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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박정호의 시시각각

서울대 정문 ‘지식인 의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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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박정호 기자 중앙일보 수석논설위원
서울대 정문 앞에 새로 마련된 '지식인 의자'. 정문 주변에 널찍한 광장도 조성됐다. 아래는 정문 밑으로 차가 다니던 예전 모습. [중앙포토, 연합뉴스]

서울대 정문 앞에 새로 마련된 '지식인 의자'. 정문 주변에 널찍한 광장도 조성됐다. 아래는 정문 밑으로 차가 다니던 예전 모습. [중앙포토, 연합뉴스]

서울대에 명물 하나가 생겼다. 등받이가 달린 높이 1.1m의 화강암 의자다. 지난달 23일 선보인 일명 ‘지식인 의자’다. 누구든, 언제든 와서 잠시 쉬어갈 수 있다.
 의자 뒤로는 높이 17m의 거대 철문이 있다. 흔히 ‘샤’로 불리는 서울대 정문이다. 국립 서울대의 초성 ‘ㄱ, ㅅ, ㄷ’을 본떠 만들었다. 1978년 철근 42.3톤을 들여 만든 조형물이다. 모양 자체가 위압적이다. 대한민국의 많은 이가 선망하는 서울대라지만 ‘지식의 산실’치곤 꽤 권위적이다. 포용과 인정보다 배타와 차별의 이미지에 가깝다. 1980년대 군사정권 시절, 시대에 낙담한 청춘들은 ‘계집, 술, 담배’라는 퇴영적 단어로 치환하곤 했다.

‘차 대신 사람' 광장 만들며 설치
‘여기 앉는 모든 사람 존중’ 뜻해
낡은 패권정치는 자리 비워줘야

 그런데 의자 하나를 놓고 보니 분위기가 훨씬 넉넉해졌다. 보다 친근하게 다가온다. 그뿐만이 아니다. 서울대 정문 입구가 이번에 180도 달라졌다. 우선 정문 아래 4차로 도로가 널찍한 광장으로 바뀌었다. 자동차 대신 사람이 마침내 주인이 됐다. 기존 차도를 관악산 계곡 쪽으로 몰고, 정문 주위로 3500㎡ 크기의 광장을 조성했다. 월계관에 책과 펜·횃불을 놓은 서울대 문장(紋章)도 광장 바닥에 새겨 넣었다.
 특히 광장 사방으로 퍼져 나간 월계수 잎이 눈에 띈다. 의자 밑에도 잎 하나가 살포시 내려앉았다. 그 뜻을 짐작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학문과 지식, 젊음과 패기가 360도 뻗어 나가기를 바라는 마음이리라. 서울대 교훈 ‘진리는 나의 빛(VERITAS LUX MEA)’이 세상을 밝히기를 기원하는 의미도 있다. 1975년 관악캠퍼스 이전 이후 서울대가 이제야 제 얼굴을 찾은 것 같은 느낌이다. 서울대를 대표하는 랜드마크가 탄생한 셈이다.
 지난달 29일 서울대 후기 졸업식이 열렸다. 코로나19로 중단됐던 대면 졸업식이 3년 만에 재개됐다. 이날 정문 앞 의자가 '핫 플레이스'로 떠올랐다. 가족들과, 친구들과 함께 사진을 찍으려는 졸업생들이 줄을 이었다. 소위 인증샷의 명소가 됐다. 졸업식 사흘 전에 찾아간 현장 모습도 다르지 않았다. 의자에 앉아 미리 졸업사진을 찍으려는 학생들로 붐볐다. 기념사진을 전문으로 찍어 온 출장 사진가의 목소리도 들렸다. “정말 좋아졌지요. 예전엔 정문 밑으로 차가 다녀 교통사고도 자주 났어요. 자~ 이리로 오세요.”
 ‘샤광장’ 디자인은 서울대 건축과 서현 교수가 맡았다. 건축학과 82학번 출신인 그는 “그간 자동차에 포위되고, 또 방치됐던 공간을 서울대의 새 얼굴로 만들려고 했다”고 말했다. 그가 가장 주목한 대목은 역시 돌의자다. “서울대생만을 위한 곳이 아닙니다. 여기 앉은 모든 사람을 존중한다는 뜻입니다. 권력과 성공이 아닌 지식과 나눔을 실천하는 서울대가 됐으면 합니다.”
 사실 한국 사회에서 서울대는 두 얼굴을 지녀 왔다. 각 분야 리더를 키우는 인재의 요람인가 하면 자신만의 이익을 좇는 그들만의 리그 측면도 있었다. 찬사와 비판을 동시에 받았다. 윤석열 정부의 초기 인선도 ‘서오남(서울대 50대 남자)’이란 부정적 뉘앙스가 부각됐다. 한마디로 ‘끼리끼리’에 대한 의심의 눈초리다. 한국 사회의 갖은 자원이 투입되는 서울대의 책임감을 일깨우기도 한다. ‘서울대 의자’의 상징성이 도드라진다.
 물론 의자 하나가 세상을 바꾸진 못한다. 하지만 좋은 디자인, 훌륭한 공간은 알게 모르게 우리를 변하게 한다. 지난달 29일 졸업식 축사를 한 허준이 프린스턴대 교수의 당부를 인용한다. “병원 1인실에서 사망하기 위한 준비에 산만해지지 않기를… 혐오와 경쟁과 분열의 달콤함에 길들지 말기를….”
 서울대로 대표되는 사회 지도층이 두고두고 새길 말이다. 바닥 모를 자리싸움에 빠진 정치권은 말할 것도 없다. ‘지금 어드메쯤/ 아침을 몰고 오는 분이 계시옵니다/ 그분을 위하여/ 묵은 이 의자를 비워드리겠어요.’(조병화의 ‘의자’) 여의도여, 용산이여, 이제 그 낡은 의자 좀 치워 주세요~.