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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강인욱의 문화재전쟁

6·25 때 소련 스파이 부찐, 2000년 전 고조선 밝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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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0면

한국을 사랑한 소련 정보원

강인욱 경희대 사학과 교수

강인욱 경희대 사학과 교수

지난 60여년간 고조선은 동아시아 각국의 가장 뜨거운 주제였다. 그런데 러시아를 비롯하여 세계의 거의 절반에 달하는 사회주의권은 대부분 한국 측의 입장을 지지한다. 그 뒤에는 50여년 전 시베리아에서 혜성같이 등장해서 고조선으로 박사 학위를 따고, 글자 그대로 홀연히 자취를 감춘 유 엠 부찐(1931~2002)이 있다.

부찐의 고조선 연구는 냉전 시기 세계의 절반을 차지하던 사회주의권에서 한국 고대사 연구의 가장 기본적인 바이블 역할을 했다. 하지만 그의 등장과 달리 이후 행적을 아는 사람은 러시아 내에서도 거의 없었다. ‘철의 장막’ 뒤에서 조선을 연구했던 미스터리한 인물 부찐, 그리고 그 뒤에 숨겨진 사회주의 국가 간의 고조선을 둘러싼 전쟁을 보자.

1982년 역사에 남을 『고조선』 발간
사회주의권에 한국 고대문명 알려

고조선 부정한 중국과 다른 행보
북한·중국·일본 자료 폭넓게 연구

한국학과 3곳 열며 남다른 열정
스파이 이력 탓 관련 행적 사라져


극적으로 되찾은 원고뭉치

고조선을 대표하는 유물인 랴오닝 지역의 청동거울. 랴오닝성 박물관 소장품이다. [사진 강인욱]

고조선을 대표하는 유물인 랴오닝 지역의 청동거울. 랴오닝성 박물관 소장품이다. [사진 강인욱]

중국과 북한은 지난 글(8월 12일자 24면 ‘비파형동검의 비밀’)에서 본 것처럼 1960년대 중반 조·중 고고발굴대의 고조선 발굴 이후 완전히 갈라섰다. 중국은 문화혁명 직후 동북공정의 길로 갔고, 북한도 주체사상을 내세우며 고조선을 앞세워 자신들만의 역사와 사상을 만들어갔다.

북한은 중국과의 관계가 멀어지면서 사회주의권 종주국인 소련의 지지가 간절했다. 1974년 시베리아 과학원의 고고학 연구소의 사절단이 북한을 방문할 수 있게 됐다. 과연 중국과의 역사 전쟁을 끝낸 직후 북한은 어땠을까. 소련의 고고학자들은 주체사상을 내세운 북한의 모습에 너무나도 황당해했다. 사회주의권의 대부인 마르크스와 레닌의 초상은 사라지고 엉뚱하게 그 자리에 김일성의 사진과 어록이 들어갔기 때문이다.

2300년 전 고조선의 무덤인 중국 뤼순 인자춘 유적에서 나온 유골. 청동칼(점선 안)을 손에 쥐고 있다. 북한 발간 『조선유적유물도감』에서. [사진 강인욱]

2300년 전 고조선의 무덤인 중국 뤼순 인자춘 유적에서 나온 유골. 청동칼(점선 안)을 손에 쥐고 있다. 북한 발간 『조선유적유물도감』에서. [사진 강인욱]

정치와는 별개로 북한의 고고학자들은 자신들의 손으로 발굴한 자료로 고조선과 북한의 역사를 다시 세운다는 자신감이 넘쳤다. 그 북한의 생생한 목소리는 사절단의 일원으로 만주를 연구하는 V E 라리체프(1932~2014)라는 저명한 고고학자에 의해 고스란히 기록되었다.

