 부담이 되기 때문이다.

 엔화 약세 방어를 위한 시장 개입도 쉽지 않다. 블룸버그 통신은 “시장 개입을 위해서는 미국과의 공조가 필요한 데 인플레 압력에 시달리는 미국이 달러 약세에 영향을 줄 수 있는 엔화 강세를 용인할 가능성은 작다”며 “구두 개입 정도에 그칠 가능성이 크다”고 지적했다. 엔화 약세가 일본 내부의 문제가 아닌 달러 강세에 따른 문제로 판단하기 때문이다.

 다만 통화정책의 미세 조정 가능성은 있다. 이다은 대신증권 연구원은 “YCC 정책에 따른 부작용을 줄이기 위해 철회는 아니더라도 장기금리 지표를 현재의 국채 10년물 금리에서 5년물 금리로 변경할 가능성이 존재한다”고 밝혔다.

 부작용이 커지면서 통화 정책 전반의 재검토도 이뤄질 수 있다는 전망도 나온다. 특히 구로다 총재의 임기가 끝나는 내년 4월 통화정책이 달라질 수 있다는 예상에 무게가 실린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
ADVERTISEMENT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