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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실패하는 게 성공이다” SK의 바이오 산업 진출의 힘 [SKI 혁신성장 연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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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K이노베이션 혁신성장 연구

④ 실패관리 경영의 꽃, 바이오 산업 진출
다음 달 창립 60주년을 맞는 SK이노베이션은 1962년 대한석유공사에서 출발했다. 1980년 선경(SK의 전신)에 인수된 이후 석유화학, 종합에너지, 바이오, 배터리와 그린에너지까지 섭렵하면서 지난 60년간 변신과 성장을 거듭해왔다. 오늘날 SK를 재계 2위 대그룹으로 만든 토대가 된 SK이노베이션의 혁신성장 10가지 성공비결에 관한 학술 심포지엄이 지난달 30일 기업가정신학회 주최로 열렸다. 오늘날에도 유효한 경영 인사이트를 발굴하는 자리였다. 이날 발표된 내용과 연구결과를 정리해 연재한다. 네 번째 혁신성장 스토리는 SK의 바이오산업 진출에서 확인되는 ‘실패 관리의 중요성’이다. 배종훈 서울대학교 경영대학 교수의 분석 발표를 토대로 정리했다.

예고된 가시밭길, 바이오 사업

바이오 분야는 극단적인 기다림 자본(patient capital)을 투자해야 하는, 실패의 위험이 매우 큰 분야다. 보통 10∼15년의 긴 시간과 1∼2조 원 이상의 비용이 들고, 5000∼1만 개 후보물질 중 1개 정도만 시판 가능한 신약이 된다. 정유회사에서 출발한 SK의 바이오산업 성공은 이례적이다. SK바이오팜은 신약 개발, 임상, 제조, 판매를 단독으로 이룬 국내 유일 기업이다. 중추신경제질환(CNS) 시장에 지난 10년간 신약 출시한 13개 회사 중에 신규 진입에 성공한 유일한 회사이기도 하다. 그 성장 경로 역시 매우 독특하다.

이야기로서 비전이 갖는 힘 

새로운 먹거리를 위한 준비는 일찌감치 이뤄졌다. 유공(SK이노베이션의 전신)은 1985년 국내 정유회사 최초로 울산에 연구소(현 SK 유공 R&D 연구소)를 만들고 기술 개발에 힘썼다. 첫 10년간은 기반 기술 사업 개선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1995년부터는 신성장 산업 발굴 중심으로 기술개발 무게추를 옮긴다는 큰 그림을 그렸다.

바이오 사업 진출에는 최종현 SK 선대회장의 의지가 크게 작용했다. 그는 섬유를 만들 때 화합물을 합성하는 방식이 제약품 제조 방식과 유사하다는 점에 주목했다. 때마침 해외 섬유 기업이 생명과학으로 비즈니스 모델을 전환하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성이 있다고 봤다. 1980년 유공 인수 당시 주변의 시기가 쏟아졌을 때 최 회장은 에너지 사업보국을 강조했다. 국민의 건강권을 지키는 바이오 역시 사업보국에 걸맞은 분야였다. 국내 제약사들이 대부분 복제약 제조에 치중할 때 그는 신약 개발로 눈을 돌렸다.

“대기업이 참여했으면 이익을 사회에 환원하고 국민에게 봉사해야 하며, 우리의 목표는 세계적인 신약을 만드는 것이다.”

P-프로젝트의 시작 

1993년 최종현 선대 회장은 결단을 내렸다. 오늘날 SK바이오팜을 탄생시킨 ‘P(pharmaceutical)-프로젝트’ 가 시작된 것이다. 대덕기술원에 대여섯 명 정도의 신약개발 특별 조직이 꾸려졌다. 국내에 대덕연구소가 있다면 미국에는 미주 동부 R&D 센터가 있었다. 이곳은 SK가 1989년 한국 기업 최초로 미국 코네티컷주에 설립한 연구소다. 이듬해 뉴저지주로 이주한 미주 동부 R&D센터는 이후 바이오산업의 핵심인재 유치를 위한 중요한 토대가 됐다. 미주 동부 R&D 센터는 1993년 6월 중추신경계 신약개발 연구계획을 수립하고, 이후 간질 치료제, 우울증치료제 등 중추신경계(CNS) 질환 약물 개발에 집중했다.

