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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꼭 장남이 지내야 하나요?" 제사가 뭐길래…법원이 물었다 [가족의자격④]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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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자가 제사를 승계해야 한다는 관습은 변화된 가족제도에 원칙적으로 부합하지 않게 되었다.” (서울서부지법)

법원이 현재 한국 사회의 가족에게 ‘제사’의 의미를 물었습니다. 어머니의 장지를 두고 장례식 도중 6남매 간 다툼이 벌어진 상황에서 가족 중 장자(長子), 즉 장남·장손이 아닌 자녀도 제사의 주재자가 될 수 있다고 본 판결을 내면서입니다.

[사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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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친 묘 어디로?…‘장남파’ 對 ‘차남파’ 어머니 시신 둘러싼 소송전

지난해 5월 모 대학교 총장의 아내였던 A씨가 숨졌습니다. 그런데 어머니를 어디에 모실지를 두고 6남매의 의견이 두 갈래로 나뉘었습니다.

2명의 ‘장남파’는 어머니를 먼저 아버지를 모신 ‘조상묘’, 강원도 횡성군 선산(先山)에 모시자고 주장했습니다. 반면 4명의 ‘차남파’는 아버지가 생전에 마련했지만 정작 아버지 당신은 묻히지 못한 ‘가족묘’(강원도 원주)에 모시자고 맞섰습니다.

장례 도중 불거진 다툼에 A씨의 시신은 대학 병원 장례식장에 안치된 상태로 발인이 중단됐습니다.

그러자 큰아들은 자신이 어머니의 시신을 모셔갈 수 있게 해달라며 병원 장례식장을 상대로 법원에 가처분 신청을 냈습니다. 제사용 재산(분묘에 속한 묘토·제구·족보 등)은 제사를 모시는 사람이 승계한다는 민법 제1008조의3을 들어 선조의 시신 역시 장남이 승계해야 한다는 겁니다. 대법원 판례는 ‘장남이 제사를 모시는 사람’이라고 했으므로 자신이 어머니의 시신을 인도받을 권리가 있다는 주장입니다.

반면 차남은 어머니가 살아계실 때 더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던 자신이 마땅히 어머니 제사를 모셔야 한다고 맞섰습니다.

이에 대해 서울서부지법 민사21부(재판장 임정엽 수석부장판사)는 지난달 12일 모친의 시신을 인도해 달라며 장남이 낸 유체동산 인도 단행 가처분 신청을 기각하고 차남에게 시신을 인도하라고 결정했습니다.

[사진 Wikimedia Commons]

[사진 Wikimedia Commons]

법원은 우선 “장자의 제사 승계 관습은 가족 구성원의 자율적인 의사를 무시하는 것이고 차별을 두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분쟁 해결적인 측면도 짚었습니다. 재판부는 “가족은 관계의 종류를 불문하고 복잡, 미묘할 수밖에 없는 속성을 가지고 있다”며 “개별 사안에서 그 가족관계의 특수성을 충분히 반영해 가장 적절한 사람이 누구인지에 따라 제사 주재자를 정하는 것은 분쟁을 종국적으로 해결하는 방법이 될 수 있다”고 제시했습니다.

그러면서 ➀ 어머니가 차남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고 장남과는 불화를 겪고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 점, 이를 부연하는 정황으로 장남을 뺀 나머지 자녀들에게 재산을 상속했다는 주장도 재판 과정에서 나온 점 ➁ 고인이 ‘조상묘’ 매장에 반대하면서 죽은 남편의 시신 역시 ‘가족묘’로 이장하길 바랐던 점 ➂ 고인의 남편이 마련했으나 남편은 묻히지 못한 ‘가족묘’에 매장할 당시 장남이 상의없이 추진해서 고인이 장남을 원망하기도 한 점 등을 열거했습니다.

14년 전 대법원은 “제사주재자 협의 안 되면 長男 우선”

이 판결은 최종심 법원인 대법원의 판단을 깬 것이라 주목을 받습니다. 대법원은 지난 2008년 11월 전원합의체에서 “중대한 질병, 심한 낭비와 방탕한 생활, 장기간의 외국거주 등의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고인의 장남이나 장손자가, 또 상속인 중 아들이 없으면 장녀가 제사의 주재를 맡는다”고 판단(2007다27670)했었습니다.

누군가 장지를 지정하는 유언을 남기고 숨졌다면 그 유언은 법적으로 효력이 있을지, 고인의 딸들이 그 뜻을 받들어 안장했는데 뒤늦게 나타난 장남이 선산으로 아버지를 이장하겠다고 주장한다면 어떻게 해야할지에 대해 대법원이 장남의 손을 들어주면서 내린 판단입니다.

벌초객들이 조상 묘를 깨끗이 단정하고 있다. 연합뉴스 ※기사와 무관한 자료사진

벌초객들이 조상 묘를 깨끗이 단정하고 있다. 연합뉴스 ※기사와 무관한 자료사진

언뜻 단순하게 ‘장자가 제사를 지내고 장지 역시 장자가 정하라’는 결론을 내린 것 같지만, 당시 판결문을 자세히 뜯어보면 대법관들의 깊은 고민이 담겨있습니다. 대법원은 원래도 공동상속인 중 종손이 있다면 특별한 사정이 있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종손이 제사의 주재자가 된다고 판시해왔기 때문입니다.

