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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살 아이 함께온 30대 女손님에 울었다…"남편 제사상 차리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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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석 연휴를 하루 앞둔 지난 8일 오후, 서울 중구 남대문시장.

“A급이랑 B급이랑 같이 놓고 비교해보면 차이가 보이시죠. 37피스가 가장 기본이고요, 구성은 촛대가 2개, 위패…”

전통 상과 제기(祭器)를 파는 박동관(63)씨는 이날이 연중 가장 바쁜 하루다. 명절 전 급하게 제사용품을 마련하려는 손님들이 잇따라 박씨를 찾았다. 제기를 사러 온 중년 부부, 교자상을 사러 온 나이 지긋한 어르신을 응대하느라 박씨는 눈코뜰 새가 없었다.

제기 찾는 손님 사연에 눈물 흘릴 때 많아 

서울 중구 남대문시장에서 목기 가게를 운영하는 박동관(63)씨가 진열된 제기를 정리하고 있다. 박씨는 1981년부터 남대문시장에 자리잡아 목기 장사를 해 왔다. 최서인 기자

서울 중구 남대문시장에서 목기 가게를 운영하는 박동관(63)씨가 진열된 제기를 정리하고 있다. 박씨는 1981년부터 남대문시장에 자리잡아 목기 장사를 해 왔다. 최서인 기자

박씨가 남대문시장에서 상과 제기를 팔아온 지도 햇수로 42년째다. 1981년, 형의 친구가 전남 진도에서 갓 상경한 박씨를 목기 가게에 직원으로 추천한 게 시작이었다. 11년간 직원으로 일한 뒤 1992년 독립해 자신의 가게를 차렸다.

“지금처럼 식탁 문화가 일반화되기 전에는 상이 생활의 중심에 있었잖아요. 혼수를 하면 기본으로 손님용 교자상 2개, 밥상, 찻상, 목판(음식을 담아 나르는 나무 그릇)이 들어갔어요.”

그 시절 예비 신부들은 남대문시장 대도상가 2층에서 이불을, 3층에서 그릇과 상을 마련하는 ‘혼수 투어’를 했다. 박씨 가게의 벽면에는 아직 ‘혼수 목록’이라는 이름의 리스트가 붙어 있다. 90년대까지만 해도 어머니와 함께 신접살림을 꾸리러 온 예비 신부들이 손님의 절반 이상이었다는 게 박씨의 기억이다.

어머니의 손을 잡고 왔던 새색시들이 다시 결혼을 앞둔 친구를 데리고 가게를 다시 찾곤 했다. 박씨는 “주머니 사정이 빠듯한 손님이라도 최선을 다해서 친절하게 안내해 질좋은 물건을 가져갈 수 있도록 돕는 게 장사 철칙이었다”며 “새댁들 사이에 이어진 입소문이 42년을 버틸 수 있는 힘이 됐다”고 말했다.

교자상이 혼수 필수품이라면, 제기는 부모를 떠나보낸 40~60대가 주로 찾는 물건이다. 박씨는 간혹 접하는 ‘예외’들이 가슴에 남는다고 했다.

서울 중구 남대문시장 대도종합상가에 위치한 박씨의 가게에 제기가 진열되어 있다. 최서인 기자

서울 중구 남대문시장 대도종합상가에 위치한 박씨의 가게에 제기가 진열되어 있다. 최서인 기자

“서른 살쯤 됐으려나, 젊은 여자가 어느 날 6살쯤 된 아이 손을 잡고 들어왔어요. ‘남편이 사고사를 당해서 제사상을 차리려고 한다’고…”

황망한 남편의 죽음 앞에 선 손님에게 박씨는 제기 사용법과 제사 지내는 법을 자세히 알려줬다고 한다. 며칠 뒤 박씨에겐 “덕분에 남편 제사를 잘 마칠 수 있었다”는 감사의 전화가 걸려왔다. 먼저 세상을 뜬 아들의 제사상을 사러 온 70대 노모부터 부모를 잃은 20대 청년까지, 박씨는 판 상과 제기엔 수많은 안타까운 사연들이 담겨 나갔다. 박씨는 “숱한 사연들을 접했지만 요즘도 손님들이 안고 온 사연을 접할 때마다 눈물이 난다”고 말했다.

교자상 수요 뚝…“밥상 문화 사라져 아쉬워” 

“이 상가에 최고 많을 때는 상을 파는 가게가 9개까지도 있었는데 지금은 저 하나 남았고, 저쪽 종합상가에도 8개가 있었는데 저기도 한 군데만 남아있어요.”

동업자 1명과 직원 2명, 총 4명이서 시작한 사업이지만 이제 가게에는 박씨 혼자다. 떠나간 사람들은 그릇 가게로 업종을 변경하거나 아예 장사를 접고 시장을 떠났다.

추석 명절을 앞둔 7일 서울 동대문구 경동시장을 찾은 많은 시민들이 제수용품을 둘러보고 있다. 뉴스1

추석 명절을 앞둔 7일 서울 동대문구 경동시장을 찾은 많은 시민들이 제수용품을 둘러보고 있다. 뉴스1

박씨를 찾는 손님은 사업 초기에 비해 60% 정도 줄었다고 한다. 빠른 속도로 입식 생활이 일반화되면서 매출의 과반을 차지하는 교자상을 찾는 사람이 점차 줄었기 때문이다. “이제는 혼수로 상을 마련한다고 해도 손님상 1개 정도만 사 가지, 상을 세트로 마련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는 게 박씨의 설명이다. 박씨는 “예전에는 밥상에 다같이 앉아 있다 보면 2시간이고 3시간이고 먹고 즐기고 이야기 꽃을 피우곤 했는데, 그런 오순도순한 시간이 사라져가는 것 같아 안타깝다”고 말했다. 집엔 대·중·소 크기별로 6개의 상이 있다는 박씨는 “펼 일이 갈수록 줄고 있다”고 털어놨다.

박씨는 전북 남원에서 국산 오리나무나 물푸레나무로 만든 수제 제기만을 팔아왔다. 2000년 전후로 중국산 저가 제기가 물밀 듯이 들어오며 박씨는 이중고를 겪게 됐다. 남원의 공장에서 직송받는 제기는 30만원대인데, 손님들은 중국산 나무로 만든 10만원대를 생각하고 찾아오기 때문이다. 그나마 명절 차례와 제사를 이어온 집에서도 상차림을 간소화하면서 제기의 기본 구성도 37가지에서 21가지로 바뀌는 추세다.

갈수록 빠듯해지는 상황이지만 박씨가 가게를 접지도 못하는 건 뿌듯했던 순간들 때문이다. 늦은 오후 가게를 정리하던 박씨는 “한때 밥상을 버렸던 사람들이 사위나 며느리가 생겨서 상이 필요하다며 다시 찾아올 때 보람을 느낀다”며 “많은 사람들이 밥상 앞에 모여 시간가는 줄 모르는 명절이 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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