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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김두식의 이코노믹스

중국이 불댕긴 반도체 지원, 미국은 전기차로 맞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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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글로벌 보조금 경쟁 어디까지…

법무법인 세종 대표변호사·국제통상법센터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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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보조금은 시장경제 원칙에 반하는 나쁜 행위로 생각돼 왔다. 국가가 개입해 산업 경쟁력을 왜곡하는 불공정한 행위로 규제됐다. 그러나 이제 보조금은 없애야 할 행위가 아니라, 필수물자를 확보하기 위해 혹은 치열한 국제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 활용하는 중요한 정책수단이 되고 있다. 미·중 대립과 공급망 위기 속에 반도체·전기차 등 첨단기술 제품을 대상으로 각국의 보조금 경쟁이 벌어지고 있다.

보조금 경쟁은 미국과 중국이 불을 댕겼다. 중국은 2015년 ‘중국제조 2025’의 기치 아래 2025년까지 중국 반도체 수요의 70%를 자체 생산하겠다는 야심 찬 계획을 밀어붙였다. 2015년부터 2025년까지 중국 정부가 반도체 산업에 쏟아부은 돈은 미화로 2000억 달러에 달할 것으로 추정된다.

“보조금은 불공정” 국제 규범 와해
중국 견제 급한 미국, 보조금 투입

미, 반도체에 이어 전기차도 포함
일·EU도 반도체 보조금 경쟁 가세

WTO 기능 상실, 제소해도 무의미
한국도 관련 제도 전면 정비해야

미 바이든 대통령의 승부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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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기술패권을 다투는 미국은 지난달 9일 바이든 대통령이 ‘칩(CHIPS)과 과학법’에 서명하면서 과감한 반도체 지원에 나섰다. 이 법에는 미국 내 반도체 개발 및 제조를 지원하기 위해 약 700억 달러에 달하는 펀드를 조성하고 25% 투자세액 공제 등 각종 지원을 제공한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반도체 공급망에서 중국을 배제하기 위한 장치도 있다.

연방정부 보조금을 받은 기업은 10년 동안 중국 등 이른바 ‘우려 국가’와 첨단 반도체 거래를 하지 못할 뿐 아니라 중국 내 기존 반도체 생산도 확장하지 않겠다는 각서를 제출해야 한다는 조항이다. 이 때문에 미국에 투자하는 한국 반도체 업체들은 미국이 주는 보조금을 받을 것이냐 아니면 중국 사업을 조정할 것이냐 하는 선택을 해야 하는 상황이다.

일본과 유럽연합(EU)도 보조금 경쟁에 뛰어들었다. 1980년대까지 반도체 강국이던 일본은 반도체 산업 부흥을 위해 2021년 약 68억 달러를 지원했다. 올해에는 미국과 차세대 반도체 개발을 위한 공동 태스크포스를 만들기로 합의했다. EU도 반도체 지원을 서두르고 있다. 지난 8월 초 공개된 EU 반도체 지원법안(EU Chips Act)에 따르면 EU는 ‘유럽 반도체 이니셔티브’(Chips for Europe Initiative)를 출범시켜 반도체 개발 및 생산을 전폭적으로 지원할 계획이다. 정부와 민간 자금 약 430억 유로를 투입해 반도체 개발에서 제조까지 아우르는 생태계를 구축, 현재 10% 미만인 EU의 세계 반도체 시장 점유율을 20% 이상으로 끌어 올린다는 것이 EU의 목표다.

그래픽=김영옥 기자 yesok@joongang.co.kr

그래픽=김영옥 기자 yesok@joongang.co.kr

미국은 한술 더 떠 국제규범을 노골적으로 무시하는 차별적인 전기차 보조금법을 도입했다. 지난 8월 16일 바이든 대통령이 서명한 미국의 ‘인플레이선 감축법’은 기후변화 대응을 이유로 전기차에 보조금을 지급하기로 하면서 미국에서 제조되지 않은 전기차는 보조금 지급대상에서 제외하고 있다. 이런 형태의 보조금은 세계무역기구(WTO) 보조금협정에서 엄격히 금지하는 전형적인 ‘수입대체’ 보조금에 해당한다.

현대기아차에 미치는 충격파

미국에 13조원을 투자하겠다는 의사를 밝히고 미국 정부의 지원을 기대했던 현대자동차로서는 투자계획을 재조정해야 할 판이다. EU와 한국은 이 법이 WTO 협정 위반이라는 입장을 미국에 전달했다고 한다. 우리가 WTO 분쟁절차에 미국을 제소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WTO 분쟁제도가 사실상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에서 WTO 제소로 이런 편파적인 보조금 입법을 바로잡을 수 있을지 의문이다.

보조금 경쟁에 뛰어든 국가들이 다른 나라 보조금에 관대한 것만은 아니다. 자국 산업에 대한 보조금 지원은 늘리면서도 남이 주는 보조금은 비난하고 엄격히 규제하려는 이중잣대를 적용하기도 한다. EU가 올해 중에 도입하려고 하는 ‘외국 보조금 규정’이 그런 예다.

EU의 외국 보조금법은 한마디로 외국 보조금 문제를 WTO 분쟁절차에서 해결하지 않고 EU 집행위가 자체 조사해서 EU가 할 수 있는 제재를 일방적으로 가하겠다는 것이다. 이 법안에 의하면, EU 시장을 왜곡하는 보조금 수혜기업은 EU 내에서의 생산능력 또는 시장점유율을 감축해야 하거나, 투자 철수 혹은 받은 보조금 반환 등의 조치를 당할 수 있다.

