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오피니언 박현도의 한반도평화워치

에너지 급한 국제사회, 아프가니스탄에 구애하나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23면

탈레반 재집권 1년, 요동치는 국제정세

박현도 서강대 유로메나연구소 대우교수

박현도 서강대 유로메나연구소 대우교수

아프가니스탄 탈레반이 2021년 8월 15일 수도 카불을 점령한 지 1년여가 흘렀다. 미국이 2001년 탈레반을 몰아내고 세운 민주 정부는 탈레반 침공 직전 가니 대통령이 급히 국외로 탈출하면서 허무하게 무너졌다. 카불 함락 후 2주 만인 8월 30일 밤 11시 59분 미 공군기가 카불을 떠나면서 미국은 국가 건립 이래 가장 긴 20년 전쟁을 마무리하고 철군을 완료하였다.

2001년 9월 11일 뉴욕 맨해튼 세계무역센터, 알링턴 국방부 건물에 테러 공격을 감행한 주범 오사마 빈라덴을 잡기 위해 미국이 10월 7일 아프가니스탄 전쟁을 시작한 지 20년 만에 떠난 데에는 2020년 2월 29일 트럼프 대통령이 탈레반과 맺은 평화협정이 결정적 역할을 하였다. 평화협정 체결 후 아프가니스탄 정부군과 탈레반이 새 정부를 구성하기 위한 협상을 시작하며, 미군은 2021년 5월 1일 철군한다는 것이 미국과 탈레반 양자가 맺은 협정의 골자였다. 탈레반은 미군을 향한 공격은 멈추었지만, 정부군과는 휴전 없이 교전하였으며 새 정부를 함께 구상할 협상에 나서기를 거부하였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주변국들 태도에 큰 변화
아프간 거치는 카스피해 석유·가스 파이프라인 재개 조짐
7월 아프간 재건 회의엔 중·러·인도는 물론 미·영·EU도 참석
인권보다 패권·에너지 중시하는 국제질서 그대로 드러내

탈레반이 협정에서 한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면 미국도 군대를 빼지 말아야 했다는 생각이 들 수밖에 없는데, 바이든 대통령은 협정의 철수 시점인 5월을 9월로 연기하였을 뿐 철수 계획 자체를 폐기하지 않았다. 당시 협상에서 핵심 역할을 한 아프가니스탄 출신 미국 대표 할릴자드에 따르면 가니 대통령은 바이든 대통령이 전임 트럼프 대통령이 탈레반과 맺은 평화협정을 폐기하리라 기대하였다고 한다.

아프가니스탄 국민, 체념 어린 안도

지난해 8월 15일 아프가니스탄 수도 카불의 미국 대사관 위를 나는 치아누크 헬기. 이날 탈레반은 카불을 점령하고 재집권했다. [AP=연합뉴스]

지난해 8월 15일 아프가니스탄 수도 카불의 미국 대사관 위를 나는 치아누크 헬기. 이날 탈레반은 카불을 점령하고 재집권했다. [AP=연합뉴스]

20년 동안 공들인 아프가니스탄이 탈레반 손에 넘어간 이유를 두고 미군 철수와 함께 아프가니스탄 정부의 무능과 부패, 분열이 원인으로 지목됐다. 1년이 지난 시점에서 돌이켜보면 탈레반 재집권 이후 아프가니스탄 국민이 느끼는 비교적 긍정적인 변화는 무엇보다도 지긋지긋한 전쟁이 끝났다는 사실이다. 탈레반이 극악한 조직이라고 하지만, 어쨌든 전쟁이 끝나서 가족의 안전을 걱정하지 않아도 되니 다행이라는 체념 어린 안도감이 아프가니스탄 국민 마음에 자리 잡았다.