당시 대법원 다수의견은 현재 서부지법과 마찬가지로 장자가 제사를 승계하는 종래의 관습은 “가족 구성원인 상속인들의 자율적인 의사를 무시하는 것이고 적서(嫡庶) 간에 차별을 두는 것이어서 개인의 존엄과 평등을 기초로 한 변화된 가족제도에 원칙적으로 부합하지 않게 됐다”고까지 했습니다.

문제는 ‘공동상속인 사이에 협의가 이뤄지지 않는 경우’입니. 적서를 불문하고 장남 내지 장손자가, 공동상속인 중 아들이 없으면 장녀가 제사 주재자가 된다고 보는 것이 가장 조리에 부합한다고 본 겁니다. 소수 의견에서만 ‘다수결에 따른 결정’(박시환·전수안 대법관)이나 ’법원의 심리와 판단’(김영란·김지형 대법관)이 제시됐습니다.

고인이 생전 원하던 장지가 있다고 하더라도 제사 주재자가 이를 따를 법적 의무는 없다고도 했습니다. 이 역시 언뜻 고인의 의사를 무시하는 것같지만, 반대로 고인을 모셔야 하는 남은 가족들에 대해 운신의 폭을 넓혀준 것이기도 합니다. 당시 대법원은 고인의 의사를 존중하는 것은 ‘도의적’인 차원이지. 후손을 구속하는 ‘법률적 의무’까지는 아니라고 봤습니다.

한 고법 부장급 판사는 “14년 만에 달라진 하급심 판단은 우리 사회가 압축적으로 변화한다는 방증”이라며 “개인의 자유와 양성평등이 강화되는 쪽으로 우리 사회가 달라지고 있다는 점을 받아들이면서도 일부 전통은 존중하는 나름의 절충안을 낸 것이기도 하다”고 평가했습니다.

‘관습은 힘이 세다’…‘장자 제사 승계’ 뭐길래

‘장자’의 제사 승계 관습은 “조상 숭배를 통한 부계혈족 중심의 가계 계승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서부지법 판결문)고 합니다. 조선 시대 초기부터 『주자가례』와 가묘제(家廟制)를 도입하면서 제사 승계인을 적장자(嫡長子)로 확정하려는 시도는 대략 500년 전인 조선 중기에는 정착된 걸로 봅니다.

이러한 부계 가족 중심의 가계계승은 대한민국 건국 직후 민법의 ‘가족’과 ‘호주상속’으로 자리 잡고 호주제로 유지됐습니다. 2000년대 들어서야 헌법재판소가 호주제에 대해 위헌결정(2005년)을 내리고 민법 상 호주제가 공식적으로 폐지(2008년)되면서 ‘가부장제’는 비로소 법적 근거를 잃게 됩니다.

‘한국적 가부장제’는 법률뿐만 아니라 제도·관습으로 수백년된 전통으로 굳어진 탓에 사법부는 더디게 차별 폐지와 양성 평등의 방향으로 한발짝씩 변화된 판결을 내놓았습니다.

지난 2005년 `여성종중원 인정판결 환영모임`이 열렸다. 대법원이 내린 `출가한 딸도 종중원으로 인정한다`는 판결을 축하하기 위해 열린 것이다. [중앙포토]

지난 2005년 `여성종중원 인정판결 환영모임`이 열렸다. 대법원이 내린 `출가한 딸도 종중원으로 인정한다`는 판결을 축하하기 위해 열린 것이다. [중앙포토]

여성, 딸들이 종중(宗中)원 자격을 인정된 것은 지난 2005년이었습니다. 당시 대법원은 여성의 종중(宗中)원 자격을 인정하면서 “사회를 지배하는 기본 이념이나 질서의 변화로 관습법이 전체 법 질서에 부합하지 않는다면 효력이 부정된다”고 지적했습니다. 남녀 평등 원칙을 새로운 사회 관습으로 인정하면서입니다. 대법원은 “정치‧사회‧경제‧문화 등 모든 영역에서 여성에 대한 차별을 철폐하고 남녀평등을 실현하는 방향으로 변화되고 있다”며 “남녀평등의 원칙은 앞으로 더욱 강화될 것”이라고 강조했습니다.

같은 차원에서 제사의 의미를 바라보는 법원 역시 변화합니다. 14년전 대법원은 제사에 대해 “성격이 많이 달라졌다고는 하지만 종래의 계계승 성격에서 완전히 벗어났다고 할 수는 없다”, 제사용 재산에 대해서는 “가통(家統)의 상징이 되는 정신적‧문화적 가치를 갖는 특별한 재산으로서 가문의 자랑이자 종족 단결의 매개물이라는 특성을 갖고 있다”고 인정했습니다. 이러한 해석을 바탕으로 장자 제사 승계 역시 널리 용인되고 있는 것으로, 연장자 우선 문화는 전통적인 미풍양속이라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러나 최근 서부지법은 “가계계승의 의미가 상당 부분 약화됐고, 고인에 대한 추모의 성격이 더 강해졌다”는 것입니다. 법질서적으로도 “가족관계 내에서 개인의 의사와 가치가 존중되고 양성평등이 강화되는 방향으로 변화되어 왔다”고 짚었습니다.

‘차남에게 어머니 시신을 인도하라’는 법원 결정에 불복한 장남은 이의 신청을 내 심문기일이 다시 열렸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아 결정이 유지(지난달 31일)됐습니다. 장남은 이에 지난 5일 항고장을 냈습니다. 이제 ‘누가 제사를 주재할 것인가’라는 질문은 다시 서울고등법원으로 넘어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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