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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문소영의 문화가 암시하는 사회

비영리 메세나와 영리 아트사업을 구분해야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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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1면

기업의 예술 후원과 협업

문소영 코리아중앙데일리 문화부장

문소영 코리아중앙데일리 문화부장

“게르하르트 리히터의 거대한 그림 3점이 있는 BMW 뮌헨 본사 로비는 이제 세상에서 가장 값비싼 회사 로비라고 해도 무방할 겁니다. 1970년대 초 BMW가 이 본사 건물을 신축하고 그림을 의뢰했을 때 리히터는 동독을 탈출해 서독에 온 젊은 화가에 불과했죠.”

BMW 그룹의 문화참여 책임자 토마스 기르스트(거스트)가 한 말이다. 지난 1일 문화체육관광부 산하 예술경영지원센터(이하 예경)가 키아프와 프리즈 서울 아트페어 시작을 앞두고 개최한 ‘아트 컬렉팅과 비즈니스’ 콘퍼런스에서였다. 리히터는 프리즈 서울 (9월 2~5일)에서 200억 원 남짓한 그림을 선보이기도 한, 소위 ‘그림값 가장 비싼 생존 거장들’ 중 한 명이다. 리히터가 막 뜨기 시작했을 때 그림을 주문한 BMW는, 사회학자 부르디외(1930~2002)식으로 말하자면, 엄청난 경제자본으로 전환될 수 있는 문화자본을 확보한 것이며 또 높은 안목을 갖고 예술활동을 지원하는 기업이라는 상징자본도 갖게 된 것이다.

프리즈 서울, 기업 후원경쟁도 후끈
“순수하지 않다”는 비난도 있지만
기업 평판 위한 CSR 나쁘지 않아
다만 영리사업과 혼동하지 말아야

프리즈 서울에서 선 보인 BMW의 아트카 ‘THE 8x제프 쿤스’. 문소영 기자

프리즈 서울에서 선 보인 BMW의 아트카 ‘THE 8x제프 쿤스’. 문소영 기자

물론 기업은 CSR(corporate social responsibility), 즉 사회적 책임 차원에서 아트 컬렉팅을 비롯한 예술 후원을 하는 것이라고 강조한다. “우리가 하는 작품 수집은 기본적으로 우리의 공장이 있는 세계 곳곳의 학교들과 협력한 결과물”이라며 “거기서 학생들, 젊은 예술가의 작품을 구매해 우리 직원들이 있는 공장과 사무실에 전시한다”고 기르스트는 말했다.

도이체방크의 글로벌 큐레이터 매리 핀들리도 콘퍼런스에 참여했는데, 그 역시 사회적 책임을 강조했다. “도이체방크는 회화와 사진만 5만여 점에 이르는 방대한 컬렉션을 지니고 있는데, 우리 은행의 각 지점에 걸어서 직원과 고객이 예술을 향유하도록 하며, 또한 더 많은 이들이 볼 수 있도록 순회전 프로그램도 운영한다”고 그는 말했다. 도이체방크는 프리즈 아트페어가 런던에서 창립된 이듬해부터 계속 프리즈의 메인 스폰서이기도 하다. 또한 도이체방크와 BMW 모두 여러 미술상 및 작가나 큐레이터를 위한 연구비 지원 프로그램을 후원하고 있다.

한편 BMW는 ‘아트 카’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팝아티스트 제프 쿤스가 디자인한 ‘THE 8×제프 쿤스’ 판매용 한정판을 프리즈 서울에서 공개했다. 이것은 비영리적 후원이 아닌 영리적 예술 협업의 영역으로서, 이처럼 같은 기업에서도 예술 후원과 협업을 병행하는 경우가 많다. 5일 끝난 프리즈 서울은 여러 기업의 후원과 협업 프로그램이 뒤섞인 각축장이었다.

그런데 기업의 비영리적 활동조차 순수한 후원이 아니라고 비난하는 시각도 있다. 제도 비판으로 유명한 개념미술가 한스 하케는 1995년 부르디외와의 대담에서 이렇게 말했다. “전통적인 의미의 예술 후원(patronage)과 후원인 체하는 PR 계책을 구분하는 게 중요하다. ‘메세나(Mecenat)’라는 명칭을 들먹이며 기업들은 스스로를 이타주의적인 아우라로 포장한다. 미국 용어 스폰서(sponsoring)가 더 정확하게, 이것이 사실은 자본의 교환, 즉 스폰서의 금융자본과 후원받는 쪽의 상징자본을 교환하는 것에 불과하다는 것을 반영한다.”

후원 순수성보다 사회적 이익 중요

프리즈 서울 LG 라운지에 마련된 아니쉬 카푸어 협업 작품. 문소영 기자

프리즈 서울 LG 라운지에 마련된 아니쉬 카푸어 협업 작품. 문소영 기자

하지만 기업이 예술 후원을 통해 상징자본을 얻으려는 것, 즉 브랜드를 널리 알리고 이미지를 향상시키려는 것이 문제가 된다고 할 수 있을까? BMW의 기르스트는 기업의 예술 후원이 “사회적 책임과 브랜드 구축, 둘 다를 위해서”라고 인정한다. 관공서만의 예술 지원은 경직되고 정치가 개입할 수 있으며, 개인의 지원은 여러 가지 한계가 있기 때문에, 기업의 예술 지원이 그 절충형으로 존재할 필요가 있다. 문제로 삼을 것은 기업이 상징자본을 챙기는 자체가 아니라, 사회에 도움되는 것도 없이 상징자본만 챙기는 건 아닌지, 즉 다양한 지역과 계층에서의 예술 창작과 향유를 실질적으로 지원하는 지이다.