신약개발의 성과는 프로젝트를 시작 3년 만에 나타났다. 1996년 우울증 치료제 ‘YKP10A’ 개발이 성공했다. YKP’는 ‘유공 프로덕트(Yu Kong Product)의 앞 글자를 딴 이름이다. 신사업에 대한 가능성이 엿보이자 1990년대 후반 들어 SK는 의약개발사업에 더욱 박차를 가했다. 1997년 1월 미주 동부 R&D 센터를 의약개발센터(2000년 SK라이프사이언스로 개편)와 뉴저지연구소로 분리했다. 뉴저지연구소는 의약 중간체나 의약제품 원료의 중간물질과 같은 거시적인 프로젝트를 중점 담당하며 정밀화학제품 개발에 몰두했고, 의약개발센터는 CNS 신약후보물질의 국내외 특허출원과 미국 내 임상실험, 생산과 판매 등을 전담했다.

실패로부터 성장한다 

가장 기념비적인 사건은 1999년 발생했다. 존슨 앤드 존슨 (Johnson & Johnson) 그룹에 P-프로젝트 첫 번째 신약 후보 물질인 간질 치료제(YK509) 카리스바케이트를 3900만 달러에 기술을 이전(licensing out)한 것이다. SK이노베이션은 이 물질의 상업화가 성공하면 5년간 매출액의 15%를 로열티로 받기로 했다. 당시 SK이노베이션은 1차 임상을 마친 상태였는데, 이후 임상에서 들어갈 천문학적인 개발 비용 부담을 낮추기 위한 전략이었다. 실패 위험을 공유하면서 존슨앤드존슨 그룹의 글로벌 네트워크를 활용하겠다는 계산도 있었다.

이후 카리스바메이트의 임상은 결과적으로 성공하지 못했다. 2008년 FDA로부터 최종적으로 신약 허가를 얻는 데 실패했다. 그러나 이 사건은 ‘실패로부터 성장한다’는 SK만의 철학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1999년 이후 10년간 추가 투자한 사업이 실패했지만 최태원 회장은 오히려 신약 개발을 위한 투자를 늘리고 조직을 확대 개편했다. ‘실패해도 격려금 주는 회사’라는 중앙일보 2008년 7월 3일자 기사 제목이 이를 잘 대변한다.

지난 2016년 6월 SK바이오팜 생명과학연구원을 방문해 신약 물질을 살펴본 최태원 SK 회장. 사진 SK

지난 2016년 6월 SK바이오팜 생명과학연구원을 방문해 신약 물질을 살펴본 최태원 SK 회장. 사진 SK

기나긴 투자는 2019년에 마침내 열매를 맺었다. 국내 최초로 FDA 혁신 신약을 2건이나 획득했다. 첫 번째는 개발에서 FDA 허가까지 전 과정을 독자 진행한 수면장애 신약 솔리암페톨(YKP10A)이다. 두 번째는 2001년에 시작해 개발에 무려 18년이 걸린 뇌전증 치료제 세노바메이트(YKP309)다. 수많은 실패 위험을 알면서도 도전을 멈추지 않은 결과다.

SK이노베이션 바이오 산업 연표

1989년, 뉴저지 바이오 연구센터(미주동부 R&D 센터) 설립 (국내기업의 최초 해외 연구소)
1993년, p-project 팀 구성, 대덕연구소 의약사업연구팀 설립
1999년, Johnson & Johnson에 첫번째 신약후보 물질(카리스바메이트) 기술이전(licensing out)
2000년, SK라이프사이언스(미주동부R&D센터 의약개발센터 후신)개소
2006년, 통합신약연구개발체계 도입
2011년, SK바이오팜 분사
2019년 3월, 솔리암페톨 FDA 혁신신약 최종 승인
2019년 11월, 세노바메이트 FDA 혁신신약 최종 승인

배종훈 서울대학교 경영대학 교수 인터뷰

배종훈 서울대 경영대학 교수가 지난달 30일 서울 종로구 SK서린사옥에서 개최된 'SK이노베이션 60년 혁신 성장 연구 심포지엄'에서 발표하고 있다.