또 다른 긍정적인 변화는 공무원 부패가 줄었다. 국제원조가 밀려오던 시절에는 지원금이나 지원 물품이 대상자에 이르기 전에 공무원들이 중간에서 가로채는 경우가 잦아 금액이나 물품 규모의 변화가 일상사였다. 그러나 지금은 옆으로 샐 것도 없으니 부패가 준 셈이다. 탈레반이 정파를 초월한 통합정부를 구성하고 인권을 존중하는 모습을 보이기 전에는 예전처럼 국제사회가 도움을 주지 않을 것이다. 통합정부 구성은 기대하기 어렵고, 제2기 탈레반 치하 아프가니스탄의 여성 인권은 1기 때와 다를 바 없이 참혹하다. 여성은 투명 인간이다. 직장에서 쫓겨나고, 6학년 이상 교육을 받을 길이 막혔으며, 전신을 가리는 부르카를 착용해야 한다.

탈레반 이전 국제사회 지원액은 아프가니스탄 정부 재정의 90%에 육박하였는데, 탈레반 집권 이후 대규모 지원이 끊겼고, 해외 자금도 미국이 동결한 상태다. 따라서 당분간 공무원 부패는 큰 문제가 될 것 같진 않다.

탈레반 공식 인정 국가 아직 없어

1996년 처음 탈레반이 집권하였을 때 사우디아라비아·파키스탄·아랍에미리트만 탈레반의 아프가니스탄을 국가로 인정하였다. 그런데 제2기 탈레반의 아프가니스탄은 현재까지 단 한 나라도 국가로 승인하지 않고 있다. 탈레반은 국제사회로부터 공식 정부로 인정받는데 미국이 가장 큰 걸림돌이라고 공개적으로 밝힌다. 미국은 이에 탈레반을 합법적인 정부로 받아들이는 것은 시기상조라며 부정적인 견해를 피력하였다. 그런데 2월 24일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전격 침략하면서 국제 정세가 요동치고, 아프가니스탄을 둘러싼 주변국의 시각에 변화가 일고 있다.

TAPI 파이프라인

TAPI 파이프라인

사실 1996년 탈레반이 처음 집권하였을 때만 해도 비록 탈레반을 정당한 정부로 인정하지는 않았지만, 미국은 아프가니스탄을 중앙아시아 진출의 교두보로 여겨 탈레반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였다. 당시 미국 에너지 회사 유노컬은 클린턴 행정부와 공화당 후원 아래 카스피해에서 나오는 석유와 가스를 아프가니스탄을 가로질러 인도 대륙으로 운송하는 45억 달러 규모의 석유·가스파이프라인 건설 계약을 탈레반 정권과 시도하였다. 이른바 투르크메니스탄(T)-아프가니스탄(A)-파키스탄(P)-인도(I) 가스파이프라인(TAPI)의 효시다.

또 네브래스카대가 파이프라인 건설 전문인력으로 아프가니스탄 사람 137명을 양성하는 90만 달러 규모의 교육 프로그램까지 발족하였다. 미국은 TAPI 파이프라인을 건설하여 반미 에너지 강국 이란을 옥죄고, 러시아를 견제하며, 중앙아시아 진출의 발판을 놓으려 했다. 그러나 야심 찬 계획은 아프가니스탄에 똬리를 튼 알카에다가 1998년 탄자니아와 케냐 주재 미국 대사관을 폭탄 공격하면서 물거품이 되었다. 미국은 아프가니스탄 내 알카에다 거점에 순항미사일 공격을 퍼부었다. 탈레반이 알카에다의 계획을 알지는 못하였지만, 알카에다와 협력을 끊지 않았기에 미국이 아프가니스탄에 파이프라인을 건설하는 것은 불가능하였다.

