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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송길영의 빅 데이터, 세상을 읽다

화양연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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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송길영 Mind Miner

송길영 Mind Miner

추석이 다가옵니다. 봄 여름의 볕을 한껏 품은 곡식과 과실이 패여 태양과 땅의 기운을 전해줍니다. 축복의 이 명절은, 혹독한 겨우살이를 견디게 하는 가을걷이를 허락합니다. 이렇게 계절의 전환기에는 일상이 그저 쌓이고 쌓여 이어져 오던 제 생활도 더욱 돌아보게 됩니다. 햇살, 온기, 습도, 이렇게 들이쉬고 내쉬는 ‘공기’가 달라졌기 때문일까요? 보름달로 표현되는 정점의 차오름은 황금벌판의 풍요로움으로 충만하지만, 예정된 추수 후의 쓸쓸함으로 성쇠의 이치를 우리에게 가르쳐 줍니다. 모든 것은 차면 이지러진다는 선현의 말씀처럼 영화로운 시기도 한때라는 순리를 느낄 수 있습니다.

이렇듯 찰나와 같은 짧은 화려한 시기를 아쉬워하는 인간의 욕심은 이를 늘일 방도를 모색합니다.

지난달 벤처기업들 모임에 다녀왔습니다. 스타트업이라 통칭하는 대담한 시도의 산업은 으레 푸릇한 젊음을 떠올리기 십상입니다. 그런데 강연장을 채운 사람들 중 절반 이상은 희끗한 머리의 장년들이었습니다. 한국의 벤처기업 역사가 벌써 40년을 넘어가며 새로이 시작하는 청년과 함께 지금의 역사를 만들어가고 있었습니다. 숱이 줄어들고 몸이 무거워짐은 피할 수 없는 세월의 무게입니다. 하지만 반짝거리는 눈빛과 미래를 기획하는 용기는 여전하기에, 새로운 도전을 시도하는 자들의 패기는 모인 공간을 가득 채우고도 넘쳐났습니다.

이번 달 다녀온 코스닥 상장사 모임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유망한 중소기업과 용감한 벤처기업의 자금 조달을 위한 증권시장의 참여자들 역시 환갑을 훌쩍 넘긴 경험 많은 대표들로부터 지금 막 상장한 젊은 대표들까지 다양했습니다. 그곳에서 신진과 관록의 전문가들이 첨단의 공부를 함께 하는 아름다운 모습을 보았습니다. 수십여 성상이 지났지만 여전한 호기심과 모험심을 이어나가는 장년들의 모습을 보며 세월의 거센 물결을 의연히 버티는 새로운 청년을 마주할 수 있었습니다.

일러스트 = 김지윤 기자 kim.jeeyoon@joongang.co.kr

일러스트 = 김지윤 기자 kim.jeeyoon@joongang.co.kr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진부한 표현은 이제 장수의 축복과 함께 더욱 실감됩니다. ‘인생칠십고래희’라는 시인의 말씀은 120세 만기의 종신보험의 출현과 더불어 더욱 옛이야기처럼 느껴집니다. 인생의 화려한 시기 역시 자연스레 늘어나게 됨은 충분히 유추할 수 있습니다. 불과 수십 년 전만 하더라도 인생의 종반부로 인식되던 환갑은 새로운 시작으로 축하되고, 칠순과 팔순 역시 그리 특별하지 않은 일상적 이벤트로 기억됩니다. 노인대학에서 민요와 장구를 배우던 성인 교육 역시 드론과 동영상 편집처럼 새 시대를 위한 적응의 기예로 현행화되고 있습니다. 생로병사의 순리가 육십년 한 갑자로 이루어지던 숨 가쁜 박자가 120세의 여유로 확장되며 좀 더 여유있는 템포가 허락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적응해야 할까요?

먼저 나이에 대한 강박을 벗어야 합니다. 서른살, 마흔살, 쉰살의 압박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습니다. 뜻을 세우고, 유혹에 흔들리지 않으며, 천명을 이해해야 한다는 압력은 두배의 호흡으로 이완되어집니다. 언제든 새롭게 시작하십시오. 서른에 시작할 수도, 마흔에 모색할 수도, 쉰에 다시 시작할 수도 있습니다. 예순에 걸음마를 해도 앞으로 남은 시간이 지나간 시간만큼 기다리고 있습니다. 언제든 다시 시작할 수 있다면 좀 더 큰 뜻을 품는 것 역시 허락됩니다.

그렇다면 더욱 자신을 채우십시오. 주어진 기회가 촉박하면 축적의 밀도 또한 성기기 마련입니다. 예전의 짧은 삶은 채우기 위한 기한이 한정되었습니다. 조급한 마음은 과정의 서툼이 영글지 못해도 끝내지 못함을 두려워하여 타협하곤 했습니다. 이제 피카소와 가우디처럼 장수의 거장이 누린 성취의 행운이 모두에게 다가오며 더욱 깊은 축적이 보편화됩니다. 그렇다면 우리 또한 축적의 농도를 짙게 만들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조바심을 내지 말고 충분히 즐기시기 바랍니다. 가을볕은 따사롭지만 재빨리 사라지기 마련입니다. 보름달과 같이 채워진 결실의 계절이 너무나 짧기에 우리는 충분히 즐기기 전 급급히 거두곤 했습니다. 장수의 축복과 함께 가장 빛나는 시기 역시 더욱 연장되고 있습니다. 꽃처럼 화려한, 가장 아름다운 시절이 화무십일홍이 아니라 백일홍처럼 길어지고 있습니다.

꽃 피는 곳이 있다면 어디든 청춘입니다. 청춘은 지속됩니다.

인생에서 가장 아름답고 행복한 시간, 당신의 화양연화는 바로 지금입니다.

송길영 Mind Min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