그런 면에서 지금 눈에 띄는 한국 대기업들의 행보는 나쁘지 않다. 예경 콘퍼런스에서 구겐하임 미술관의 나오미 벡위스 수석 큐레이터와 박설희 LG 브랜드 담당 수석 전문위원이 최근에 시작된 ‘LG 구겐하임 아트 앤 테크놀로지 이니셔티브’를 소개했다. 이에 따르면 아티스트들에게 투명 OLED 등 LG의 첨단 디스플레이를 제공해 새로운 미디어아트를 실험하는 것을 돕고 또 디지털 기술 기반 예술을 연구하는 큐레이터의 양성을 후원한다. “스크린 기반 미디어아트에만 국한하지 않으며 로보틱스, AI 기반 예술도 포함된다”고 박 위원은 덧붙였다. 과연 예술과 기술의 지평을 함께 넓이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또한 국립현대미술관 서울에서 9일부터 새로 시작하는 최우람 전 등 ‘MMCA 현대차 시리즈’를 2014년부터 후원해온 현대자동차는 지난 10년간 상당히 세련된 예술 후원 활동을 보여왔다. 특히 영국의 테이트 미술관과 2015~2025년 장기 파트너십을 맺고, 본래 화력발전소였던 테이트 모던의 거대한 터바인 홀에 매년 새롭게 열리는 ‘장소특정적’ 개인전 ‘현대 커미션’을 후원하는 것은 물론, 다양한 관점에서 전지구의 예술을 연구하고 서구중심이었던 세계예술사를 새롭게 고쳐 쓰는 연구소 ‘현대 테이트 리서치 센터: 트랜스내셔널’을 설립해 대규모 백남준 회고전으로 그의 세계미술사적 위치를 재조명하는 등의 성과를 거두었다.

프로그램 시작 당시 현대차 관계자는 이렇게 야심 찬 큰 그림을 밝혔다. “자체 미술관을 세우기보다 세계 각지의 기존 주요 미술관들과 장기 파트너십을 늘려나갈 생각이다. 왜냐하면 우리의 목적은 우리의 아트 컬렉션을 보여주는 게 아니라, 향후 10년간의 세계 미술사를 새로 쓰는 것이기 때문이다. 비즈니스 결정은 결국 그 시장의 문화적 토양 위에서 이루어지는데, 그 토양 자체에 영향을 미치고자 한다. 또한 한국에 기반을 둔 기업으로서 서구에 치우친 세계 미술사에서 한국을 포함한 아시아의 위치를 강화하고자 하는 의도도 있다.”

‘MMCA 현대차 시리즈: 최우람 전’. [사진 국립현대미술관]

‘MMCA 현대차 시리즈: 최우람 전’. [사진 국립현대미술관]

한편 예경 콘퍼런스에서 유통업체 예술 후원을 대표해 나온 롯데백화점의 김영애 아트콘텐트실 상무는 미술관 접근이 서울만큼 쉽지 않은 수도권 신도시에 백화점·아울렛을 건립할 때 데이비드 호크니·구정아 등 유명 작가의 작품을 설치해 “아예 미술관처럼 구성하고 있다”면서 “대중과 가장 접점에 있는 곳”으로서 백화점과 미술의 오랜 관계를 설명했다. “일제강점기 조지아 백화점으로 시작했던 곳이 해방 후에 미도파 백화점이 되었고 지금 롯데백화점 영플라자인데, 바로 이곳에서 1955년에 이중섭 작가의 전시회가 열렸다… 우리나라에서 지금과 같은 현대적 모델의 갤러리가 없었을 때 백화점 내부 갤러리가 그런 역할을 해왔다.”

“요즘 롯데를 비롯해 여러 백화점이 내부 갤러리에서만이 아니라 상점들 사이에, 곳곳에 미술작품을 전시하고 판매하는데, 예술을 아무 맥락 없이 그저 장식품이자 진열 상품으로서 취급하는 게 아닌가?”라는 질문에 대해서 김 상무는 “그 비난을 스스로도, 회사 안에서도 많이 한다. 그런데 테마 있는 전시를 위해 노력하지만, 비록 맥락 없이 걸리더라도 작품을 더 쉽게 많은 곳에서 볼 수 있는 편이 낫다고 생각한다”라고 답했다. 또한 “백화점이 화랑 비즈니스를 해서 화랑들 밥그릇을 빼앗는 게 아니냐”라는 질문에 대해서는 “오히려 외부 화랑들, 전문가들과 적극 협업할 생각이다”라고 답변했다.

이처럼 백화점 등 유통업체의 경우에도 장기적인 브랜드 이미지와 CSR을 위한 비영리적 후원과 영리적인 협업 및 화랑 비즈니스가 함께 섞여 있다. 어느 쪽에 집중하든 기업의 자유이지만 대기업이라면 그들만이 할 수 있는 장기적인 큰 그림의 후원, 사회와 문화 풍토 자체를 바꾸겠다는 의지의 메세나에 더 힘을 기울이라고 권하고 싶다.

한편 최근 몇몇 기업 오너가 컬렉션을 하다가 미술관이 아닌 상업갤러리를 여는 사례가 있다. 이 또한 자유이지만, 영리사업에 미술 거래를 추가하면서 “예술 후원을 위해” “젊은 작가 육성을 위해” 갤러리를 열었다고 미사여구를 동원하는 것은 웃프게 들린다. 예술 후원과 영리적 아트 비즈니스는 다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