인도, 대사관 다시 열고 대화 나서

TAPI 파이프라인은 2010년 관련 4개국 정부가 협정을 맺어 건설을 논의하였고, 투르크메니스탄은 2015년에 시작하여 2019년에 건설 공사를 마무리하였지만, 전체 공정은 정치·경제적 이유로 미완의 상태로 남아 있었다. 그런데 우크라이나 전쟁 발발 이후 파이프라인 관련국의 움직임이 활발하다. 러시아는 투르크메니스탄이 유럽에 가스를 공급할 것을 내심 걱정했는데, 러시아 편에 서자 기쁨을 감추지 못하며 전적인 지원을 약속하였고, 파키스탄은 우호 세력 탈레반을 업고 자원의 혜택을 받고자 적극적이다.

최근 영국이 1893년에 그어 놓은 아프가니스탄과 파키스탄의 국경선 듀란드라인(Durand Line)을 두고 양국 관계가 삐걱거리지만, 파이프라인은 서로에게 유익하기에 이견이 없다. 인도는 탈레반이 집권한 이후 20년 동안 아프가니스탄에 쏟은 노력이 물거품이 되는 아픔을 맛보았으나, 탈레반과 대화를 재개하고 지난 8월 15일 대사관을 다시 열었다. 비록 대사는 파견하지 않았으나 중국을 견제하는 데 아프가니스탄이 필요하기에 인도는 바쁘게 움직이고 있고, TAPI 재개에도 긍정적이다.

탈레반이 집권한 지 1년이 지났지만, TAPI 관련국은 탈레반을 공식 승인하지 않고 있다. 그러나 러시아·중국·이란·파키스탄은 탈레반이 아프가니스탄을 장악할 때도 대사관을 폐쇄하지 않았고, 이제 인도도 대사관을 다시 열었다. 또 러시아가 투르크메니스탄을 지원하면서 인도가 러시아 가스의 혜택을 누릴 것을 기대하고 있다. 에너지 불확실 시대에 이보다 더 좋은 선물은 없는 셈이다.

상하이협력기구서도 주요 안건

1996년 아프가니스탄을 장악하고 2001년 미군에 쫓겨날 때까지 탈레반은 전 국토의 90%만을 통치하였다. 반탈레반 북부동맹이 10%에 이르는 지역을 지배하였다. 예전 북부동맹 지도자 마스우드의 아들이 판즈시르에서 아프가니스탄 국민저항전선을 이끌며 탈레반에 맞서고 있지만, 판세를 엎을 만한 상황은 아니다. 따라서 멀지 않은 시기에 탈레반을 인정하는 나라가 나올 수밖에 없을 것이다. 관계 정립의 기회를 엿보고 있다는 표현이 시의적절하다.

지난 7월 26~27일 우즈베키스탄 수도 타슈켄트에서 열린 ‘아프가니스탄: 안보와 경제협력’ 국제회의에는 러시아·중국·인도는 물론, 이란·튀르키예·카자흐스탄·카타르·키르기스스탄·타지키스탄 등 무슬림 국가와 미국·영국·유럽연합(EU)·이탈리아·스페인·노르웨이 등 서방 국가도 참석하였다.

오는 15~16일 우즈베키스탄 사마르칸트에서 열릴 상하이협력기구 정상회담에서 아프가니스탄은 주요 안건이 될 것이다. 상하이협력기구의 전신은 중국·러시아·카자흐스탄·키르기스스탄·타지키스탄이 상호 안보협력을 다짐하며 1996년에 발족한 상하이 5개국 기구다. 아프가니스탄을 교두보로 중앙아시아에 진출하려는 미국을 막기 위해 중국과 러시아가 함께 손잡고 만든 기구다.

그런데 이제 상하이협력기구가 통합정부를 구성하고, 여성 인권을 개선해야 지원하고, 더 나아가 정부로 승인할 수 있다는 자유민주주의 세계의 압력은 모르는 체하고 아프가니스탄을 온전히 품기 위해 노력하리라 생각하니 국제정세라는 것이 참으로 모질다. 헤게모니와 에너지가 사람보다 더 중요한 시대다.

박현도 서강대 유로메나연구소 대우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