EU, WTO 안 거치고 외국 보조금 제재

그뿐만 아니라 EU 기업을 인수 합병하거나 EU 기업과 합작투자를 하는 것이 제한될 수 있고 EU에서 실시하는 공공조달 참여가 금지될 수도 있다. EU는 WTO 협정 등 다른 나라와 맺은 협약상 의무는 준수하겠다고 했지만, 외국 보조금 문제를 EU 집행위가 조사하고 판단하는 것부터가 WTO 규범을 벗어난 것이다.

EU 보조금법의 시행시기는 내년 중반으로 예상된다. 그러나 시행시기가 언제든 간에 5년 전에 지급된 보조금에 대해서까지 법이 소급적용 되기 때문에 외국기업에 미칠 파급효과는 상당할 것이다. 미국의 언론매체 폴리티코는 EU 외국 보조금법의 주된 타깃으로 철강·알루미늄 업체, 인프라 업체, 기술 및 에너지업체, 그리고 조선업을 포함한 운송 관련 업체를 꼽았다.

이와 관련해 특히 이른바 구조조정 보조에 대한 EU의 부정적인 시각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EU법은 외국 정부가 장기적인 회생계획이 없는 부실기업을 살리기 위해 지원하는 행위가 EU 시장을 가장 크게 왜곡한다고 본다. 이는 20여년 전 대우조선해양 구조조정과 같은 사례를 염두에 둔 것으로 생각된다.

보조금 커지면 구조조정도 어려워져

대우조선해양은 구조조정(워크아웃)을 통해 기사회생한 사례다. 2000년 말 도산위기에 처했던 대우중공업(현대두산인프라코어와 대우조선해양의 모태)의 채권단은 조선 부문을 분리해 대우조선해양이라는 회사를 만든 다음, 금융기관 대출채권을 주식으로 전환했다. 일부 부채에 대해서는 만기 연장, 이자 감액, 단기채의 장기채 전환 등을 통해 회사의 재정부담을 덜어줬다. 때마침 중국의 경제성장으로 물동량이 증가하고 선박 발주량이 많이 증가한 데 힘입어 대우조선해양의 경영상태는 급속히 개선됐다.

세계 조선시장에서 한국과 경쟁하고 있던 EU는 반발했다. 시장에서 퇴출당하였어야 할 조선소들이 정부 보조금으로 살아남아 저가 수주행위로 유럽 조선소들에 피해를 줬다면서 2002년 10월 한국 정부를 WTO에 제소했다.

이 사건에서 EU는 구조조정에 참여한 채권단이 한국 정부의 지시를 받아 출자전환이나 부채탕감을 해준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우리가 내세운 주된 방어논리는 경제논리였다. 채권단의 구조조정은 상업적으로 합리적인 결정이므로 불법 보조금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조선소를 파산시킬 경우 채권단이 회수할 수 있는 청산가치보다 계속기업으로 살릴 경우의 가치가 높다는 회계법인의 보고서가 우리 주장의 기초가 됐다. EU는 구조조정안의 문제점들을 조목조목 지적하면서 시장원리에 반한다고 주장했지만, 우리 방어논리를 근본적으로 깨지는 못했다. 이 사건은 결국 2년여에 걸친 치열한 법정 공방 끝에 사실상 한국의 승소로 끝났다.

지금 다시 EU가 대우조선해양에 대해 보조금 분쟁을 제기한다면 우리가 과연 또 방어할 수 있을까. 외국 보조금법이 시행된다면 이제 EU는 한국의 조선 보조금 문제를 WTO로 끌고 가지 않고 자국 내 조사절차에서 다루려 할 것이다. 보조금 문제가 WTO의 손을 떠나 EU 국내절차에서 다루어지는 이상 20년 전 사건에서와 같은 공정한 결과를 기대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보조금 줄여야 자유시장 협력 가능

지금까지 미국 EU 등 서방 국가들은 중국의 반시장적 산업보조금을 비난하면서 국제규범과 가치에 기반을 둔 국제경제 질서를 따르라고 말해 왔다. 미국은 같은 생각을 가진(like-minded) 자유민주주의 시장경제 국가 간의 연대도 강조했다.

그러나 그들 스스로 WTO 규범을 무시하고 우방국 기업들에 대해서까지 차별적인 보조금법을 쏟아낸다면 자유시장 경제를 신봉하는 국가들의 협력체제는 무너질 수밖에 없다. 보편적 가치는 찾을 수 없고 오직 자국 중심주의의 민낯을 보여주는 보조금 경쟁은 자제되어야 하는 이유다.

다른 한편 세계 각국이 안정적인 공급망을 확보하고 기술산업을 육성하기 위해 보조금 경쟁을 벌이고 있는 건 엄연한 현실이다. 그동안 우리 정부는 국제 보조금 규범을 지나치게 의식하거나 통상마찰을 우려해 산업 지원에 주저해온 측면이 없지 않다. 이제 보조금 정책에서 최우선 판단 기준은 국익, 특히 우리 기업들의 경쟁력 강화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쏟아져 나오는 외국의 보조금 입법에 면밀하게 대응하는 한편, 국제 흐름에 맞추어 우리의 보조금 정책과 관련 제도를 점검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김두식 법무법인 세종 대표변호사·국제통상법센터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