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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은 "절대로 핵 포기 없다"…선제 핵 공격 법제화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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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핵 포기 불가"를 선언하고 사실상 자의적 판단에 의해 "선제 핵 공격"을 할 수 있도록 명시한 핵무력 정책을 법령으로 채택했다. 비핵화 협상으로 가는 다리를 스스로 끊어버린 셈인데 새로 발표한 '핵 독트린'이 말에 그치지 않는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 조만간 핵실험 등 중대 도발에 나설 가능성이 제기된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8일 평양에서 열린 최고인민회의 제14기 7차 2일차 회의에서 시정연설을 하는 모습. 노동신문=뉴스1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8일 평양에서 열린 최고인민회의 제14기 7차 2일차 회의에서 시정연설을 하는 모습. 노동신문=뉴스1

"절대 핵 포기 없다"

김 위원장은 8일 최고인민회의 시정연설에서 "절대로 먼저 핵포기란, 비핵화란 없으며 그를 위한 그 어떤 협상도 그 공정에서 서로 맞바꿀 흥정물도 없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미국이 노리는 목적은 궁극적으로는 (북한이) 핵을 내려놓게 하고 우리 정권을 어느때든 붕괴시켜버리자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백날, 천날, 십년, 백년을 제재를 가해보라"며 "지금 겪고있는 곤난을 잠시라도 면해보자고 나라의 생존권과 인민의 자위권을 포기할 우리가 아니다"라고 말했다.

북한은 이날 회의에서 채택한 핵무력 정책 법령 6조에서 핵무기를 사용할 수 있는 다섯 가지 조건을 제시했다. ▶북한에 대한 핵무기 또는 대량살상무기(WMD) 공격 감행 혹은 임박 ▶적대세력의 핵 및 비핵 공격 감행 혹은 임박 ▶국가의 중요 전략적 대상에 대한 군사적 공격 감행 혹은 임박 ▶유사시 전쟁 주도권 장악 등 작전상 필요 ▶국가 존립, 인민 생명에 파국적 위기 초래 등이다.

<선제 핵공격 명시한 북한 핵무력 정책 법령>
2022년 9월 8일 최고인민회의

6조 '핵 무기 사용 조건'

1. 핵무기 또는 대량살육무기 공격이 감행 또는 임박

2. 국가지도부, 국가핵무력지휘기구에 대한 적대세력의 핵 및 비핵공격이 감행 또는 임박

3. 국가의 중요전략적대상에 대한 치명적 군사적 공격이 감행 또는 임박

4. 유사시 전쟁의 확대화 장기화를 막고 전쟁의 주도권을 장악하기 위한 작전상 필요가 불가피하게 제기

5. 국가의 존립과 인민의 생명안전에 파국적인 위기를 초래하는 사태가 발생

이와 관련, 북한을 향한 공격이 실제로 이뤄지지 않은 상황에서 '임박 징후'만으로 핵을 쓸 수 있도록 하는 등 사실상 자의적이고 주관적인 조건을 나열한 것이란 지적이 나온다. 핵 위협에 대해서만 핵으로 대응하는 게 아니라, WMD 혹은 재래식 공격, 심지어 정의 자체가 불분명한 '파국적 위기 상황'에서도 맞대응으로 핵을 쓸 수 있게 한 점도 '핵 사용 문턱'을 대폭 낮춘 조치다.

박원곤 이화여대 북한학과 교수는 "비군사적 상황에서도 핵 사용 가능성을 열어 두는 등 사실상 모든 환경에서 핵을 사용할 수 있도록 법제화한 것"이라고 분석했다.

8일 평양에서 개최된 최고인민회의 제14기 7차 2일차 회의. 노동신문=뉴스1

8일 평양에서 개최된 최고인민회의 제14기 7차 2일차 회의. 노동신문=뉴스1

김정은 '유일 지휘' 명시

또한 법령 3조 '핵무력에 대한 지휘통제'에선 "북한의 핵무력은 국무위원장의 유일적 지휘에 복종한다"며 "국무위원장은 핵무기와 관련한 모든 결정권을 가진다"고 명시했다. 김 위원장이 핵 사용과 관련한 모든 전권을 쥐는 조치다. 이와 관련, 홍민 통일연구원 북한연구실장은 "외부 공격에 대한 대비 뿐 아니라 내부적으로 핵 통제권을 확실히 공표해 급변 사태를 방지하는 측면도 있다"고 말했다.

