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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업 손배소 금지 '노란봉투법'…野 밀어붙이자, 與 거센 반발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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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4면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에 대한 검찰 수사를 놓고 여야가 강대강 대치를 이어가는 가운데 이른바 ‘노란봉투법’이 또 다른 대치 전선을 형성할 전망이다. CJ대한통운, 대우조선해양, 하이트진로 등 올해 잇따라 파업 사태를 겪은 대기업이 노조를 상대로 불법 쟁의에 대한 금전적 배상 카드를 꺼내들자 노동계가 반발하고 야권이 이에 동조하면서 정치권까지 여파가 미치고 있는 것이다.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달 17일 서울 용산 대통령실 브리핑룸에서 열린 취임 100일 기자회견에서 취재진 질문에 답변하고 있다. 뉴시스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달 17일 서울 용산 대통령실 브리핑룸에서 열린 취임 100일 기자회견에서 취재진 질문에 답변하고 있다. 뉴시스

'노란봉투법'으로 불리는 노동조합법 및 노동관계조정법 개정안은 노사 쟁의로 타격을 입은 기업이 노동조합이나 조합원 개인을 상대로 손해배상청구권을 행사하지 못하도록 제한하는 게 골자다. 불법 파업으로 손해를 본 회사가 노동자 측에 금전 배상을 요구할 권리를 법으로 봉쇄하자는 취지다. 2014년 쌍용자동차 파업 때 손해배상 판결을 받은 노조원을 돕기 위한 성금이 노란 봉투에 담겨 전달된 데서 노란봉투법이란 이름이 나왔다.

민주당은 이재명 대표 취임 이틀 뒤인 지난달 31일 ‘정기국회 22대 민생입법과제’ 중 6번째에 노란봉투법을 등장시켰다. 납품단가연동제 도입(14번)·안전운임제 일몰제 폐지(19번) 등 대선 전부터 주장해 온 다른 친노조 입법보다 노란봉투법이 더 우선순위다. 진성준 원내수석부대표는 지난 5일 라디오에서 “노조에 대한 손해배상 청구 소송이나 가압류 조치는 노동 기본권을 넘어 노동자의 생존권마저 위협하는 것이기 때문에 제한 입법이 시급하다”며 “반드시 (이번) 정기국회 안에 처리하는 게 목표”라고 밝혔다.

이재명 대표도 큰 틀에선 이 법안에 공감하고 있는 상황이다. 이 대표가 지난 1일 이은주 정의당 비상대책위원장을 예방한 자리에서 이 위원장은 노란봉투법을 포함한 노동 현안에 관한 협조를 요청했고, 이 대표는 “민주당이 하고자 하는 일이나 정의당이 지향하는 바나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며 화답했다.

당초 노동계에서 주로 거론되던 노란봉투법이 민주당 핵심 과제로 등장하자 국민의힘은 난색을 표하고 있다. 송언석 원내수석부대표는 6일 중앙일보 통화에서 “현재 파업 중 불법 공장 점거, 기물 파손 등이 발생했을 때 사측이 할 수 있는 유일한 대응책이 사후 손해배상 청구”라면서 “파업 중 다른 노동자를 채용하는 대체근로가 막혀있는 상황에서 사측의 손해배상 청구권마저 제한하는 법은 경영진을 속수무책으로 만들고, 노조 권한을 지나치게 비대하게 만드는 잘못된 법”이라고 말했다.

국회 환경노동위원회 국민의힘 간사이자 한국노총 출신인 임이자 의원도 통화에서 “지금도 헌법에 노동 3권이 명시적으로 보장돼 있고, 위법이 아닌 합법 쟁의에 대해서는 민·형사상 노동자의 면책권을 인정해준다”면서 “노동권뿐 아니라 재산권도 헌법에 명시된 권리인데 (하위법인 노동법상) 단체행동권을 변질시켜 불법 쟁의 시 노동자에 민·형사상 책임을 면책하는 것은 헌법에 어긋난다”고 주장했다.

