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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료 현장의 태움 문화, 플랫폼 노동으로도 확산된다"

중앙일보

입력

의료현장의 지옥 같은 태움 문화와 해양 스포츠 서핑을 곁들인 장편소설 『덕다이브』를 펴낸 의사 겸 소설가 이현석.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의료현장의 지옥 같은 태움 문화와 해양 스포츠 서핑을 곁들인 장편소설 『덕다이브』를 펴낸 의사 겸 소설가 이현석.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좋은 소설은 네다섯 시간의 몰입을 너끈히 선사하지만 결국 남는 건 인상 깊은 몇 장면, 문장 몇 개다. 소설에서 얻은 깨달음이라는 이름으로 우리가 간직하는 것들 말이다.
 의사 겸 소설가, 아니 순서를 바꾸자, 소설가 겸 의사 이현석이 최근 펴낸 장편 『덕다이브』(창비)에서 뜨끔했던 문장들은 뜻밖에도 작가의 말('참고한 내용과 약간의 덧붙임')에 있었다. 그대로 옮겨도 괜찮을까 싶을 정도로 수위가 '센' 사건들을 언급했다.
 "학생 때부터 지금까지 대여섯군데의 의료기관을 거쳤다.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태움'은 어디에나 있었고 그것은 간호사에 국한된 문제만은 아니었다. 남자 인턴의 정강이를 걷어차 넘어뜨리던 남자 레지던트의 일그러진 얼굴. 여자 전공의가 실신할 때까지 욕을 퍼붓던 여자 교수의 성난 음성. 나는 여전히 그런 것들을 생생하게 기억한다. 저기서 벌어졌던 일들이 여기서도 벌어지고 옛일인 줄로만 여겼던 일들이 지금도 일어난다." (287·288쪽)

이현석의 첫 장편소설 『덕다이브』. 이씨는 2017년 중앙신인문학상으로 등단했다

이현석의 첫 장편소설 『덕다이브』. 이씨는 2017년 중앙신인문학상으로 등단했다

 태움 문화와 서핑은 어떻게 연결되나 

 불과 몇 해 전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의료현장의 태움 문화가 이번 소설의 소재다. 요는 태움이 아직도 사라지지 않고 있다는 것. 『덕다이브』는 고발소설 혹은 늦게 도착한 충실한 재현인 걸까. 단순한 독해를 교란하는 대목이 소설 본문에 보인다.
 "오해가 풀리고 환대의 문이 비좁게 열리면서 태경 또한 그가 구축한 세계 안으로 발을 내디뎠다 (…) 그가 만들어 놓은 질서에 빠르게 편입되어가면서 주저하던 마음도 같은 속도로 희미해졌다. 그리고 그 과실은 분명히 달았다." (178·179쪽)
 소설 주인공이 태움 주범 편에 서는 장면이다. 태움 방관자. 어떤 의미에서 공범. 한 사람에게 가해지는 태움 형벌은 결국 주변의 묵계와 공모를 전제로 하는 것이기 때문에 보다 많은 '수동적인 가해자'들이 있을 수밖에 없는데, 소설은 방관자의 내면을 건드린다. 단순 고발이 아닌 것이다.
 그리고 서핑. 서핑이 있다. 소설 제목 '덕다이브'부터 서핑 용어다. 바늘처럼 수면 아래로 파고들어 큰 파도를 피하는 기술을 뜻한다. 지옥 같은 노동 현장과 서핑은 어떻게 연결되는 걸까. 다시 작가의 말.

태움+서핑 장편소설 낸 작가 겸 의사 이현석

이현석씨의 서핑 장면. 서핑은 소설의 정의를 따르면 파도의 경사면 가운데서 국대화되는 운동에너지를 이용하는 스포츠다.

이현석씨의 서핑 장면. 서핑은 소설의 정의를 따르면 파도의 경사면 가운데서 국대화되는 운동에너지를 이용하는 스포츠다.

의사 전문성 최대한 써먹는 소설 쓰기  

"이 책(『나와 타자들: 우리는 어떻게 타자를 혐오하면서 변화를 거부하는가』)을 몇번이고 다시 읽으면서 소설에 중요하게 등장하게 될 심상 하나를 처음으로 떠올렸다. 그것은 자기만의 파도를 기다리며 라인업 위에 떠 있는 서퍼들이었다. 은유보다는 직유에 가깝게, 우연과 불확실성에 내던져진 개인들을 닮은 그 이미지는 이 소설의 또 다른 시작점이었다." (291·292쪽)

 2017년 중앙신인문학상을 받아 소설가가 된 의사 이현석은 전문성을 십분 발휘하는 글쓰기를 선보여 왔다. 지난해 첫 소설집 『다른 세계에서도』(자음과모음)에서도 의료 현장 이야기를 꺼냈고, 한 달에 한 번 중앙SUNDAY에 연재하는 칼럼 '소설의 곁'에서도 자신의 전문 분야인 산업보건, 직업병 진료 체험을 문학작품과 버무려 빚어낸다. 서핑은 7, 8년 된 취미다. 요컨대 그는 아는 한도 내에서 쓴다. 갈수록 드물어져 그만큼 귀하게 느껴지는 작가 미덕이다.