하지만 그의 출장보고서는 북한과 사회주의권에 대한 비판적인 내용으로 공개가 금지되었고, 세월이 지나면서 본인도 자신의 기록에 대해서 잊고 있었다. 다행히 숨지기 직전에 제자 세르게이 알킨 교수(노보시비르스크 국립대)가 스승의 아파트에서 책을 정리하는 중에 누렇게 변색한 생생한 기행문을 발견했다. 그리고 타계 1년 전인 2012년에 극적으로 출판되었다. 세상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는 북한의 고조선 연구를 생생하게 담은 기억은 40년이 지나서 부활한 셈이다. 그리고 라리체프의 생애 마지막 저서가 되었다.

고조선, 정보원의 마지막 임무

1974년 북한을 방문한 소련의 고고학자들. [사진 라리체프 박사]

1974년 북한을 방문한 소련의 고고학자들. [사진 라리체프 박사]

이 방문으로 북한이 발굴한 고조선 자료를 잔뜩 받아간 시베리아 과학원은 곧바로 북한의 고조선과 고고학의 연구에 착수했다. 소련 시절 시베리아 과학원은 시베리아는 물론 중국, 북한, 중앙아시아의 역사를 연구하는 중심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소련의 고고학자 중에서 한국어를 할 수 있는 사람이 없어서 사방에 번역가를 수배했다. 당시 경제학연구소에서 부찐을 소개받았다. 부찐은 바이칼 근처에서 태어나서 군사학교에서 통역을 전공할 정도로 언어적인 재능이 뛰어났다. 한국어는 물론 중국어, 프랑스어, 일본어 등 8~9개 언어에 능통했다. 게다가 외모마저도 시베리아 원주민과 혼혈이어서 얼핏 보면 한국 사람과 비슷했다. 그 덕에 한국전쟁에도 비밀리에 투입되어 1952~55년간 근무했다. 당시 소련은 공식적으로 한국 전쟁에 참전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30대 부찐과 60대의 부찐(아래 사진). 유일하게 공개된 사진이다. [사진 강인욱, 유리 쿠즈네초프]

30대 부찐과 60대의 부찐(아래 사진). 유일하게 공개된 사진이다. [사진 강인욱, 유리 쿠즈네초프]

부찐은 북한에서 돌아온 직후 경제학을 전공하면서 한국에 대한 관심은 잊고 있었다. 그러던 차에 시베리아 고고학자들이 번역해달라며 가져다준 북한의 책 다발이 그의 운명을 바꾸었다. 당시 마흔이 훌쩍 넘은 그였지만 북한의 자료를 본 순간 모든 것을 팽개치고 고조선에 곧바로 빠져들었다.

부찐은 타고난 언어 실력으로 북한 자료의 번역을 넘어서 중국과 일본 등 각국의 자료를 섭렵하면서 번역가에서 고조선 전공자로 탈바꿈했다. 1982년에 기념비적인 책 『고조선』을 발간했다.

60대의 부찐. [사진 강인욱, 유리 쿠즈네초프]

60대의 부찐. [사진 강인욱, 유리 쿠즈네초프]

부찐은 고조선은 실재했으며 랴오닝성(遼寧省) 일대에서 서북한 지역에 이르는 지역의 비파형 동검문화가 그 기반이라고 생각했다. 한국 일부에서는 마치 부찐이 거대한 고조선의 역사를 복원했다는 식으로 잘못 아는 사람도 있지만, 이는 사실과 다르다. 우리가 지금 생각하는 고조선과 크게 다르지 않다. 부찐은 고조선이 거대한 제국이나, 이름만 남아있는 허상이 아니라 세계 여러 문명들과 똑같은 나라였다는 것을 밝히고자 했다. 무엇보다 북한의 연구를 세상에 알리는 데 1차 목표를 두었다.

