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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고현곤 칼럼

친문 국책연구원장들의 불편한 처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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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고현곤 기자 중앙일보 편집인
고현곤 논설주간 겸 신문제작총괄

고현곤 논설주간 겸 신문제작총괄

지난해 여름 한국개발연구원(KDI)에서 보고서 하나가 논란이 됐다. 요지는 ‘2017년 신고리 원전 5, 6호기 공론화 때 진보 성향 의견이 과다 대표됐다’는 것. 균형감을 잃고 원전 축소로 몰아갔다는 얘기다. 문재인 정부로선 뼈아픈 지적이었다. 신문 1면 톱도 가능한 내용이었다. 홍장표 원장은 ‘시의성이 떨어지고, 새로운 내용이 없다’며 제동을 걸었다고 한다. 언론에 보도자료를 배포하지 않고, 보고서를 KDI 홈페이지에만 살짝(?) 올리는 것으로 절충했다.

홍 원장은 문 정부 실패 정책인 소득주도 성장의 설계자다. 지난해 5월 원장 취임 때부터 ‘낙하산’ 논란으로 시끄러웠다. 그 뒤 KDI 특유의 예리한 연구가 줄었다는 뒷말이 많았다. 정권이 바뀐 후에도 홍 원장은 따가운 시선을 아랑곳하지 않고 버텼다. 보다 못한 한덕수 총리가 “소주성 설계자가 KDI 원장으로 있는 건 말이 안 된다”며 직격탄을 날렸다. 순순히 물러나진 않았다. 홍 원장은 사퇴하면서 “국책연이 정권의 나팔수가 돼야 하느냐”며 장문의 반박문을 냈다. 문 정부에서 비판 보고서를 억눌러 가며 코드를 맞추더니 윤석열 정부가 들어서자 갑자기 독립투사가 된 것이다. 1년 남짓 재임 동안 최고 싱크탱크 KDI에 상처를, 국민에게는 씁쓸한 뒷맛을 남겼다.

국책연, 연구 독립성 중요하지만
국정철학 큰 틀은 정부와 공유해야
정반대 생각 갖고 원장 자리 지키면
연구원·국가는 물론 본인도 불행

국책연은 국민 세금으로 운영한다. 국정에 도움을 주는 연구와 조언을 한다. 독립성을 중요하게 여기면서도 국정철학의 큰 틀을 정부와 공유한다. 홍 원장처럼 180도 다른 생각을 갖고 국책연을 이끄는 것은 무리다. 정부는 동쪽으로 가는데, 서쪽이 맞다고 우기는 셈이다. 새 정부 민간주도 성장을 이윤주도 성장이라 비판하는 홍 원장이 계속 있었으면? KDI가 역할을 못하고, 세금만 축내는 곤혹스러운 상황이 이어질 뻔했다.

지난 7월 친문의 간판인 홍 원장과 황덕순 노동연구원장이 물러나자 국책연구원장들의 줄사퇴가 예상됐다. 하지만 두달째 감감무소식이다. 문 정부 국정철학을 신봉하고, 새 정부의 성공을 바라지 않는 사람들이 곳곳에 있다. 정해구 경제인문사회연구회 이사장은 친노·친문 학자다. 문 정부 초기 국가정보원 적폐청산을 주도했다. 올 대선 후 토론회에서 “소주성 논란은 타당한 근거를 바탕으로 하기보다는 정쟁적 이해를 목적으로 전개된 측면이 있다”고 말했다. 문 정부를 공격하기 위해 소주성 성과를 깎아내렸다고 불만을 토로한 것이다.

강현수 국토연구원장은 문 정부 부동산 정책을 설계한 김수현 사단의 핵심이다. 국토연은 지난해 9월 “강남 집값이 오른 건 언론 때문”이라는 허무맹랑한 보도자료를 냈다. 부동산 참사를 반성하기는커녕 언론에 책임을 떠넘긴 것이다. 홍현익 국립외교원장은 “한·미 훈련을 하지 않아도 된다” “북한 미사일 발사를 문제 삼지 않는 게 핵 해결에 도움이 된다”는 발언으로 거듭 구설에 올랐다. 국립외교원은 외교 전략을 연구하는 외교부 산하 국가기관이다. 새 정부 외교안보 정책과 달라도 너무 다른 그가 국립외교원장으로 있다. 정상은 아니다.

노무현 정부 청와대 행정관 출신인 임춘택 에너지경제연구원장은 탈원전론자다. “원전 생태계를 조속히 복원하라”는 윤 대통령과 대척점에 있다. 지난 5월 인터뷰에서 “영구 정지한 고리1호기와 월성1호기는 이전 정부에서 사실상 결정된 것을 문 정부가 이행한 것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검찰이 월성1호기 폐쇄 강요를 수사 중인데, 문 정부는 책임 없다고 두둔한 것이다. 청와대 게시판에 ‘(월성1호기) 외벽에 철근이 노출돼 있다’는 글을 올렸던 문미옥 과학기술보좌관은 현재 과학기술정책연구원장이다.

박종규 금융연구원장은 문 정부 첫 2년반 청와대 재정기획관으로 일했다. 2013년 ‘임금상승률이 실질 국내총생산 증가율보다 낮다’는 보고서로 소주성의 토대를 제공했다. 금융연구원은 국책연은 아니지만, 정부와 금융정책을 논의한다. 주현 산업연구원장은 홍장표 수석 밑에서 중소기업비서관을 지냈다. 이태수 보건사회연구원장은 문 정부 국정기획자문위원, 2016년 총선 때 민주당 비례대표 18번을 받았다. 새 정부와 결이 다른 국책연구원장들이 넘쳐난다.

문 정부가 지난해 정치색 짙은 청와대·위원회 출신을 대거 국책연구원장에 앉힌 게 잘못이다. 임기는 대부분 2024년까지다. 물론 원장 임기 3년은 법으로 정해져 있다. 직전 정부에서 일한 경력이 흠결은 아니다. 하지만 국정철학이 정반대고, 소주성 부활을 꿈꾼다면 지금 할 수 있는 게 별로 없다. 윤 대통령은 개혁 적기인 첫 2년간 국책연의 조언을 받지 못할 판이다. 외환위기급의 퍼펙트 스톰이 닥치고 있다. 국책연의 지혜가 절실한 때인데, 아쉽다.

친문 국책연구원장들은 민간으로 돌아가는 게 맞다. 본인도 살고, 연구원도 살고, 나라도 살리는 길이다. 소주성·탈원전·재정확대에 뜻을 같이하는 민간연구소나 시민단체를 찾든지, 학교로 가든지, 책을 쓰든지…. 지금 자리를 고집한다면 이런 의문이 들 수밖에 없다. 국정을 훼방놓으려는 심산이거나 ‘내가 맞다’며 오기를 부리거나. 그것도 아니면 번듯한 명함과 월급·차량을 포기하지 못하는 생계형이거나. 어떤 경우에도 아름다운 모습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