배종훈 서울대 경영대학 교수가 지난달 30일 서울 종로구 SK서린사옥에서 개최된 'SK이노베이션 60년 혁신 성장 연구 심포지엄'에서 발표하고 있다.

SK이노베이션이 바이오 산업에 성공적으로 신규 진입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바이오 산업 투자에 대한 명확한 비전, 즉 SK만의 스토리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투자의 효과나 성과는 투자 규모에 달려있지 않습니다. 개별 엔지니어들이 자신의 프로젝트가 가장 중요하다며 예산 배정을 요구할 때 그 요구대로 예산을 배정한다고 성공하지 않죠. 당연히 기술개발에도 비전이 필요합니다. 신규 사업 역량을 키우는 것이 연구·개발이라면 기업전략 측면에서 새로운 시장을 발굴하기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이 비전이에요. 그리고 이 비전은 내러티브(이야기) 방식으로 표현될 때 성공할 수 있죠."

비전이 내러티브 방식이어야 하는 이유가 뭔가요? 

"드라마에서 내러티브는 등장인물의 역할 배분, 갈등 구조를 확인하는 과정을 말합니다. 이를 경영학에 대입해 보면 내러티브의 중요성이 드러납니다. 회사는 비즈니스 모델을 말할 때 단순히 상품(서비스)만 말해선 안 됩니다. 결과물을 어떻게 만들어낼지 현실성 있는 계획까지 갖고 있어야 하죠. 기업에서 이야기를 만든다는 건 새로운 시장과 고객 경험을 만들어 내는 것과 같아요. 비즈니스 가치 사슬 전체를 고려하고 설계해야 한다는 것이죠. 이를 경영학에서는 ‘비즈니스 모델’이라고 하는데요. 명확한 비즈니스 모델이 있어야만 비전을 실천할 힘이 생기죠."

SK이노베이션의 비전이 내러티브로서 어떤 매력을 갖고 있나요?

"P-프로젝트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중소기업 적합업종이었던 ‘복제약’이 아니라 ‘글로벌 혁신 신약’ 시장으로의 진입을 구상한 것에 있습니다. 물론 혁신 신약 제조를 내세운 다른 대기업도 있었어요. 그러나 SK는 해당 상품의 가치 사슬에 참여한 다양한 이해관계자와 어떻게 협업할지까지도 함께 구상했다는 점이 다릅니다. SK는 임상 단계의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 마케팅, 법률 규제 검토, 아웃소싱, 그리고 전임상 단계의 효과성을 제고하기 위한 최신 연구 동향을 포괄하는 의약 경영 역량을 모두 확보했습니다. 즉 신약 개발을 위한 가치사슬이라는 큰 그림을 그리고, 그곳에서 자신을 포함한 다른 관계사의 역할을 고민했다는 점이 특징입니다."

SK이노베이션은 실패를 어떻게 성공적으로 관리했다고 평가하나요?

"보통 실패 관리 전략은 크게 3가지입니다. 내부 인력으로 실패를 감당하는 자체 개발, 타자의 실패 경험을 구매하는 인수합병, 그리고 위험을 공유하며 새로운 기회를 탐색하는 전략적 제휴가 있어요. 결국 세 가지의 균형이 중요한데요. SK는 정유 사업을 하면서 장기 투자에 대한 인내심을 축적해 왔고, 동시에 존슨 앤드 존슨과의 협업을 통해 위험 부담을 낮추는 전략을 썼죠. 결국 SK의 바이오 사업은 자체 개발과 전략적 제휴의 적절한 균형이 만들어낸 결과로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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