이현석은 "인간 내면의 양면성 혹은 다면성을 가진 인물들에 흥미를 느낀다"고 했다. 권혁재 사전진문기자

이현석은 "인간 내면의 양면성 혹은 다면성을 가진 인물들에 흥미를 느낀다"고 했다. 권혁재 사전진문기자

마음 움직이는 사회적 소재에 관심 

 -발 빠르게 서핑에 손댄 것 같다. 어떤 매력이 있는 스포츠인가.
 "강제적으로 명상을 한다고 할까. 아무 생각을 안 하게 하는 게 제일 좋은 점인 것 같다. 바닷물에 던져지면 어쨌든 살아남아야 하니까."
 -소설에 "한계를 갱신하고 있다는 확신과 끝내 익숙해지지 못하리라는 감각이 평행하여 질주했다"는 문장이 나온다. 서핑이 그만큼 쉽지 않은 운동이라는 얘기인데, 창작과도 일맥상통할 것 같다.
 "정확히 같은 것 같다. 의사는 13년 정도 양성과정을 거친다. 자신감을 갖고 그 세계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다. 소설가가 된 지 5년밖에 안 되기도 했고, 매년 느끼는 건 제로베이스다."
 -사회적인 소재에 관심이 많은 것 같다.
 "내 마음을 움직이는 일들에 대해 자꾸 쓰게 되는 것 같다. 작가들 가운데 자기 이야기를 잘 쓰는 인생 천재 같은 분들이 있다. 나는 잘 못 쓰고, 꺼리게 된다. 그러다 보니 사회적 주제나 사건에 더 조응하는 편이다. 조해진이나 최진영 같은 여성 작가분들도 사회 문제에서 유리되지 않는 소설을 쓰시는데, 내가 생물학적 남자다 보니 좀 튀어 보이는 것 같다."

이현석은 뚜렷한 문장관을 갖고 있다. "읽는 이를 멈춰 세우면서도 이야기 자체가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문장을 좋은 문장이라고 생각한다"고 했다. 생각거리를 던져야 한다는 얘기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이현석은 뚜렷한 문장관을 갖고 있다. "읽는 이를 멈춰 세우면서도 이야기 자체가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문장을 좋은 문장이라고 생각한다"고 했다. 생각거리를 던져야 한다는 얘기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태움 가해자도 정신적 트라우마 입어

-마음을 움직이는 일들은 결국 어떤 것들인가.
 "인간은 도대체 어떤 존재인가, 세상이 이러면 안 되지 않나, 화나거나 슬프게 하는 사건들이다. 코로나 이후 업무상 스트레스로 인한 정신과 질환 건수가 3배 정도로 늘었다. 소설에서는 특정 직종 이야기를 다뤘지만 앞으로는 다를 수 있다."
 -태움이 점점 일반화된다는 이야기인가.
 "플랫폼 노동이 점점 늘어나지 않나. 노동 환경은 대면에서 안 좋아지기도 하지만 비대면에서 안 좋아질 수도 있다. 사람이라는 게 딱 맞아 떨어지게 설계된 게 아니지 않나. 짜여진 시스템은 논리대로 돌아가는데 사람은 반드시 그렇지는 않다. 그 언밸런스에서 필연적으로 문제가 생긴다."
 -해결책은 있을까.
 "안 되는 일은 안 된다고 명확하게 명토 박는 게 중요한 것 같다. 가령 사회적 합의를 통해 제정된 중대재해처벌법 정도는 지키며 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태움 방관자의 죄의식을 비중 있게 그렸는데.
 "가해자에게도 정신적 생채기가 있다는 게 학계 입장이다. 피해자 이야기를 선정적으로 쓰기보다, 방관자의 트라우마를 통해 파고들고 싶었다."
 -작가의 말 말미에서, 타인의 아픔에 대한 공감이 나르시시즘으로 끝나면 안 된다고 했는데.
 "내가 이만큼 공감을 잘하니 나는 대단한 사람, 이런 데로 빠지는 상황을 경계한 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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