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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자괴감 듭니다" 안내방송했던 소장 목소리가 떨렸다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비가 억수 같이 퍼붓는 가운데 새벽 4시쯤 출근했습니다. 30분쯤 지나 안내방송을 하려고 전원을 올렸죠.”

6일 오후 경북 포항 남구의 한 아파트 단지 경비실. 태풍 ‘힌남노’가 상륙한 가운데 이날 오전 6시쯤 이 아파트 지하주차장에 차를 빼러 내려간 주민 7명이 삽시간에 들이닥친 물에 잠겨 연락이 끊기는 사고가 일어났다. 이 가운데 2명은 구조됐다. 경비실에서 만난 관리사무소장 A씨가 힘겹게 당시 상황을 설명했다. 다음은 A씨가 재구성한 사고 상황.

6일 오후 경북 포항시 남구의 한 아파트에서 소방당국이 태풍 '힌남노'로 인해 지하 주차장에서 실종된 주민 7명을 찾는 수색작업을 벌이고 있다. 뉴시스

6일 오후 경북 포항시 남구의 한 아파트에서 소방당국이 태풍 '힌남노'로 인해 지하 주차장에서 실종된 주민 7명을 찾는 수색작업을 벌이고 있다. 뉴시스

“방송 때까지도 지하주차장 안 잠겨”

출근한 지 30분 만인 이날 오전 4시30분쯤 그는 직접 주민들에게 안내방송을 내보냈다. “102동 유치원 놀이터 쪽에 주차된 차량은 이동해주십시오. 지하주차장은 괜찮습니다.” 이후 그는 폭우를 뚫고 순찰을 하러 나갔다고 한다.

6일 오후 경북 포항 남구의 한 아파트에서 태풍 '힌남노'의 폭우 때 지하 주차장에서 실종된 주민 7명을 찾는 수색작업이 진행되고 있다. 연합뉴스

6일 오후 경북 포항 남구의 한 아파트에서 태풍 '힌남노'의 폭우 때 지하 주차장에서 실종된 주민 7명을 찾는 수색작업이 진행되고 있다. 연합뉴스

순찰을 하던 A씨는 빗줄기가 예사롭지 않다고 느꼈다. 실제 기상청 지역별상세관측자료를 보면 이날 오전 3시부터 9시까지 포항 남구에는 261㎜의 폭우가 쏟아졌다. 그는 “오전 5시20분쯤 다시 방송했다. 이때는 지하주차장에도 물이 찰 수 있으니까 차량을 지상으로 옮겨달라는 내용을 추가했다”고 말했다. 이후 그는 안내방송에 따라 이동할 차량을 통제하기 위해 다시 밖을 나섰다.

그래픽=김주원 기자 zoom@joongang.co.kr

그래픽=김주원 기자 zoom@joongang.co.kr

순식간에 범람한 하천, 비극 물꼬 됐다

역대급 태풍 힌남노 상륙이 예보된 이날 새벽 관리사무소에는 A씨 이외에도 시설과장과 경비원, 입주자대표회의 등 4명이 더 있었다고 한다. A씨가 차량 통제를 위해 관리사무소를 나선 뒤 시설과장이 2차례에 걸쳐 다시 주민 안내방송을 했다. A씨는 “정확히 듣지 못했지만, 침수가 우려되니 지하주차장 차량을 옮겨달라는 내용의 방송이었을 것”이라고 했다.

오전 5시50분 아파트 인근 하천인 냉천이 폭우에 흘러넘쳤다. 냉천은 해병로를 사이에 두고 아파트 정문과 약 150m 거리에 있는 하천이다. A씨는 “하천이 넘치며 삽시간에 엄청난 양의 물이 들이닥쳤다. 물이 밀려와 지하주차장이 완전히 잠기는 데 10분 정도밖에 걸리지 않았다”고 했다.

6일 경북 포항시 남구 인덕동 한 아파트단지 지하주차장이 제11호 태풍 '힌남노'의 여파로 침수 피해가 난 가운데, 소방당국이 지하주차장에서 연락이 끊긴 실종자를 찾기 위해 배수 작업을 하고 있다. 김민주 기자

6일 경북 포항시 남구 인덕동 한 아파트단지 지하주차장이 제11호 태풍 '힌남노'의 여파로 침수 피해가 난 가운데, 소방당국이 지하주차장에서 연락이 끊긴 실종자를 찾기 위해 배수 작업을 하고 있다. 김민주 기자

119 신고를 하지 않았느냐는 질문에 A씨는 “119 신고를 떠올리지 못할 만큼 경황이 없었다”며 “(내가) 신고하지 않았지만 그즈음 이미 구급차 사이렌이 들려왔다. 하지만 하천이 범람하고 진입로로 흘러들자 구급차가 들어서지 못했다”고 말했다. 소방당국은 이날 기록적 폭우로 하천이 범람하며 아파트 지하주차장으로 유입된 것이 이번 사고의 원인이라고 추정했다.

“앞뒤 없는 ‘책임론’에 심한 자괴감”

어렵사리 인터뷰에 응한 A씨는 괴로워하고 있었다. 태풍으로 인한 정전 탓에 불이 꺼진 경비실에서 그를 대면했지만, 한 마디를 뱉어낼 때마다 그의 몸과 목소리가 떨렸다. 온라인상에서 “안내 방송으로 인해 사고가 일어났다”는 마녀사냥식 여론이 높아지고 있다는 걸 A씨는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역할에 충실해지려 했을 뿐이라는 취지로 억울함을 호소했다. 침수 이후의 상황을 물었지만 A씨는 젖은 목소리로 “미안하다. 더는 도저히 이야기할 수 없다”며 발걸음을 돌렸다. 이날 현장에서 만난 다수 주민은 “관리사무소 측은 태풍 상황에서 아파트 단지를 관리하려 최선을 다했다. 안내 방송은 주민 재산 피해를 막으려는 시도였을 뿐 사고가 일어나라고 내보낸 것이 아니다. 관리사무소 측에 대한 책임 제기는 잘못된 것”이라고 강하게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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