낮에는 연구원, 밤에는 스파이

1984년에 출판된 부찐의 책 고조선 표지. [사진 강인욱, 유리 쿠즈네초프]

1984년에 출판된 부찐의 책 고조선 표지. [사진 강인욱, 유리 쿠즈네초프]

부찐의 노력으로 당시까지 지도 위 어디에 있는지도 잘 모르던 한국의 최초 국가인 고조선이 러시아어로 부활할 수 있었다. 당시 사회주의권에서 러시아어의 영향력은 절대적이었다. 한동안 그의 저서는 세계적으로 고조선을 대표하는 유일한 책이었다. 지금도 고조선에 관해서는 러시아권에서 중국 대신에 한국의 견해가 통설이 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한국전쟁으로 시작된 정보원 부찐의 마지막 임무는 바로 2000년 전 동아시아 한 귀퉁이에서 사라져버렸던 고조선을 둘러싼 역사 전쟁인 셈이었다.

혜성같이 등장한 부찐이 계속 활동했다면 시베리아 과학원에서 수많은 한국 전공자가 배출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의 연구는 중단되었고, 지금 러시아에서 그를 제대로 기억하는 사람은 없다. 정보원이었던 그의 신분 때문이었다. 부찐은 뛰어난 외국어 실력, 소련 사람답지 않은 예절과 피아노도 수준급이었다. 하지만 낮에는 고조선 연구자로, 그리고 밤에는 정보원으로서의 이중생활은 계속 유지했기 때문에 사람들과 쉽게 어울리지 않았다.

북한이 소련에 준 고조선 자료와 그 제목을 번역한 부찐의 카드. [사진 강인욱, 유리 쿠즈네초프]

북한이 소련에 준 고조선 자료와 그 제목을 번역한 부찐의 카드. [사진 강인욱, 유리 쿠즈네초프]

결국 부찐은 고조선의 후속 연구인 『고조선에서 삼국시대로』를 저술하고 고고학자로서의 커리어를 정리했다. 정보원 출신답게 그는 자신의 인적 사항을 모두 지우고 떠났다. 그 결과 그에 관한 어떤 서류나 사진 한 장도 남아 있지 않다. 최근에 젊은 시절 이르쿠츠크 대학의 유리 쿠즈네초프 박사가 발견한 이력서에 붙은 사진이 전부이다.

사실, 정보원으로 살면서 자신의 삶을 위장하고 또 비밀 임무의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 전문가급의 역사 지식을 갖추는 경우는 흔히 있다. 2차대전 소련 승전의 주역인 리하르트 조르게도 일본에서 암약하면서 전문가급의 일본 고대사에 대한 지식을 가졌다.

바이칼에서 일군 한국학

그런데 부찐의 경우는 여러모로 달랐다. 정보원이란 비밀스러운 삶 때문에 가족들도 그를 떠났고 평생 외롭게 살던 그에게 남은 것은 한국에 대한 열정뿐이었다. 부찐은 한국에 대한 사랑을 평생 이어갔으며, 후학 양성에도 전력을 다했다. 그는 말년에 바이칼 호수 근처의 이르쿠츠크에서 한국학을 일구기 위해 노력했다. 지금이야 한류로 한국에 대한 열기가 뜨겁지만, 당시에 한국은 정말 보잘것없는 나라였다. 그는 세 군데 대학에서 한국학과를 개설하고, 삶의 마지막까지 한국학의 기반을 세우려 고군분투했다.

나도 지난 30여년간 부찐의 행적을 찾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했다. 하지만 그의 이력은 마치 2000년 전의 고조선만큼이나 실체를 찾기가 어려웠다. 평생을 정보원으로 살았던 그는 어쩌면 고조선에서 자신의 아바타를 발견했는지 모르겠다.

지금도 중국이나 일본에서는 고조선의 존재 자체를 축소하거나 부정하려는 움직임이 여전하다. 그런데도 사회주의권 대부분의 나라는 한국의 견해를 따른다. 부찐의 음덕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소련의 정보원 리하르트 조르게가 보이지 않게 2차대전 때에 소련을 구했다면, 또 다른 정보원 부찐은 고조선을 구한 셈이다. 적어도 한국인이라면 바람처럼 사라진 부찐에 대한 고마움은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고조선을 둘러싼 역사 전쟁은 현재진행형이기 때문이다.

강인욱 경희대 사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