시민사회단체와 노동단체 회원들이 5일 오전 서울 강남구 하이트진로 본사 앞에서 '하이트진로 고공농성 투쟁 추석 전 해결 촉구'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뉴스1

시민사회단체와 노동단체 회원들이 5일 오전 서울 강남구 하이트진로 본사 앞에서 '하이트진로 고공농성 투쟁 추석 전 해결 촉구'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뉴스1

윤석열 정부 출범 이후 첫 정기국회를 맞은 국민의힘은 대부분의 노동 입법에 야당과의 합의 가능성을 열어두고 있다. 송 수석은 “납품단가 연동제는 정책위를 비롯해 국민의힘 내부에서도 찬반이 엇갈리는 이슈”라며 “민주당이 폐지를 주장하는 안전운임제 일몰도 조금 더 연장하는 쪽으로는 논의할 수 있다는 입장”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노란봉투법에 대해선 초반부터 반대 입장이 명확하다. 대선 후보 시절부터 불법 파업에 “법대로 대응”을 강조해 온 윤 대통령의 노동 철학이 결정적 배경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환노위 소속 여당 의원은 “윤 대통령은 취임사에서도, 국회 시정연설에서도, 8·15 경축사에서도 ‘자유’를 강조했다”면서 “노동자들이 파업으로 ‘노동을 팔지 않을 자유’를 제한없이 보장받는 만큼 사용자들도 그에 상응하는 ‘노동을 사지 않을 자유’와 나아가 재산권 행사의 자유를 충분히 가져야 한다”고 말했다.

윤 대통령은 지난달 17일 취임 100일 기자회견에서 대우조선해양 하청노동자와 하이트진로 화물노동자들의 시위에 대해 “우리가 지금 가지고 있는 노동법 체계는 근본적인 노사 갈등과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안으로 국민들이 합의해서 만들어 놓은 체제”라면서 “대화와 타협을 할 수 있는 시간을 주고 그래도 안 된다고 할 때는 법에 따라서 일을 처리할 수밖에 없는 그런 문화가 정착이 돼야 한다”고 말했다.

특히, 대우조선해양 사태가 한창이던 지난 7월 18일 윤 대통령은 한덕수 국무총리와의 주례회동에서 “법치주의는 확립돼야 한다”거나 “산업 현장의 불법 상황은 종식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정부가 긴급관계장관회의를 열어 5개 부처가 공동 명의로 “법과 원칙에 따라 엄중하게 대응할 수밖에 없다”고 경고하는 일도 있었다. 지난 5월 대통령직 인수위원회는 110대 국정과제를 발표하면서 “사용자의 부당해고·부당노동행위, 노조의 불법 파업 등은 법과 원칙에 따라 처리한다”고 명시했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왼쪽)와 이은주 정의당 비상대책위원장이 1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만나 인사하고 있다. 김경록 기자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왼쪽)와 이은주 정의당 비상대책위원장이 1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만나 인사하고 있다. 김경록 기자

전문가들은 “노·사 현실을 외면한 정쟁용 입법 싸움”을 우려하고 있다. 권혁 부산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영국이 손해배상 상한을 일부 두고 있을 뿐, 전세계적으로 노·사간 손배소를 제한하는 입법례는 찾아보기 어렵다”면서 “‘불법’이라는 법적 평가를 전제로 하면서도 민·형사상 책임을 면하도록 하는 취지의 노란봉투법은 그 의도가 선하더라도 입법적으로는 매우 구현이 어려운 법체계”라고 지적했다.

노란봉투법은 이미 19·20대 국회에서도 제대로 된 논의 없이 폐기된 전례가 있다. 익명을 요구한 노동 전공 교수는 “박근혜 정부 이전부터 노동계가 주장해 온 사안을 문재인 정부 때 추진하지 않다가 민주당이 이제 와 이슈로 제기하는 것은 여야 협상을 위한 정치적 행위로밖에 보이지 않는다”며 “이번 하이트진로 시위의 경우 노동법상 노조가 한 것도 아니고, 그간 노동 현장에서 입법 여건을 결정적으로 바꿀 변수가 발생하지도 않았다”고 지적했다.

5일 오후 서울 여의도 국회 앞에서 열린 대우조선 하청노동자 고용승계 보장 시민사회단체 기자회견에서 한 참가자가 폭우에 젖은 피켓을 들고 있다. 민변과 참여연대 등 이날 기자회견에 참석한 시민사회단체들은 대우조선해양이 고용승계 합의를 지키지 않고 있다며 고용승계를 보장하고 손해배상을 중단할 것을 촉구했다.뉴스1

5일 오후 서울 여의도 국회 앞에서 열린 대우조선 하청노동자 고용승계 보장 시민사회단체 기자회견에서 한 참가자가 폭우에 젖은 피켓을 들고 있다. 민변과 참여연대 등 이날 기자회견에 참석한 시민사회단체들은 대우조선해양이 고용승계 합의를 지키지 않고 있다며 고용승계를 보장하고 손해배상을 중단할 것을 촉구했다.뉴스1


☞노란봉투법=노동조합법 및 노동관계조정법 개정안. 2014년 쌍용차 파업 손해배상 판결을 받은 노조원 돕기 성금을 노란 봉투에 담은 데서 이름을 따왔다. 21대 국회에 5건이 계류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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