이날 북한이 발표한 핵무력 정책 법령은 미국의 핵태세검토보고서(NPR) 등 기존 핵 보유국의 핵 독트린을 사실상 흉내냈다는 평가다. 핵무력의 사명, 구성, 지휘통제, 사용 원칙, 사용 조건 등 항목으로 구성된 이번 법령은 향후 명실상부한 핵 보유국의 지위에서 미국과 한국, 국제사회와 상대하겠다는 의지를 담은 거란 분석이다. 더 이상 비핵화 협상이 아닌 핵 군축 협상을 시도하는 방향으로 프레임을 전환하려는 것이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9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창건 74주년을 맞은 경축 행사에 참석한 모습. 노동신문=뉴스1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9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창건 74주년을 맞은 경축 행사에 참석한 모습. 노동신문=뉴스1

"핵 갱신·강화"…핵실험 임박

북한의 핵무력 법제화와 함께 이미 모든 준비가 끝난 북한의 7차 핵실험 감행 시기에 관심이 쏠린다. 이번 법령의 9조에는 "북한은 외부의 핵위협과 국제적인 핵무력태세변화를 항시적으로 평가하고 그에 상응하게 핵무력을 질량적으로 갱신, 강화한다"는 내용이 담겼다. 그간 북한이 추가 핵실험 계획을 언급하지 않았던 상황에서 이 대목이 사실상 핵실험 '사전 경고'의 의미라는 해석이다.

또 법령 3조에는 "국가핵무력에 대한 지휘통제체계가 적대세력의 공격으로 위험에 처하는 경우 적대세력을 괴멸시키기 위한 핵타격이 자동적으로 즉시에 단행된다"고 명시했다. 앞서 김 위원장이 "우리의 핵이 전쟁 방지라는 하나의 사명에만 속박되어 있을 수는 없다"(4월 25일, 군 창건 90주년 열병식)고 말하는 등 그간 말로만 시사하던 핵의 선제 타격 및 보복 기능을 아예 법에 못박은 셈이다.

북한이 공언한 반격 능력을 갖추려면 소형 핵탄두 개발을 비롯해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잠수함발사탄도미사일(SLBM) 등을 망라한 핵 투발 수단의 다양화가 필요하다. 핵실험을 통한 협상력 제고 등 정치적 고려 뿐 아니라 기술적 수요도 존재한다는 의미다. 정부 소식통은 "지난해 1월 당대회에서 발표한 초대형 핵탄두 생산 등 국방 발전 5개년 계획을 추진하기 위해 핵실험은 3년 내 최소 한 차례는 필요한 상황"이라고 말했다.

지난 2018년 5월 25일 북한이 국제 기자단을 불러 풍계리 핵실험장을 폭파하기 전 풍계리 핵실험 관리 지휘소의 모습. 사진공동취재단

지난 2018년 5월 25일 북한이 국제 기자단을 불러 풍계리 핵실험장을 폭파하기 전 풍계리 핵실험 관리 지휘소의 모습. 사진공동취재단

한ㆍ미, 4년여만 확장억제 회의 개최

관건은 다음달 16일부터 일주일 정도 진행되는 중국의 20차 당대회 일정이다. 시진핑(習近平) 주석의 3연임을 결정하는 중국의 최대 행사를 앞두고 대형 도발로 찬물을 끼얹기는 부담스러운 만큼 핵실험도 그 이후로 조정할 거란 관측이다. 지난달 풍계리 핵실험장에 내린 집중 호우로 인해 갱도 주변의 도로가 유실되거나 옹벽이 무너진 정황이 위성으로 포착되기도 한 만큼 현장 상황도 변수다. 다만 "3번 갱도는 여전히 핵실험이 가능한 상태"(지난달 29일, 이종섭 국방부 장관)라는 게 한ㆍ미 군 당국의 판단이다.

이런 가운데 오는 16일 워싱턴에서 한ㆍ미 외교ㆍ국방(2+2) 고위급 확장억제전략협의체(EDSCG)가 4년여만에 열린다. 우크라이나 전쟁과 신냉전 구도 속에서 회의론이 제기되는 미국의 확장억제의 신뢰성과 실효성을 담보하기 위한 실질적인 방안이 마련될지 주목된다.

한편 북한의 핵무력 법제화가 한국의 자체 핵무장론에 불을 붙이는 것 아니냐는 전망도 나온다. 다만 윤석열 대통령은 지난달 17일 취임 100일 기자회견에서 "어떤 상황에서도 확장억제를 강화하는 것을 우선 과제로 생각할 계획"이라며 "NPT 체제를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지키겠다"며 선을 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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