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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송호근의 세사필담

그곳에 광장은 없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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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송호근 본사 칼럼니스트·서울대 명예교수

송호근 본사 칼럼니스트·서울대 명예교수

가을이 오는 길목, 4년 전 꼭 이맘때였다. 서울대를 떠나 새로 부임한 포항공대(포스텍) 캠퍼스를 돌아다녔다. 개학 전이라 인적은 뜸했고 건물은 숙연했다. 반듯한 건물을 돌자 너른 둔덕이 시야에 들어왔다. 멀리 시내가 한눈에 보이고 제철소 굴뚝이 위용을 자랑했다. 두 개의 ‘광장’이 떠올랐다. 시민광장과 교수·학생 광장. 시민들이 대학캠퍼스를 즐기고, 교수 학생이 자유롭게 토론하는 장면. 그때 팻말이 눈에 띄었다. “Keep Off!” 풀밭인데 왜? 후에 알았다. 개교의 원대한 포부가 서린 원점, 이름하여 ‘폭풍의 언덕’이었다.

과학대학에 처음 시민광장 개설
교수·학생의 사회적 관심은 요원
랩 학과 이기주의로 혁신 어려워
공론없는 과기대 미래비전 암울

포스텍은 32년 만에 문호를 개방했다. 엘리트 과학자 대학에 지역민 서비스를 부가하는 것은 비교적 쉬웠다. 시민교육을 개설해 문학·예술·과학의 진미를 선보이고, 전국 명사들과의 만남을 주선하는 일. 반기문 전 유엔총장과 기후위기를 함께 걱정했고, 서명숙 제주올레 이사장이 시민들과 함께 길을 걸었으며, 김훈 작가와 글쓰기의 애환을 나눴다. 포스코의 21세기 비전인 ‘기업시민’이란 경영 이념과 꼭 맞아 떨어졌다. 시가지에 묻힌 애틋한 사연을 시민 수강생들과 함께 캐내 『포항의 길』이란 책을 냈다. 한국 유일의 운하(運河)가 인문학 세례를 받아 반짝였고, 인근 청하(淸河) 태생 재일(在日) 음악인 박영일은 부친의 징용길에 가로놓인 영일만을 두고 울었다.

대학에 처음 들른 시민들은 청춘 시절이 생각나 가슴이 울렁였다고 했다. 먹자골목까지 약 1㎞, 학생들이 오르내리는 그 길을 ‘창업가의 길’로 명명했다. 가로등이 불을 밝힌 보도에 스토리보드가 곧 만들어질 거다. 그렇게 생명을 얻은 시민광장은 지역민의 지적 갈증을 풀어주기에 여전히 갈 길이 멀다.

교수·학생 광장은? 5대 과기대 토론대회를 열고 SF문학상을 제정해도 사회적 관심은 요원했다. 학생 토론방엔 소소한 일상과 민원이 가득하다. 대자보를 본 일이 없다. 서울대도 진배없지만 가끔은 학내 쟁점이 대자보로 출현한다. 학생들의 내무사열은 무섭다. 표절, 부도덕한 짓을 저지른 교수는 망신 당하거나 쫓겨난다. 포스텍 교수게시판은 철 지난 바닷가, 누가 미래 비전을 제안하고 학교정책에 시비를 걸어도 반응이 없다. 읽고 묻힌다. 서울대는 읽고 떠든다. 떠든다고 뭔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논의는 무성하고 행동은 없는 게 학교 정치다. ‘조직화된 무정부’란 말이 그래서 나왔다. 무책임한 비판이 난무해도 끝내 꺼지지 않는 호롱불이 있다. 대학정신! 지식공동체의 시대적 책무, 뭇 사회에 송전할 윤리자산이 그렇게 만들어진다.

규모가 큰 카이스트는 좀 다르겠으나 일반 과기대에 공론은 대체로 없을 거다. 토론에 익숙지 않고 시간에 쫓긴다. 동의 과정을 거치는 총장은 드물고, 교수의 감시기제도 취약하다. 종합대학도 엇비슷하지만 과기대는 소단위 장원인 랩(Lab)의 집괴(集塊)다. 본부 정책에 불만이 있다면 의사(疑似)사회주의의 작은 오아시스로 몸을 숨기면 그만이다. 구조개혁이 랩과 학과 운명에 영향을 준다면? 결사반대! 기실 학과 이기주의는 전국 대학을 망치는 주범인데 대통령도 어쩔 수 없는 한국대학의 고질병이다. 학생과 자원을 뺏기면 실험실이 돌아가지 않는다. 과학미래를 짊어진 과기대의 탁월한 교수들은 실상 소사장과 다름없다. 학생 인건비 챙기고 운영비 구하느라 밤잠을 설친다. 과기대 학부 칸막이는 난공불락, 단단한 사일로(Silo)의 문은 좀처럼 개방되지 않는다. 지난 4년간 공론의 총량은 서울대 한 달치에 못 미쳤다.

10여 년 전, 스탠포드대학은 바이오-X 콤플렉스를 지었다. 바이오를 중심에 두고 관련학부와 연구진이 둘러싼 원형건물이었다. 버클리대학의 세계적 연구소인 로렌스랩엔 8000명의 과학자가 연구 중이다. 6개 분야 첨단과학팀은 연구 진척에 따라 팀원을 서로 교체한다. 3년 전, MIT는 AI칼리지에 ‘컴퓨터과학·인공지능연구소’(CSAIL)를 설립했다. ‘전공허물기’가 AI-X사업에 1조 원을 투입하는 조건이었다. 며칠 전 정부가 반도체에 1조, 7대 전략기술에 4조5000억 원을 투자한다고 발표했다. 대체로 사일로의 성곽을 타고 흘러내릴 것이다. 예산을 투입해도 변할 것은 없다.

사회과학자는 이런 상황이 갑갑하다. 세계 과학을 주도할 5대 과기대 역량은 산업화 시대 낡은 구조에 갇혔다. 교수들이 성공의 기억을 사생결단 고수한 탓이다. 그런 와중에도 우주탐사선을 발사했고 창업벤처가 심심찮게 출현하지 않는가? 잠재력은 충분하다. 포스텍은 서태평양 실리콘밸리가 될 수 있다.

포스텍을 ‘드러누운 코뿔소’라 했다가 욕을 되게 먹었다. 서울대는? 시력을 잃어가는 코끼리. 명문사립대는? 유빙(流氷)에 단짝 올라앉은 백곰가족. 혁신의 주체는 묘연하다. 교육부는 감사능력을 발휘해 혁신을 재촉하지만 오히려 목을 옥죈다. 정치광장은 이데올로기로 오염됐고, 대학광장은 교수들의 무정부적 관성에 막혔다. “Keep Off”, 그곳에 광장은 없었다. 그래서, 지난 4년간 변화의 총량은? 글쎄…문명교체의 굉음에 움츠린 정적(靜寂)의 방공호에서 일단 나오는 게 급선무다.

송호근 본사 칼럼니스트·서울대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